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90)화 (90/139)

90화

새벽빛이 눈물 자국으로 발갛게 물든 눈가에 맺혀 들었다. 하얀 눈가를 가리던 햇빛과는 달리 서슬 퍼런 색채였다.

침대에 걸터앉은 우연재는 손을 뻗어 제가 직접 씻기고 말린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문서윤이 잠결에 약하게 신음했다.

꼴렸다는 말에는 과장이 없었다. 순식간에 치달은 고양감에 당장 문서윤을 파고들어 제멋대로 휘두르고 싶었다.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흥분은 몇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했지만, 원하는 바를 이룬 덕분에 나름대로 만족한 상태였다.

“문서윤.”

우연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드러운 어감의 이름을 굴렸다.

피아노를 바라보던 시선이 천천히 흘러오며 시선이 뒤엉키던 때가 떠올랐다. 찰나에 느꼈던 압도적인 무언가가 다시금 물밀듯이 덮쳐 오기 시작했다.

“도망가지 마.”

눈이 마주친 순간 우연재는 깨달았다.

문서윤의 애정이 녹아든 대상은 리스트의 곡이나 피아노 따위가 아니었다.

“이제 진짜…….”

주체할 수 없는 애정이 찡그리듯 웃는 얼굴에 흠뻑 배어난 순간, 그는 직감했다.

“너한테는 나밖에 없잖아.”

장난이라도 치듯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던 손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색색 숨을 내뱉고 있는 입술을 짓눌렀다. 말랑말랑하고 뜨거운 살덩어리가 거리낌 없는 손짓에 보드랍게 뭉개졌다.

여태 몇 번 느껴 보지 못한 뚜렷한 감정이 들이닥쳤다.

광적인 열락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이 기다랗게 뻗어 나가는 입꼬리에 진득하게 매달렸다.

그러니까, 우연재는 문서윤의 모든 것을 가진 셈이었다.

그의 세상을 오롯이 차지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오점이 되리라 판단한, 짝사랑이라는 티끌만 한 감정까지 모조리.

* * *

결국 기숙사 짐이 옮겨진 장소는 본가가 아닌 우연재의 오피스텔이었다. 멍청한 선택이라는 걸 알았으나 한 번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은 또다시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는 법이었다. 우연재의 오해를 바로잡는 대신 섹스하겠느냐는 제안을 덥석 물었을 때부터 돌이킬 수 없어진 일인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와서 반항하는 것도 아니고…….’

문서윤은 스스로를 질책하며 기숙사 안으로 들어섰다.

기실 반항의 대상도 불분명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라고도, 우연재에 대한 반항이라고도 할 수 없는 모호한 반발 심리였다. 어쩌면 저 자신을 향한 감정일 테다. 지난 7년간 꾹꾹 눌러 둔 욕심이 저도 모르는 사이 삐져나와 만들어 낸 추잡한 결정체인지도 모르겠다.

우연재의 마음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마음에 관한 건 주제넘는,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이라는 걸 그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보다는 잠시나마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당장 1년하고도 몇 개월 후면 얼굴을 보기 힘들어지는 상황이었으니까.

고작해야 2개월 남짓이니 이 정도 욕심은 괜찮지 않을까.

“한번 멍청한 짓 했더니 아예 미쳤나 보다.”

자괴감이 섞인 혼잣말이 한숨과 한데 뒤엉켰다.

우연재와 잤다. 두 번이나.

강요 따위는 없는 오롯한 제 선택이었는데도 자괴감이 밀려오는 걸 막기가 어려웠다. 그런 주제에 짝사랑 상대의 오피스텔로 들어가겠다는 결정을 내린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래도 방은 따로 쓰기로 했으니까.’

자기 합리화나 다름없는 핑계였다.

“하…….”

문서윤은 한숨을 내쉬며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는 단순 노동을 하고 있자니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지난 주말, 우연재와의 섹스 이후 잠에서 깨어났을 때였다.

같이 침대에 늘어져 있던 지난번과 달리 우연재는 보이지 않았다. 문서윤은 언뜻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고 나서야 해가 한참 전에 떴음을 깨달았다.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엄습하는 중에도 온몸이 아파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는 일어나길 포기하고는 뻔뻔하게 주인 있는 침대에서 몸을 웅크렸다. 코를 이불에 파묻은 채 느릿하게 눈만 깜박이고 있는데 익숙한 인영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물 마셔.’

문서윤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한 박자 늦게 몸을 일으켰다. 덮고 있던 이불이 주르르 미끄러지며 울긋불긋한 피부가 희게 드러났으나 헐벗은 상태를 자각하지 못한 그는 우연재가 내민 물만 받아 마셨다. 목을 축이느라 진득하게 훑어 내리는 시선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 목마른 거 어떻게 알았어?’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처음 내뱉은 말은 무척이나 보잘것없었다.

‘물 마시고 싶다며.’

‘내가?’

‘아까 웅얼거리던데.’

잠결에 갈증을 느낀 모양이었다.

‘……물 가지러 갔었어?’

문서윤은 컵을 돌려주며 물었다.

웬일로 우연재는 다 마신 컵을 곧장 주방으로 가져가는 대신 사이드 테이블 위로 올려 두었다. 뭐지, 의아하게 여기는 찰나 그가 침대로 올라오더니 그대로 허리를 끌어안아 누웠다.

얼떨결에 또다시 침대에 등을 붙인 문서윤은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뭐 해?’

‘뭐가.’

‘……왜 끌어안아? 아니, 왜 다시 눕냐고.’

‘서윤아.’

우연재가 눈가를 찡그렸다.

‘다른 새끼한테 들여온 버릇 티 내지 말랬잖아.’

문서윤은 그제야 우연재가 첫 섹스 이후의 아침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민망함에 자리를 피하려다가 오해를 산 게 여태 이어지고 있었다.

‘……미안. 조심할게.’

해명할 수 없는 오해였기에 그가 건넬 수 있는 말은 사과가 전부였다.

‘존나 서운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거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에 문서윤은 눈만 깜박였다.

‘내가 서운한 표정으로 봤다고?’

왜 그런 표정을 지었지? 뒤늦게야 우연재가 옆에 없어서 그랬나, 싶은 생각이 몰려왔다. 서운하다는 감정을 느낄 정도로 머리가 맑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저도 모르는 사이 미처 자각하지 못한 감정이 얼굴로 스며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애인도 뭣도 아닌, 저 한 몸 희생해 준 친구에게 그런 죄스러운 감정을 느낀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거울 보여 줘?’

언제 인상을 찌푸렸냐는 듯 우연재가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며 물었다.

‘……거울은 무슨 거울이야.’

‘다른 새끼들처럼 섹스하자마자 내쫓을 생각 없으니까…….’

평소처럼 장난으로 넘기려는데 우연재가 팔꿈치를 세워 모로 눕더니 손목을 낚아챘다.

‘잘 거면 더 자.’

따뜻한 체온이 달라붙고 나서야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문서윤은 무심결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헐벗은 손목을 기다랗고 굵은 손가락이 감싸고 있었다. 지난밤 우연재가 잡고 놔주지 않던 순간이 겹쳐져 갑작스레 열이 올랐다. 가만히 누워 있다가는 뺨까지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

‘뭘 더 자. 일어나야지.’

이대로 있으면 티가 날 것 같아 일어나려 했으나 막 잠에서 깬 몸은 힘을 싣지 못했다. 결국 문서윤은 무리해 손을 뿌리치는 대신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장난을 치듯 손목의 힘줄을 따라 움직이는 손가락 때문에 까딱하다간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벌써 일어나서 뭐 하게.’

‘그냥…….’

순간 말문이 막혔다. 카페 아르바이트가 있긴 했지만, 늦은 오후 타임이었다.

‘어차피 방학 내내 여기서 지낼 텐데.’

당연하게 제 거주지를 단정 지은 우연재가 눈꼬리를 접었다. 얼굴을 받쳐 모로 누운 자세 때문에 뺨이 손가락에 짓눌리며 눈매가 야트막하게 휘어졌다.

‘빨리 적응해.’

힘줄을 갉작이던 손가락이 스르르 움직이며 손목 전체를 쥐었다. 적당한 압박감에 통증을 닮은 아릿한 성감이 올랐다.

“아.”

쓸데없는 순간을 떠올리며 짐을 옮기던 탓인지 무릎이 침대에 부딪혔다. 멍이 들 게 확실한 통증에 문서윤은 다리를 문지르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습관처럼 한숨을 내쉰 그는 서둘러 짐 정리에 나섰다. 종강 전부터 미리 박스에 담아 둔 덕분에 챙겨야 할 게 많지는 않았지만, 침대를 정리하려니 부피가 크기는 했다.

“다 챙겼어?”

뒤쪽에서 불쑥 우연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서윤은 고개를 돌렸다. 퇴실 기간이라 출입구가 열려 있어 수월하게 들어온 모양이었다. 어깨 너머로 활짝 열린 문이 보였다.

“차 세웠어?”

“응. 이 앞에.”

“차 많아서 주차할 데 별로 없었을 텐데.”

“그래서 이제야 올라왔잖아.”

본가에서 차를 가지고 오지 않은 바람에 우연재의 차를 타고 온 참이었다.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 우연재가 또다시 내부를 훑어 내렸다. 정리된 박스를 내려다보던 시선이 마침내 맞은편의 텅 빈 침대로 향했다. 문서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박스를 품에 안았다.

“비켜 봐. 앞에 쌓아 놓고 옮기게.”

툭 치자 아무것도 없는 침대를 빤히 쳐다보던 시선이 데굴데굴 굴러왔다. 우연재가 박스를 앗아 가며 말했다.

“같이 옮겨.”

어쩐지 성가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