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85)화 (85/139)

85화

문서윤은 힐금 운전하는 옆모습을 살폈다. 본가에 온 김에 차를 가지고 가려고 했더니, 갑작스레 제 거취에 대한 거짓말을 날린 우연재 때문에 어영부영 그의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일요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기숙사에서 뺀 짐을 어디로 옮길지에 관해서는 고민을 조금 더 해 봐야 할 듯했다.

학기 초까지만 해도 단호하게 생각하던 문제를 이제 와 고민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방을 따로 쓰는 거면 괜찮지 않나, 하고 자꾸 합리화를 하게 되는 이유가 불편한 관계의 사람들 때문인지 아니면 우연재와 같이 있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헷갈렸다.

‘둘 다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우위를 점한 이유가 있을 테다.

문서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피아노곡과 함께 새어 나와 버린,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을 욱여넣기 위해서는 새롭게 산재한 문제에 골몰하는 게 최선이었다.

자해라도 하듯 마음을 괴롭히는 고민에 저 자신을 몰아넣고 있을 때였다. 우연재가 입을 열었다.

“오피스텔 가도 상관없지?”

“……내 얘기 하는 거야?”

“응.”

문서윤은 시트에 머리를 묻은 채 고개만 살짝 돌려 우연재를 재 보듯 응시했다. 피아노를 쳐 준 이후부터 뭔가 묘하게 달라진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디가 달라졌느냐는 꼽기가 어려웠다. 표정도, 목소리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어딘가가 낯설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기분 탓인가.’

피아노를 치면 감정에 몰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하필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는 의미가 담긴 곡이었다.

문서윤은 가곡의 바탕이 된 프라일리그라트의 시를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다. 마음이 타오르도록, 사랑을 품도록, 그 사랑을 간직하도록 애쓰라.

보잘것없는 짝사랑을 대단한 시인의 시에 빗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곡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알고 있는 채로 건반을 누르다 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 그 감정에 매몰된 모양이었다. 문득 사랑이란 감정에 젖은 이는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던 말이 떠올랐다. 우연재가 달라 보이는 것 역시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

“아르바이트도 내일로 바꿨다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자 우연재가 재차 입을 열었다. 도르르 움직인 눈동자에 시선이 짧게 뒤엉켰다 풀려나가는 느낌이 들어 문서윤은 괜스레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처음 그를 좋아하게 된 순간처럼 설렘과 엇비슷한 감정이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다 큰 성인 남자가 느끼기에는 너무나도 풋풋해 낯간지러운 감정이었지만, 7년 전의 그날이 겹쳐 보여 마음이 술렁거렸다.

그때처럼 여우비가 내린 것도, 피아노를 친 사람이 우연재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 순간이 겹쳐졌다.

“……알았어.”

우연재의 제안에 순순히 응한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혼자 의미를 부여한 것에 불과하더라도 7년 전에 느꼈던 찰나의 순간을 조금이나마 더 길게 간직하고 싶었다.

그때처럼 아무런 걱정도, 불안도, 고뇌도 없이 순수하게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앞으로는 영영 힘들 테니 오늘만이라도 욕심 아닌 욕심을 내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피아노를 핑계 삼아서라도.

신발장에 가지런히 신발을 벗고 있을 때였다. 우연재가 또다시 머리카락에 코를 박았다.

“네가 개야? 왜 자꾸 냄새 맡아.”

“향수 냄새 좋아서.”

“말투는 전혀 아닌데.”

대놓고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문서윤은 거실로 들어서며 괜히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남태은이 처음 장난을 쳤을 때 귀찮더라도 감고 나올 걸 그랬다는 후회가 몰려왔다.

그렇게 심한가. 몇 시간이나 지난 상태라 코가 적응했는지 별다르게 인공적인 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시험을 보는 내내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을까 봐 걱정이었다.

“냄새 많이 심해?”

“존나.”

“아, 민폐 짓 했네.”

지나치게 인공적인 향은 아니었어도 향수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제법 고역이었을 테다.

“씻고 나와.”

우연재가 욕실을 향해 까딱 턱짓했다. 언뜻 찌푸려진 얼굴을 보니 냄새가 정말 불쾌한 모양이었다. 깔끔 떠는 성격을 잘 아는 데다가 향수 역시 아무 향이나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문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 냄새 싫어하는구나. 그는 반사적으로 옷자락을 끌어다 코를 묻었다. 직접 향수를 사는 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만약 사게 된다면 이런 향은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재가 싫어할 테니까.

늘 그렇듯 미지근한 물로 씻고 나오자 다리를 꼰 자세로 발끝을 까딱이는 우연재가 보였다.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가락은 무언가에 골몰한 기색이 완연했다.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지.

침실로 들어갈 것도 아니었기에 문서윤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고 물으려는 찰나, 우연재가 먼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문서윤.”

“왜?”

평소처럼 부르는 목소리에 문서윤 역시 평소처럼 답했다.

“할래?”

우연재가 가볍게 물음을 던졌다.

툭. 값비싼 가죽이 짧게 깎인 손톱 밑에서 뭉그러지는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뭐?”

아무리 목적어가 생략됐어도 무엇을 하겠느냐고 묻는지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갑작스러운 물음이 당황스럽지 않은 건 아니라 문서윤은 눈만 깜박거렸다.

우연재와 잔 이후 간혹 미묘한 기류가 흐른 적은 있어도 또다시 몸을 섞은 적은 없었다. 문서윤 제가 하겠다는 말을 꺼낸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꼴려서.”

황당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반문에도 우연재의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뭐라고?”

“너 보니까 꼴린다고.”

“갑자기?”

멍청한 물음이 튀어 나갔다. 머릿속을 채운 생각이 의문뿐이라 반쯤은 반사적으로 흘러나온 물음이었다. 갑자기 왜.

저야 우연재를 좋아하니 그에게 성욕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우연재는 아니었다. 사랑을 번식욕의 부산물 정도로 취급하는 그가 갑작스레 좋아하는 감정을 느꼈을 리도 만무했다.

그러나 문서윤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성욕이 동할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편은 아니었다. 결국 우연재가 저를 보며 꼴렸다는 건 말 그대로 성욕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갑자기 왜.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갑자기는 아니고.”

툭. 또다시 손가락이 가죽 소파를 건드리는 소리가 났다. 주변이 지나치게 고요해 별것 아닌 소음이 크게만 느껴졌다.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긴장이 치솟으며 호흡이 조여들었다.

“피아노 칠 때부터 꼴렸어.”

도대체 어떤 부분이 꼴렸는지 짚어 내기가 버거웠다.

다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순간들이 있기는 했다. 가령 이채가 도는 듯하던 눈동자 같은 것들.

“그냥 물어보는 거야. 강요할 생각 없어.”

“싫다고 하면 ……다른 사람이랑 할 거야?”

또 멍청한 물음이 튀어 나갔다. 제 질문에 대해서 같은 감상이 들었는지 우연재가 눈썹을 찌푸렸다.

“문서윤이 나를 문란한 새끼 취급 하네……?”

그 위로 팬 홈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느껴졌다.

“누가 쓰는 건데, 딜도는 깨끗해야지.”

느슨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기어코 장난기가 걸렸다.

“자위로 끝내도 되고.”

자위라는 단어에 문서윤은 세 번째 멍청한 생각을 했다. 나를 떠올리면서 하겠다는 소리인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에 꼴렸다는 말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빈말을 던진 것 같지는 않았다. 우연재가 대놓고 꼴렸다느니 말을 한 건 지금이 처음이었으니 거짓말은 아닐 테다.

멍청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눈만 깜박이고 있자 우연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팔걸이에 손을 짚으며 일어나서인지 소파가 빠듯한 소음을 자아냈다. 고요하기 짝이 없던 공기가 일순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씻고 올 테니까 하고 싶으면 말해.”

조금만 움직여도 손가락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문서윤은 멀거니 우연재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비스듬히 떨어진 시선이 어딘가를 더듬더니 뺨이 살짝 찡그려졌다.

“싫다는 애 붙잡고 할 생각 없으니까 도망가지는 말고.”

우연재는 제 할 말만 남긴 채 사라졌다. 서로의 표정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는데도 손끝 하나 스치지 않는 깔끔한 멀어짐이었다.

문서윤은 익숙한 향수 냄새가 훅 끼쳤다가 사라질 즈음에야 뒤를 돌아봤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욕실로 향하는 너른 등이 전부였다.

“갑자기 왜…….”

소파에 앉을 정신조차 사라졌다.

제게 꼴렸다는 우연재가 이해 가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섹스가 처음이었으니 그런 게 아닐까.

한번 하고 나면 눈을 뜨게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군대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남태은이 꼭 좆도 작은 새끼들이 저런 소리를 한다며 빈정거렸지만, 그의 빈정거림에도 꿋꿋하게 수위 높은 발언을 날리는 동기들이 있었다. 남의 성생활까지 알고 싶지는 않아 별다른 관심을 가진 적은 없지만, 몇몇이 동의했던 걸 보면 영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우연재도 남자이니 처음으로 섹스를 한 제게 꼴리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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