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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67)화 (67/139)

67화

“어, 오빠. 웬일이에요?”

안으로 들어서자 서지은이 손을 흔들며 알은체를 해 왔다.

“선배들 만났다 오는 길인데 근처에 있다길래.”

“서윤 형은 잠깐 화장실 가셨어요. 손 씻고 오신대요.”

이제 일어난다더니, 겉옷과 가방을 챙기는 모양새가 정말로 집에 가려던 참인 것 같았다.

“일찍 헤어지네?”

“말도 마세요. 한철민 그 새끼 때문에 분위기 완전 거지 같아져서.”

강수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헝클어뜨리더니 그 위로 모자를 썼다.

“철민 선배가 왜.”

그 새끼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지. 우연재는 부러 존칭어를 붙여 가며 물었다.

“몰라요. 술 존나 꼴아 가지고 갑자기 여기까지 오더니 뭔 지랄 떨잖아요. 서윤 형이랑 둘이 나가긴 했는데 형만 들어오더라고요? 별일 없었다고 하는데, 그냥 분위기도 좀 가라앉고 그래서 오늘은 집에 가기로 했어요.”

망신 좀 줬더니 그새 이 자리에 껴서 문서윤에게 분풀이를 한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불렀을 리는 없고, 술집 위치가 거기서 거기라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마주친 듯했다.

“분위기 파악 못 하시네, 선배님이.”

“그러니까 맨날 후배들 모이는 자리에 끼죠.”

언뜻 혼잣말에 섞여 든 빈정거림은 서지은의 목소리에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너 왜 여기 있어?”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연재는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문서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 있었다. 진득한 시선이 그 모습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별일 없었어?”

“무슨 별일?”

하다못해 한철민 이야기라도 꺼낼 줄 알았더니, 되묻는 걸 보니 말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냐, 됐어. 지금 헤어지기로 했다며.”

“응.”

“같이 들어가면 되겠네.”

우연재는 태연하게 말을 돌린 뒤 바깥을 향해 고갯짓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문서윤은 가방을 챙기며 지갑을 꺼내 들었다.

“아까 들어오면서 계산했어.”

“뭐? 왜 네가 계산해?”

“복학생 조별 과제 끼워 준 후배들한테 성의 표시.”

농담을 던지듯 가볍게 웃으며 대꾸하자 강수하가 덥석 말을 받았다.

“헉, 형.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서윤 형한테 도움 많이 받았는데.”

“맞아. 그래도 잘 먹었습니다.”

“저도요.”

우연재는 이제 됐냐는 의미로 슬쩍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며 문서윤을 응시했다. 문서윤은 황당함을 숨기지 않으려는 듯 콧잔등을 찌푸리면서도 이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픽 웃고 말았다.

사람들과 음식 냄새로 가득한 건물을 빠져나오자 밤공기 특유의 선선한 바람이 손끝을 스쳐 지나갔다. 그럭저럭 열기를 식혀 줄 정도는 됐다.

“저희는 들를 데 있어서 이쪽으로 가려고요.”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서윤 오빠도요.”

“안녕.”

집행부답게 넉살 좋은 이들이 사라지자 금세 정적이 맴돌았다. 길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말소리는 소음이 아닌 한 겹 뒤로 괴리된 배경음처럼 느껴졌다. 우연재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작별 인사를 건넨 문서윤이 기숙사로 홀랑 내빼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후배들에게 끝까지 손을 흔들어 주느라 타이밍을 놓친 문서윤이 뒤를 따라 걸어왔다. 우연재는 건너편 주차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타.”

걸어간다는 대답이 나올 게 뻔해 곧장 운전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문서윤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마침내 조수석에 올라탔다.

“걸어가도 되는데.”

“한철민이 지랄 떨었다며.”

“애들이 말했어?”

우연재는 어깨만 으쓱였다.

“아, 말하지 말랬더니…….”

“나한테 말 못 할 건 또 뭐야.”

“좋은 일도 아니고 말해서 뭐 해. 그나저나 너 혹시…… 아니다.”

“왜?”

“아니야.”

뭔가 물으려다 입을 다무는 게 빤히 보였다. 우연재는 단번에 생략된 말을 눈치챘다. 한철민이 제 이름을 들먹이며 지랄을 떨어 댄 게 분명했다.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도 못 알아듣는 걸 보면 생긴 것만큼이나 멍청한 새끼였다. 다른 방식으로 엿 먹여야 알아들으려나.

“다른 일은?”

“다른 일?”

“그 새끼 손버릇 더러운데. 누구는 한 대 맞아 주고 말아야겠다, 생각했을 거고.”

“……손 올리긴 했는데 안 맞았어. 자기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가던데.”

살며시 떠본 말을 문서윤이 덥석 물었다.

다른 새끼 얘기는 끝까지 안 하네.

남의 품에 고분고분하게 안겨 있던 소꿉친구가 떠올라 우연재는 혀끝으로 입천장을 쓸며 문서윤을 훑어 내렸다.

“왜?”

거리낌 없이 손을 뻗어 턱을 쥔 뒤 그 얼굴을 샅샅이 살폈으나 부어오른 흔적이나 이상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안 맞았다니까.”

다만 뺨이 희게 질려 있었다. 눈꺼풀을 내리깔자 꼭 쥐고 있는 양손이 보였다. 문 교수한테 맞은 기억 때문인가, 순간 그런 의심이 들었다.

우연재는 혀끝을 잇새로 밀어 넣으며 안전벨트를 맸다. 곧바로 시동이 걸렸다.

“야. 나 걸어가도 된다니까.”

“그 꼴로 어딜 가.”

차가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아무 일 없었다니까?”

“손 떠는 거나 잘 숨기지 그랬어.”

문서윤이 입을 다물었다.

“또 혼자 자다 엉엉 울면서 일어날래?”

문서윤은 가끔 자다가 울곤 했다. 문 교수 때문인지, 아니면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한 침대에서 잠든 일이 손에 꼽으니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힐긋 표정을 살피니 어느 정도 들어맞은 것 같았다.

“같이 자.”

우연재는 달싹이다 닫히는 입술에서 시선을 떼어 내며 핸들을 돌렸다. 안전벨트가 팽팽하게 몸을 옥죄었다.

환한 조명 아래에 서자 얼굴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곧게 뻗은 눈썹이 대놓고 찌푸려졌다.

“너 입술 왜 이래?”

차에서부터 뭔가 신경에 거슬리더라니, 입술이 부어 있었다. 우연재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부어오른 입술을 짓눌렀다. 고개를 내려 자세히 살피려는데 문서윤이 파드득 놀라며 거칠게 손을 밀어냈다.

“나, 나 씻고 올게.”

명백한 도망이었다.

우연재는 티 나게 뿌리쳐진 손을 바라보다 욕실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기다란 눈매가 가느다랗게 그어졌다.

방금 누군가가 쓰다 나온 욕실은 가득 찬 수증기로 후덥지근했다. 애초에 사람을 들이질 않으니, 다른 이가 먼저 욕실을 사용한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지나치게 깔끔하게 군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우연재는 물기가 남은 욕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제 방에 있는 욕실을 따로 사용한 영향이 컸을지도 모르겠다. 습관이든, 결벽이든, 고치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셈이었다.

학교생활을 하며 수학여행을 가거나 불가피하게 다른 사람과 함께 욕실을 사용해야 할 때는 가장 먼저 씻는 편이었다. 씻는 장소니 더럽지는 않겠지만, 다른 이의 몸을 타고 흘러내린 물기를 밟는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예외가 있다면 문서윤이었다. 그는 바닥에 난자한 물기를 아무렇지 않게 밟으며 옷을 벗었다.

“이렇게 대놓고 피한 건 처음인데…….”

제 손을 쳐 내던 감각이 여태 손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우연재는 재차 그 순간을 곱씹었다. 화들짝 놀라 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기계적으로 움직여 샤워기를 틀자 미지근한 물이 쏟아져 내렸다. 딱 문서윤이 좋아할 만한 온도였다. 우연재는 물의 온도를 조금 더 높이며 잇새로 혀를 씹었다. 하도 씹어 대서인지 미지근한 피 맛이 느껴졌다.

입술은 또 왜 그 꼴이 됐을까.

내쳐지던 순간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손가락에 짓눌리던 입술이 따라왔다. 한철민에게 맞은 건 아니었으니, 답은 하나였다.

입술이 그 꼴이 되려면 키스밖에 없지 않나. 계속 후배들과 있었으니 그 짓을 할 만한 시간은 지극히 짧았을 테다.

“…….”

우연재는 남자의 품에 고분고분하게 안겨 있던 친구를 또렷이 기억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물 때문인지, 순간 온몸으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나 전역하자마자 카페 일 시작했잖아. 마감 타임까지 일하는 날도 많았고……. 퇴근 시간 때 들르는 회사원이야.’

짝사랑 상대가 회사원이 아니라는 것쯤은 진작 눈치챈 상황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남자야.’

1년 반이나 함께한 ……남자.

‘그런데 나는 연상 좋아해서.’

게다가 연상.

차에서 벌인 설전을 묻겠다고 한 건 그 일을 덮겠다는 의미였지, 남자를 좋아하는 감정까지 이해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도대체 왜? 중학교 때 잠깐 떠돌다 사라진 말 같지도 않던 소문은 논외였다. 그저 같은 성별을 좋아한다는 고백이 이해되지 않을 따름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결국 호르몬이다. 인간이 호르몬의 명칭을 대신해 로맨틱한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필요했고,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태가 필요했다. 조금 더 수월한 노동력 생산을 위해 사랑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섹스의 시발점이 교미를 위한 성욕인 것보다는 아름다운 감정인 쪽이 조금 더 문명인처럼 느껴지니까.

문득 열에 취해 들었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형도 주말에 잘 안 들어오면서 무슨 소리예요.’

룸메이트가 주말에 안 들어오는 걸 왜 아쉬워하지. 둘이 뭘 하길래.

연이어 몇몇 과거가 불쑥 뇌리를 침범했다.

군대로 도망친 문서윤은 휴가를 나온 날이 손에 꼽았다. 본가에 들어간 날은 더 손에 꼽았고. 문 교수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집에 안 들어가고 뭐 했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습한 공기로 가득 찬 공간을 웅웅 울렸다. 샤워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은 끝 갈 데를 모르고 흘러내려 머리카락은 물론 온몸을 흠뻑 적셨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소리 때문에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문서윤도 성욕이 있겠지. 우연재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인지했다.

“하.”

물에 젖은 입꼬리가 비틀렸다.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으나, 사실은 성욕에서 기인된 착각일지도 몰랐다. 애초에 이성도 아닌 동성에게 성욕을 느끼는 게 가능한가 싶었으나 머리가 가라앉은 상태라 그런지 얼핏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저 같은 인간도 있는데 독특한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없을 리가. 양성애자라는 단어가 있는 만큼 성별 관계없이 성욕을 느끼는 인간들도 있을 터였다.

우연재는 그제야 명쾌한 해답을 찾아냈다. 문서윤은 동성인 남자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으나, 그 실상은 단순한 성욕일 테다.

“하…….”

느지막이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한숨과 헛웃음이 섞인 날카로운 숨결이 빠져나왔다.

“성욕이라고.”

그 남자에게 배운 담배. 몇 번 나오지 않은 휴가. 거리낌 없이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던 손. 당연하다는 듯이 품에 안겨 있는 문서윤.

‘짝사랑이라고 하는 거 보면 사귀는 건 아닌 것 같고……. 섹파인가.’

가장 혐오스러워하는 인간 군상 중 하나였으나, 어쩌면 가장 솔직한 부류들이었다. 사랑이라는 허울뿐인 감정 없이 성욕에 끌려 만난다는 걸 순순히 인정한 이들이었으니까.

우연재는 또다시 이로 혀끝을 씹었다. 아무래도 제 소꿉친구는 성욕을 대단한 감정으로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회의적이라 해서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언젠가 문서윤에게 그의 기준에 맞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괜찮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친조카처럼 예뻐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일 거라고.

“그런데 기껏 선택한 게…….”

남자라니. 고작 성욕 하나에 휘둘리기에는 사회적 시선이 최악이었다.

우연재는 문서윤이 쓸데없는 일로 다른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걸 원치 않았다. 지금은 별문제 없어 보여도 이딴 식으로 계속 남자들을 만났다가는 이상한 새끼들이 꼬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우연재는 한참을 뜨거운 물 아래에 서 있었다. 뚝뚝 떨어진 물방울이 입술 사이를 파고든 순간, 날카로운 이가 재차 살덩어리를 짓씹었다.

“…….”

문서윤이 감정을 착각하는 원인을 찾아냈으니, 해결 방법을 도출해 내는 건 무척이나 손쉬운 일이었다.

우연재는 머리까지 말린 뒤에야 욕실을 나섰다. 문서윤이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부어오른 입술이 잇새에 짓눌렸다. 제 공간에 들어선 순간부터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던 입술이었다.

“서윤아.”

당연하다는 듯 그쪽을 향해 다가선 그는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문서윤이 입술을 달싹이자 이에 물려 있던 입술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언뜻 안쪽으로 피가 비친 것 같았다. 우리 서윤이가 그 새끼랑 재미 좋았나 보네.

“나랑 할래?”

“뭘?”

목적어가 생략된 말에 문서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연재는 자못 순진해 보이는 17년 지기 소꿉친구를 바라보며 물었다.

“섹스.”

별것 아니라는 양, 평온한 어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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