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훔쳐보듯 눈꺼풀을 내리깔자 앨범으로 향한 우연재의 시선이 보였다.
“손잡고 있는 거 보면 화난 건 아닐걸.”
우연재가 제 반응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긴장이 풀렸다. 문서윤은 그제야 사진을 향해 고개를 떨어트렸다.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연재와 달리 저는 뭐가 그리 좋은지 해맑게 웃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그러나 저보다 큰 손을 꼭 붙잡은 채였다.
“오랜만에 보니까 색다르기는 하네.”
고개를 기댄 자세라 그런지 우연재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맞닿은 몸을 통해 나지막한 울림이 전해졌다. 어쩌면 우연재의 목소리가 아닌 제 심장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계속 봐 봐.”
문서윤은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앨범을 넘겼다. 어릴 때의 사진을 보다 보면 금방 추억에 젖어 들 테니 자꾸만 치대 오는 우연재의 행동 역시 아무렇잖게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있네, 김다정.”
“김다정?”
“네 여자 친구.”
유치원에서 찍은 게 분명한 사진에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문서윤은 그중에서도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친했으면 기억이 날 법도 한데, 정말로 모르는 얼굴이었다.
“진짜 기억 하나도 안 나.”
자세히 보면 기억이 날까 싶어 가까이 대고 보려는데 기대앉은 우연재가 팔을 뻗어 앨범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뭔가 싶어 쳐다보자 곧장 눈이 마주쳤다. 우연재가 이쪽을 쳐다보기 위해 얼굴을 살짝 젖힌 탓이었다.
사이에 남은 틈은 실낱처럼 가느다랗기 그지없었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맞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
느지막한 오후의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완벽하게 보호되도록 너른 부지에 지어진 집과 끝을 모르고 뻗은 담벼락은 쓸데없는 소음을 막아 주기에 충분했다.
불시였다. 우연재의 본가에, 2층에 위치한 그의 방에, 단둘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 건.
오피스텔보다 훨씬 넓었으나 오피스텔보다 훨씬 익숙한 장소였다. 우연재의 흔적이 날것처럼 밴 공간이기도 했다.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거리를 벌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어깨에 기댄 이를 밀어내려는 순간 우연재가 느릿하게 입술을 벌렸다.
“문서윤.”
긴 속눈썹이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제자리를 찾아왔다.
“꼴렸어?”
“뭔 소리야.”
순간 심장이 철렁했으나, 다행히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우연재는 별것 아닌 물음을 던진 사람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얼굴 빨개졌길래.”
뒤늦게야 열 오른 뺨이 느껴졌다.
“이제 내가 좀 좋아졌나 싶어서.”
얇게 접히는 눈꼬리에 심술이 걸려 있었다.
“붙어 앉으니까 더워서 그렇겠지.”
궁색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으나 어느덧 5월 중순이었다. 채광이 훌륭하게 설계된 집은 여과 없이 햇빛을 흘려보냈다. 나른한 기분에 젖을 만큼 적당한 햇빛이었으나 누군가에게는 따가운 참견일지도 몰랐다. 달아오른 뺨을 날씨 탓으로 둘러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변명이었다.
문서윤은 떨어지라는 의미로 우연재의 허벅지를 밀어내듯 건드렸다.
“그리고 당연히…… 좋아하지.”
가시가 걸린 것처럼 목이 꺼끌꺼끌했다.
“제일 친한 친군데.”
새까만 눈동자가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직시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홍채에 비친 긴장한 낯을 또렷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아.”
천천히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길게 늘인 말꼬리가 튀어나왔다. 문서윤은 그제야 우연재가 저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처럼 눈동자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이 아니라.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이었다.
“아직 그런 의미로만 좋아?”
허벅지를 밀어내는 손길에도 우연재는 밀려나기는커녕 오히려 뺨을 비비듯 얼굴을 파묻었다.
애초에 고작 이 정도 악력으로 우연재를 떨어트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온 힘을 실어 거부해야 겨우 밀려날까 말까인데 문서윤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었다. 어쩌면 완강하게 밀어낼 결단력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한지도 모르겠다. 홑마음은 늘 사람의 의지를 말캉하게 짓무르고는 했으니까.
“다른 의미로까지 좋아지려면 멀었나 보네.”
위로 슬쩍 젖혀진 고개가 다시 떨어졌다.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얕게 손을 떨었다. 허벅지를 밀어내던 손 위로 기다란 손가락이 닿아 온 바람에 평온하게 굴기가 어려웠다. 장난을 가장해 밀어내려던 손이 마찬가지로 장난스레 붙잡혔다.
“노력해야겠네?”
허벅지로 내려간 시선이 혼잣말에 가까운 말꼬리와 함께 다시 비스듬히 올라왔다. 우연재는 조금 전처럼 고개를 살짝 젖힌 채 입술을 끌어 올렸다. 어깨에 기대 오는 무게에 미동조차 하지 못한 문서윤은 그 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과 달리 새까만 홍채에 갇힌 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볼 자신이 없어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으니 볼 수 없다는 말이 더 적합할 테다.
“뭘 또 노력해.”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문서윤은 대화를 뭉갰다. 음습한 욕심에 소꿉친구와 자겠다는 선택을 했고, 치졸한 방법으로 우연재의 처음을 앗아 왔다. 잘못된 방법이었던 만큼 또다시 몸을 섞고 싶다는 욕심은 잠재운 지 오래였다. 고작 몇 시간 지속될 쾌감은 그 수배에 달하는 기나긴 자괴감을 가져다줄 것이다.
‘우연재도 굳이 먼저 자자고 할 것 같지는 않고.’
눈물 때문에 내내 희부옇던 시야가 떠올랐다. 우연재의 아래에서 맥없이 흔들렸는데도 시야가 불분명해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몇 번이나 몸을 섞었고 또 사정까지 했으니 느끼긴 한 것 같았다.
딱히 저와의 관계가 좋아서 그랬던 건 아닐 것이다. 남자라면 다 느낄 테니까.
그날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그날로부터 시작된 의문이 또다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도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걸까.
‘문서윤. 난 너한테 못 해 줄 거 하나도 없어.’
내내 그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우연재는 못 해 줄 게 없다고 했으나 고작 친구의 짝사랑 때문에, 그리고 그 짝사랑으로 혹시나 친구가 망가질까 걱정돼 대신해서 몸을 내주겠다는 동성의 소꿉친구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내가 뭐라고 섹스까지 해 주는 걸까.
우연재는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저와 섹스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제 마음을 가져가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문서윤이 다른 새끼 생각 못 할 거 아냐.”
제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연재가 예쁜 표정을 지으며 살살거렸다. 문서윤은 그 얼굴을 눈에 담았다. 기실 노력해야 하는 사람은 우연재가 아닌 저 자신이었다. 마음을 접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문서윤은 딱 달라붙은 입술을 간신히 떼어 냈다.
“다른 사람이랑 안 잔다니까. 네 말대로 내가 성욕이랑 감정 착각하는 거면…….”
달싹이던 입술은 한숨 고르고 나서야 간신히 말을 끝마쳤다.
“안 하다 보면 그 착각도 없어지겠지.”
“그 전까지 잘 써먹으라고.”
사람이 물건도 아니고, 써먹으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들렸으나 우연재와 말씨름을 해 이긴 기억은 손에 꼽았기에 문서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에 힘을 실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기대. 무거워.”
“사진 잘 안 보이는데.”
“가운데 놓고 보든가.”
문서윤은 제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앨범을 슬쩍 옮기며 우연재의 허벅지에 닿아 있던 손을 물렸다. 장난치듯 긁어 대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어깨에 기댄 무게가 가벼워진 것과 동시였다. 턱 끝에서 살랑거리던 머리카락이 그 움직임을 따라 금세 멀어져 갔다.
아쉬웠으나 아쉬움을 티 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기대고 있던 무게가 떨어져 나가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무리 우연재와 할 걸 다 했다고 해도 그를 마음에 품고 있는 이상 자잘한 스킨십이 편해지는 건 불가능했다.
“더 붙어.”
안도감에 작게 한숨을 내쉰 순간 우연재가 아무렇지 않게 허리를 끌어당겼다.
“읏.”
간지러운 느낌에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배에 힘을 실었다. 우연재와 있을 때면 항상 뻣뻣하게 긴장하고 있던 터라 이렇게까지 대놓고 파드득 튀어 오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누가 봐도 과한 반응이었던지 우연재가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한두 번 이러는 것도 아니고 왜 새삼스럽게 손을 타지…….”
너무 의식했나 싶어 지레 놀란 마음에 옆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을 겨를도 없었다.
“어?”
“간지러운가 싶어서. 간지럽혀 줘?”
언제 눈썹을 찌푸렸냐는 듯 우연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금방이라도 간지럼을 태울 기세라 문서윤은 허리 위에서 배회하는 손을 꽉 잡아 눌렀다. 꼴리냐는 물음을 들은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이상으로 자극당하면 뇌가 본능에 통제권을 빼앗길지도 몰랐다.
“하지 마. 네가 어린애야? 이 나이 먹고 간지럼 태우게?”
“그러니까 붙어 앉아.”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이 실리자마자 몸이 미끄러지듯 바짝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