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문서윤은 크게 뜬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잘못 들었나, 멍청해지는 기분과 함께 끌어안은 무릎이 스르르 팔을 빠져나갔다.
정신이 돌아온 건 힘없이 빠져나간 왼쪽 발이 소파 아래에 깔린 러그에 닿았을 때였다. 우연재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적확히 이해한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잠이 들었고,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현실임을 증명하듯 맨발에 닿는 러그의 감촉은 부드럽기만 했다.
“……뭐라고?”
문서윤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바짝 목이 타들어 갔다. 잔뜩 씹어 둔 속살 때문인지 목소리를 내뱉을 때마다 입술에서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섹스.”
단 한 번도 우연재의 입을 통해 들으리라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가 그 입술을 타고 유려하게 흘러나왔다.
“할 거면 나랑 하자고.”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문서윤은 멍하게 눈만 깜박였다. 힘이 들어간 발가락 끝에서는 부드러운 감각만이 닿아 오는데 몸에서는 오히려 핏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기숙사로 가는 대신 우연재의 오피스텔로 온 건 너덜거리는 기분 때문이었다. 느닷없이 걸린 시비도, 사람을 때릴 듯이 번쩍 올라가던 팔도, 그 모습에 아주 오래된 과거를 떠올린 것도 전부 넌더리가 났다.
우연재의 말처럼 혼자 자면 악몽을 꿀 것만 같았다. 이 나이 먹고 고작 악몽 따위가 무서웠던 건 아니지만, 응석을 부리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해도 순순히 여기까지 온 건 같이 자자고 제안한 사람이 우연재여서였다. 다른 사람이 그런 제안을 했다면 다 큰 성인이 그까짓 일로 악몽이냐며 웃으며 거절했을 테다.
‘너 입술 왜 이래?’
따라온 걸 후회한 건 아무렇잖게 다가온 손가락이 입술을 짓눌렀을 때였다. 뺨이나 턱이 잡히는 건 익숙해서 견딜 만했지만, 입술을 파고드는 손가락은 결코 익숙하지 않았다.
‘나, 나 씻고 올게.’
그래서 문서윤은 도망쳤다.
욕실에 홀로 남겨진 뒤에야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뺨을 겨우 가라앉힐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시비로 놀란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마쳤을 즘에는 발갛게 변한 피부를 뜨거운 물 때문이라 둘러댈 수 있겠단 안도가 찾아왔다. 게다가 우연재가 곧장 욕실로 들어간 덕분에 그럭저럭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시간까지 생겼다.
그럼 혹시 그 짧은 사이에 진짜 잠이라도 들었나.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문서윤은 저를 내려다보는 새까만 눈동자를 보다 속눈썹을 늘어뜨렸다. 발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꿈이 보여 주는 거짓말일지도 몰랐다.
“너 지금…….”
꿈이라면 물먹은 듯 들려야 할 목소리가 제법 생생하게 귓가에 닿았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낯설게만 느껴져 문서윤은 잠깐 말을 골랐다. 혀끝으로 부어오른 속살을 쓸자 미미한 피 맛이 느껴졌다.
“무슨 소리 해?”
말을 마치자 아래로 내리깔린 우연재의 시선이 느릿하게 눈을 맞춰 왔다. 그와 동시에 문서윤은 제가 직면한 상황이 꿈이 아님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꿈일 수가 없었다. 우연재의 저런 얼굴은.
“으음…….”
우연재가 목을 울리며 앞머리를 성의 없이 쓸어 넘겼다. 잠깐 위쪽으로 비껴간 시선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제자리를 찾아왔을 때 다시 문서윤에게로 못 박혔다.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문서윤의 시선은 우연재를 따라 움직였다. 태양의 흐름을 따라 목이 꺾이도록 설계된 해바라기처럼.
어조만큼이나 평온하고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온 우연재는 소파가 아닌 러그 위에 몸을 붙여 앉았다.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팔에 힘을 실었다. 무릎을 굽힌 오른쪽 다리는 아직 소파 위에 올려진 채라 다리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가자 자연스레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됐다.
“좋아하는 사람 있다며.”
있었다. 제 발치에.
마주 보는 자세로 한껏 구겨 앉은 우연재가 손을 뻗었다.
“너 그 감정 성욕이랑 헷갈리는 거야.”
문서윤은 그제야 다리를 감싸지 않은 나머지 손이 왼쪽 허벅지에 툭 올려진 상태라는 걸 자각했다. 저보다 조금 더 길고 굵은 손가락이 그 끝에 닿고 나서야.
우연재가 손장난을 치듯 손가락을 얽어 왔다. 어린아이들이나 할 법한 손깍지였다.
“뭐라고……?”
나른하게 이어지는 말을 알아들은 건 긴 손가락이 손등을 옭아매듯 덮었을 때였다.
“다시 말해 줘? 성욕이랑 헷갈리는 거라고.”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 내동댕이쳐져 혼자 허우적거리는 기분이었다. 귀가 멍하게 막혀 듦과 동시에 입에서 뽀글뽀글 빠져나가는 기포를 맥없이 응시하듯 시야가 불분명해졌다. 문서윤은 입술을 짓씹었다. 뭉개진 입술은 다소 딱딱하게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이를 빠져나왔다.
“그러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데.”
“좋아하는 감정도 따지고 보면 번식 욕구 아닌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좋아하니 그런 마음이 들기는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상상한 적은 없어도 몸의 반응은 솔직했다.
그러나 우연재를 좋아하는 마음이 성욕에서 기인한 건 아니었다. 짝사랑을 시작했을 때 그는 고작 열여섯이었다. 머릿속에 야한 생각밖에 들어차지 않는, 흔히 말하는 사춘기였으나 문서윤은 그쪽으로는 늦된 편이었다. 맹세코 우연재를 성적으로 인식하며 좋아하게 된 건 아니었다.
“넌 그래서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고.”
“아니, 난…….”
“회사원 아니잖아? 좋아하는 사람.”
순간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문서윤은 파들파들 떨리는 속눈썹을 간신히 끌어 올려 우연재를 마주 봤다. 잔뜩 긴장한 저와 달리 평온한 얼굴이었다. 어딜 봐도 도무지 소꿉친구에게 갑작스러운 섹스를 제안한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자기 좋아한다는 걸 알았나? ……그래서, 이렇게라도 먹고 떨어지라는 소리인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우연재의 입술에서 섹스라는 단어가 흘러나온 순간부터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갈 길을 잃고 마구잡이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세 번째는 없다고 했잖아.”
손가락을 옥죄는 힘이 강해졌다.
‘세 번째는 그냥 안 넘어가.’
그때 거짓말인 거 알았구나. 토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문서윤은 꾹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정말 토할지도 몰랐다. 꾸역꾸역 눌러 온 감정을, 그리고 자그마치 7년을 쌓아 온, 친구를 향한 기만을 고스란히 내보일까 봐 무서웠다.
“하긴, 아무리 친해도 친구 사이에 섹파 얘기하는 건 민망할 수도 있지. 문서윤도 성욕이 있는데, 내가 눈치가 없었네?”
우연재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언제 강하게 옥죄었냐는 듯, 뒤엉킨 힘이 처음과 다를 바 없이 약하게 흩어졌다.
“우연재. 나 지금 네가 무슨 얘기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문서윤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섹파잖아, 그 새끼.”
“……뭐?”
그 새끼가 도대체 누군데. 생각지도 못하게 튀어나온 뜬구름 잡는 소리에 문서윤은 입술을 벌렸다. 얇은 피부에 감싸인 신체 부위가 벌어지며 그 안에 담긴 혀를 내보였다.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낸 선홍색 살덩어리였다.
“씹질 몇 번 하다 보니까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거고.”
이런 적이 없는데, 말의 선후 관계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문서윤은 입술을 벌린 채 가만히 우연재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는 최대한 차분히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자 그나마 우연재가 하는 말을 따라갈 수 있었다. 정확한 인과 관계는 알 수 없어도 제게 섹파가 있다고 오해한 것 같았다. 더불어 제 짝사랑 상대를 그 섹파라고 결론지은 듯했다. 아마도.
“내가, 섹파…… 를 좋아하는, 게…… 성욕 때문이라는 소리야?”
“아니야?”
도대체 어디서부터 오해를 바로잡아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있지도 않은 섹파의 존재인지, 아니면 좋아하는 마음에 대한 부분인지, 머릿속이 잔뜩 뒤엉켜 도저히 풀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헛소리를 다 하지.”
기분이 엉망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얘기 ……묻겠다며.”
문서윤은 감정적 동요를 내비치지 않기 위해 짤막하게 숨을 내쉬듯 대꾸했다.
“네가 착각하는 거라는 걸 계속 몰랐으면 묻었겠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우연재를 좋아하는 감정은 결코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이 감정이 착각이었다면 이렇게 괴롭지도, 숨통이 조이며 호흡이 틀어막히지도 않았을 테다.
“섹스하자는 건 ……하, 무슨 소린데.”
“성욕만 해소되면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착각도 없어질 거 아냐.”
“그래서…… 하자고? 너랑 나랑 몇 살 때부터 친구였는지 알아?”
“문서윤. 난 너한테 못 해 줄 거 하나도 없어.”
우연재는 여전히 거리낄 게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목소리 역시 별것 아니라는 어투였다.
“섹스한다고 우리 관계가 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