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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56)화 (56/139)

56화

비꽃

문서윤은 설핏 잠에서 깨어났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뭐지. 잠결에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손가락 사이사이로 엉겨 붙은 다른 굵기의 손이 보였다. 문서윤은 그제야 제가 우연재와 손깍지를 끼고 있음을 의식했다. 손바닥이 축축한 이유를 깨달은 건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이후였다.

“야, 우연재.”

분명 식은땀이었다. 벌떡 일어난 문서윤은 우연재의 팔을 건드렸다. 얼마나 꽉 붙잡고 잤는지 들러붙은 손가락이 무의식중에서도 떨어져 나가지 않아 빼내기 위해서 제법 힘을 써야만 했다. 팔을 잡아 몇 번 흔들자 파르르 떨린 속눈썹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반쯤 보이는 눈동자가 열기로 혼탁했다.

“……응.”

한 박자 늦게 흘러나온 대답은 평소보다 한결 낮게 들렸다. 막 자다 일어난 걸 고려해도 지나치게 잠긴 목소리였다. 자지 말고 지켜볼 걸 그랬나. 문서윤은 자꾸 치대려는 우연재의 이마 위로 손을 올렸다. 확실히 지난밤보다 뜨거웠다.

“나 꿈꿨어…….”

“꿈이 문제가 아니라 너 병원 가야 될 것 같은데. 일어나 봐. 주차장에 다른 차 있지?”

“움직이기 싫은데.”

미미하게 웃음기가 섞인 대답에는 칭얼거림이 섞여 있었다.

“아픈 것보다는 낫잖아.”

차라리 직접 끌어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차는 주차장에 있을 테고, 엘리베이터까지는 금방이었으니 병원에 데리고 가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침대에서 내려가기 위해 방향을 트는데 돌연 허리가 붙잡혔다.

“뭐 해?”

뜬금없는 행동이 의아해 묻자 우연재가 팔에 힘을 실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아픈 주제에 힘은 여전했다.

“나 병원 싫어하는 거 알잖아.”

“애야? 너 열난다니까?”

“약 먹었어……. 그냥 좀 자면 나아. 누워. 올려다보려니까 머리 아파.”

무시하고 일어나려는데 허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더 강했다. 문서윤은 의지와 상관없이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원래부터 힘이 세지 않은 편인 데다, 아침에는 더 매가리가 없어지는 몸뚱어리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우연재의 완력은 이겨 내지 못했을 테지만.

어린아이 같은 고집에 어이가 없어 뺨을 찡그리자 우연재가 샐샐 웃었다.

“아픈데 옆에 있으니까 좋네…….”

“내가 너한테 감기 옮겠다. 병원 가자고 안 할 테니까 좀 놔. 약이라도 먹어야 될 거 아냐.”

“너 끌어안고 자면 나아.”

“뭔 헛소리야.”

다리가 완전히 맞붙을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주 조그마한 틈이 마지막으로 남은 안전선이었다. 문서윤은 티 나지 않게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곰 인형 대용.”

열에 들뜬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단어가 가관이었다.

“곰 인형은 무슨 곰 인형이야. 네 방에서 곰 인형 본 적 한 번도 없는데. 여섯 살 때도 없었잖아.”

“아, 들켰네…….”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니 정신이 없는 게 확실했다.

“나 다시 잘 때까지만 누워 있어, 그럼. 사람 껴안으니까 기분 좋아.”

“알았으니까 놔. 불편해.”

문서윤은 여태 허리에 둘려 있는 팔을 툭 치며 괜스레 성가시다는 듯 대답했다. 티셔츠 위로도 뜨거운 체온과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싫은데.”

한 번만 더 놓으라고 말하면 장난이랍시고 정말 인형처럼 껴안을 게 뻔했다. 결국 문서윤은 우연재를 떼어 놓길 포기하고 감긴 눈꺼풀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속눈썹이 느지막이 올라갔다. 덕분에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침묵은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열 띤 호흡이 조금 낯설었을 뿐이다.

“꿈꿨는데…….”

“응.”

문서윤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려다 순간 멈칫했다. 월권이었다. 아무리 우연재와 10년이 훨씬 넘은 소꿉친구라 해도 과해 보일 것 같았다. 그나마 팔을 뻗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우스워 보일 일은 없을 테다.

그렇게 문서윤은 움찔 떤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제가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은 고작 이 정도였다.

“우리 어릴 때 나왔어.”

“어릴 때? 언제?”

“처음 만났을 때.”

“……너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해?”

문서윤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였다. 그냥, 어느 때를 떠올리든 항상 우연재가 있었을 뿐이다.

우연재와 피아노. 그게 전부였다. 피아노는 열여섯의 여름을 기점으로 자취를 감췄으니 결국 우연재뿐이었다.

“기억 못 하나 보네. 어떻게 기억 못 하지?”

섭섭하다는 듯 말하는 것치고는 키득거리며 웃는 얼굴이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문서윤은 슬쩍 다리를 움직여 우연재의 발목께를 차듯이 건드렸다. 스쳐 지나간 맨살이 열에 취해 뜨거웠다.

“여섯 살인데 기억하는 네가 더 신기한 거지. 처음 만났을 때 뭐 했는데?”

“말 안 해 줄 건데. 기억 잘해 봐.”

“일이 년 전 일도 아니고 여섯 살 때를 어떻게 기억해.”

픽 웃은 우연재가 그런가, 하고 중얼거렸다. 이불이 바스락 소리를 내더니 체온이 엉겨 왔다.

“…….”

문서윤은 황급히 호흡을 멈췄다. 우연재가 어깨 근처로 고개를 묻어 온 탓이었다. 커다란 몸을 구겨 치대는 모양새가 아직 제가 강아지인 줄 아는 대형견 같았다. 그러나 정말 강아지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특유의 체향이 훅 가까워지자 감기라도 옮은 것처럼 뺨으로 열이 올랐다. 우연재를 마주 보는 방향으로 누워 있던 터라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우연재.”

“응…….”

목소리가 잠에 빠질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슬쩍 몸을 뒤로 뺐으나 허리를 감싼 완력은 그대로였다. 조금만 더 뒤로 물러서면 힘을 실어 완전히 품 안으로 끌어안을 기세였다.

결국 문서윤은 서서히 몸에서 힘을 뺐다. 더 가까워지면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들이닥칠 테니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나았다.

“서윤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문서윤은 뭍으로 납치된 물고기처럼 입술만 뻥긋거렸다. 대답하고 싶었으나 긴장으로 입 안 잔뜩 고인 침을 삼키느라 소리를 내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타액이 꼭 감정의 배설물처럼 느껴졌다.

“그때…….”

“언제.”

우연재가 느릿하게 말을 이어 나갈 때가 되어서야 겨우 목소리를 꺼내 놓을 수 있었다. 남에게는 배설물에 불과할 감정을 가까스로 삼켜 낸 뒤였다.

“겨울에…….”

“겨울?”

말에 두서가 없었다. 꼬박꼬박 대꾸해 주고 있긴 해도 아픈 사람에게 제대로 된 문장을 기대한 건 아니라 문서윤은 그저 되묻기만 했다.

“눈 언제 내렸지.”

“눈?”

2년 만에 만난 지난겨울을 말하는 건가 싶었다.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과거였다.

“12월에 왔겠지.”

“응……. 그럼 손톱은?”

“손톱? 무슨 손톱?”

“봉숭아…….”

“봉숭아?”

갑자기 웬 꽃이지. 다른 범주의 단어들을 아무렇게나 속삭이는 걸 보니 잠에 취한 모양이었다.

문서윤은 천천히 긴장을 풀었다. 이렇게 정신이 없을 정도면 혹시나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꽃?”

재차 물었으나 우연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깨 근처에서 느껴지는 고른 숨소리에 문서윤은 조심스레 고개를 내렸다. 그새 완전히 잠들었는지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연재. 자?”

대답은 없었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 몸을 뒤척이며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더욱 옥죌 뿐이었다. 지나친 스킨십에 혹시라도 발기할까 봐 불안했으나, 다행히 아픈 친구를 두고 발정할 정도로 무뢰배는 아니었다.

“하…….”

문서윤은 미약한 한숨과 함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마에 손을 대 체온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제 와 체온을 확인한다 해서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리해 주더라도 뒤척이다 보면 다시 이마에 달라붙을 테다.

“…….”

문서윤은 정말로 곰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우연재를 바라보기만 했다.

사실은 건드린 순간,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낼까 봐 무서웠다.

허리를 감싼 팔에서 힘이 풀리고 나서야 침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문서윤은 이불을 정리한 뒤 조용한 걸음으로 침실을 나섰다.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

잔병치레를 하는 편이 아니라 상비약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약 먹었어.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걸.’

뒤늦게야 약을 먹었다던 말이 떠올랐다. 문서윤은 다른 장소를 뒤지는 대신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침실에 물컵을 두는 걸 싫어하니, 약을 먹었다면 당연히 주방에서였을 것이다.

“안 보이는데…….”

주방 서랍을 열어도 나오는 게 없었다. 약 먹은 거 맞나. 혹시나 싶어 쓰레기통까지 열었으나 깨끗하게 비워진 채였다. 평소 우연재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미 쓰레기를 치웠을지도 모르겠다.

‘깨면 약부터 먹여야 될 것 같은데.’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침실로 향하자 곤히 잠든 얼굴이 보였다. 문서윤은 입술을 깨물다 슬쩍 이마에 손을 댔다. 역시, 어젯밤보다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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