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문서윤.”
“……왜.”
침대 주인이 마침내 들어온 모양이었다. 한 박자 늦은 대답이 잠에 취한 탓이라고 생각했는지 연이어 불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학교 가기 전에 아침 먹어.”
“……응.”
싫다고 하면 잔소리가 이어질 게 뻔해 문서윤은 이불 아래에 숨은 채 대답했다.
우연재의 집에서 자면 꼭 지켜야 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아침 식사였다. 문서윤 역시 꼬박꼬박 아침밥을 챙겨 먹는 편이었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종종 아침을 거르고는 했다.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우연재는 같이 학교에 가는 날이면 꼭 식사를 챙겼다. 아침을 먹으라는 소리 역시 이제는 익숙했다.
“대답 느리네?”
“졸려서 그래.”
우연재가 키득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졸리면 자.”
“……네가 말 시키잖아.”
“아, 들켰네.”
성인 두 명이 뒹굴어도 남을 만큼 큰 사이즈의 침대이기는 해도 열여덟이나 먹은 남자애 둘이서 한 침대에서 자는 경우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을 테다. 문서윤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에게는 우연재와 한 침대를 공유하는 게 익숙했다. 여섯 살부터 이어진 일을 새삼스레 의식하는 게 도리어 더 이상할 것이다.
‘우연재 좋아해서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드나.’
홀로 품은 마음만 아니었다면 저와 우연재만 알고 있을 일상을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 생각하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만 알고 있는 일이니까 별문제 없겠지.’
문서윤은 이불 안으로 쏙 집어넣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시험이 끝나면 자연스레 제집이 아닌 우연재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같이 먹는 저녁도, 새벽까지 보는 영화도 모두 익숙했다. 방과 이어진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면 제 교복이 우연재의 교복과 나란히 걸려 있을 것이다.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이 집에 아무도 없었다. 저와 우연재는 물론 그의 부모님과 일하시는 분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이제 와서 생뚱맞게 이런 상황이 괜찮나, 하고 검열하게 되는 건 순전히 제 마음이 순수하지 못해서였다.
‘내가 우연재 좋아하는 건 나만 아니까…….’
차라리 다행이었다.
“문서윤.”
“왜.”
“잘 자.”
놀리는 게 재미없어졌는지 우연재가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잘 자라는 인사를 하는 쪽은 늘 우연재였다.
“……너도.”
문서윤은 떨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한숨처럼 대답했다.
침묵이 내려앉은 어둠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저 조마조마한 평온일 뿐이었다.
* * *
문서윤은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꿈을 꾼 것 같기도 한데, 머릿속이 몽롱해 모든 게 불분명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라고는 지나친 쾌감에 눈물을 잔뜩 흘리며 우연재 아래에서 흔들리던 순간뿐이었다.
“아…….”
햇빛에 미간을 찌푸린 것도 잠시였다. 희부옇게 변한 시야가 돌아오자마자 너른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그 위를 타고 넘어와 망막으로 스며들었다.
문서윤은 제가 우연재의 품에 안겨 있다시피 한 상태라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 사실을 의식하자마자 삽시간에 잠기운이 달아나며 온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섰다.
문서윤은 고요하게 숨을 죽이며 눈동자를 조심스레 끌어 올렸다. 다행히 우연재는 곤히 자고 있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머리카락 위로 조용히 가라앉았다.
‘왜 이런 자세로 자고 있지. 아, 어제 그래서…….’
뒤늦게 찾아온 익숙하지 않은 통증이 간밤의 일을 일깨워 주었다. 말하기 민망한 쪽이 화끈하게 아픈 것은 물론이고 온몸은 얻어맞기라도 한 양 무거웠다.
신경이 곤두선 것과는 별개로 사고 회로는 느리게 돌아갔다. 머릿속은 안개가 잔뜩 낀 것처럼 멍하기만 했다. 문서윤은 짙은 안개를 헤쳐 나가기 위해 애쓰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된 건 몇 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
그는 반사적으로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욱여넣었다.
잤다. 우연재와.
욕심과 오기가 만들어 낸 처참한 상황이 통증보다 배는 무겁게 전신을 짓눌렀다. 폭풍우처럼 몰아닥치는 감정을 뭐라고 명명해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단순히 짝사랑 상대와 몸을 섞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에는 상대가 친구라는 게 문제였다. 심지어 무려 17년이나 함께한, 제 인생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소꿉친구였다.
지독한 자괴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어쩌면 슬픔일지도 몰랐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이었다.
지난밤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모호하기만 했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은 침대 위로 올라가 엎드리던 때가 마지막이었다. 옷이 벗겨졌을 때는 깜짝 놀랐고, 아래가 벌려졌을 때는 지나치게 긴장했으며, 성기가 들어오는 순간에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팠다. 그 후에는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쾌감이 머릿속을 쾅쾅 쳐 댔다.
고이 감춰 둔 감정을 성욕이라 치부당한 상황에서도 그 성욕이라는 불순물은 결국 모든 감각을 지배하고 말았다. 빠듯하게 들어온 살덩어리가 어딘가를 찔러 댈 때마다 문서윤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눈물과 신음, 타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거친 움직임을 따라 맥없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떠오르는 찰나가 있었다.
‘으읏, 흐……. 우연, 재. 좋, 아, 흑…….’
비겁한 고백이었다. 섹스 중에만 내뱉을 수 있는, 제게 섹파가 있다고 오해한 짝사랑 상대를 향한, 초라하고 치졸한 고백.
‘좋아? 다행이네, 좋아서.’
별것 아니라는 양, 웃음기가 섞인 가벼운 대답이었다. 고백에 대한 답은 아닐 테다. 제아무리 우연재라 해도 상황의 힘을 빌린 도둑 고백을 알아들었을 리는 없으니까. 그런데도 그게 꼭 고백에 대한 답인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우연재에게는 별 의미도 없을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스스로가 한심했으나, 결코 이성으로 막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문서윤은 부어오른 입술 안쪽을 이로 갉작였다. 기어코 피가 났는지 혀끝으로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다.
‘이왕 주는 거 확실히 줘야지.’
이후로 몇 번이나 해 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지나치게 느껴 도중에 잠깐 정신을 잃은 것 같기도 했다. 드문드문 끊겼다 이어지는 장면 속에는 우연재가 저를 안고 욕실로 향하던 순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지가지 했네, 문서윤.’
뒤늦게 떠오른 기억에 창피함이 몰려왔다. 어린애처럼 욕조에 가만히 앉아 우연재가 땀과 체액, 정액에 젖은 몸을 씻어 내리는 걸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던 것 같다. 혼자 씻고 싶었으나 손끝 하나 까딱이기가 어려웠다.
“으음…….”
자괴감에 젖어 한숨을 삼킨 순간 우연재가 몸을 뒤척였다.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문서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안겨 있다시피 팔베개를 한 자세라 약간의 끌어당김에도 자연스레 거리가 가까워졌다. 쥐 죽은 듯이 숨을 쉬는데도 그 흔적이 상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거리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간신히 시선만 끌어 올리자 곤히 잠든 얼굴이 보였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욕심 때문에 미뤄 둔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새끼들 말고……. 나랑 해.’
평온한 목소리가 재차 귓가를 울렸다.
‘나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쉽잖아.’
원하면 계속 자 주겠다는 소리일까. 도대체 언제까지? 애인을 사귀기 전까지?
“하…….”
결국 삼키지 못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반쯤은 욕심에 또 반쯤은 오기에 몸을 섞기는 했으나 두 번이나 섹스할 생각은 없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쉬웠다. 한 번만 더 우연재와 자게 되면 그 이후부터는 더욱 쉬울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죄책감에 숨이 짓눌렸다.
‘이게 죄책감이 맞긴 한가.’
감정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으면 다른 감정들이 이름을 드러낼지도 몰랐다. 그러나 문서윤은 제가 느끼는 기분을 애써 죄책감으로 뭉그러뜨렸다. 나름대로 고이 간직한 마음이 고작 성욕 취급당한 상황에서 잠시나마 스쳐 지나간 절망은 없었던 것처럼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감정을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어 버려야만 했다.
잇새로 혀끝을 깨물자 자연스레 살덩어리가 입술 안쪽의 여린 살결을 짓눌렀다. 문서윤은 울컥 뻗어 나오려는 감정을 가까스로 삼켰다.
사실은 속상했다. 정확히 무엇이 속상한지는 알 수 없었어도 속이 상했다. 그저, 막연하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러면 안 되지. 자겠다고 한 사람은 난데.’
유일하게 남은 우연재의 처음을 갖고 싶다는 갈망을 이뤄 냈으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니 괜찮았다.
문서윤은 우연재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조심스레 움직였다.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껴안은 게 맞는 듯 허리를 휘감은 팔이 순순히 물러났다. 간신히 손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킨 순간, 낯선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읏.”
누워 있을 때와는 통증의 강도 자체가 달랐다. 문서윤은 무심코 신음을 내뱉은 뒤 힐긋 고개를 돌려 우연재를 확인했다. 여전히 잠든 얼굴이었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으나 일단은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았다. 평소였다면 농담 한두 마디를 주고받으며 일어났겠지만, 소꿉친구와 섹스한 뒤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한 성격은 되지 못했다.
아릿한 통증이 올라오는 허리를 무시하며 슬쩍 다리에 힘을 실으려 할 때였다.
“문서윤.”
잔뜩 잠긴 목소리가 이름을 부르자 문서윤은 움찔 어깨를 떨며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어느새 제 허리에 팔을 휘감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 일어났어?”
당황해 불쑥 묻자 반쯤 엎드린 자세로 누워 있던 우연재가 설핏 한쪽 눈을 찡그렸다.
“왜.”
이내 눈꼬리가 눈웃음을 치듯 샐쭉 휘어졌다.
“나 따먹고 버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