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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41)화 (41/139)

41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연재가 이죽거렸다. 이대로 장소가 학교로 한정되면 필연적으로 누군가가 오해를 살 터였다.

“그게 아니면 왜 자꾸 딴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남태은과 함께 살 붙인 거짓말을 함부로 내놓기가 버거웠다. 눈가가, 입술이, 호흡이 모두 엉망일 것만 같았다. 거짓말이 금세 들통날까 봐 무서웠다.

침묵에서 어떠한 결론을 내렸는지 우연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비껴가며 싸늘한 적막이 공기를 맴돌았다. 무표정한 낯이 아닌, 날카롭게 제련된 옆모습이 시야로 들어온 순간, 문서윤은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우연재가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 그래서 눈이 마주치지 않을 때 내뱉어야 하는 말이었다.

“카페 손님이야.”

짙게 선팅된 창으로 향했던 시선이 한 박자 늦게 굴러왔다. 곧게 뻗은 눈썹 위로 미세한 홈이 파이며 뺨이 꿈틀거렸다.

“카페 손님?”

문서윤은 카페 단골손님을 떠올렸다. 때때로 잡담을 나누던 손님을 짝사랑 상대와 구분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 손님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면 거짓말에도 그럭저럭 그럴싸한 살을 붙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 전역하자마자 알바 시작했잖아. 마감 타임까지 일하는 날도 많았고……. 퇴근 시간 때 들르는 회사원이야.”

“아, 회사원.”

가볍게 튕기는 듯한 말투는 누가 들어도 못 미더운 목소리였다.

“문서윤. 다른 새끼도 아니고 나한테는 거짓말하지 마.”

“……내가 거짓말하는지 아닌지 안다며.”

문서윤은 입술을 깨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튼 말했으니까…… 이 얘기 그만했으면 좋겠다. 아무리 너라도 좀 불편해. 그리고 계속 말했잖아, 너 모르는 사람이라고.”

곧바로 몰아붙이지 않는 걸 보니 그때처럼 지나치게 티가 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꼬신 거 아니야. 그냥 나 혼자 좋아하는 거지.”

문서윤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우연재가 몰아붙이듯 내던진 질문을 한꺼번에 소화해 버릴 작정이었다.

“너 혼자 좋아한다고.”

“응. 짝사랑.”

짝사랑 상대 앞에서 짝사랑을 고백하는 꼴이 우스웠다. 스스로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우연재에게 제 꼴이 불쌍해 보이리라는 사실이었다.

“그분은 내가 자기 좋아하는 것도 몰라. 그냥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그래도 차분하게 내뱉는 말투는 정말 짝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간절하게 들릴 듯했다.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고스란히 쏟아 내고 있으니 거짓말처럼 들리지는 않을 테다.

조금이라도 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렇게 음습한 방식으로밖에 고백하지 못하는 상황에 비참해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니까 죄 없는 사람 욕하지 마.”

죄 없는, 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는 저도 모르게 손끝에 힘을 싣게 됐다. 우연재에게 죄를 물을 수가 있을까.

“문서윤이 내 앞에서 다른 새끼 편을 다 드네…….”

“그게 무슨 편든 거야. 네가 괜히 다른 사람 욕하니까 그러는 거지.”

“질투 많다고 한 건 흘려들은 것 같고.”

아무렇잖게 질투 운운하는 목소리가 느슨했다. 문서윤 저는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단어였다. 혹시라도 진심이 묻어 나올까 봐. 그 진득한 감정의 악취를 짝사랑 상대가 맡을까 봐.

우연재에게는 죄가 없지만, 이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속이 상했다. 저도 모르게 울컥한 마음이 들어 문서윤은 언성을 높였다.

“그럼 도대체…… 남자 좋아하냐고 왜 물어본 건데. 내가 아니라고 했을 때 그냥 넘어갔으면 됐잖아.”

“아, 이제는 그냥 넘어가? 왜? 난 너한테 좆도 아니라서?”

느슨함을 가장한 목소리 위로 미미한 짜증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눈치가 없었지.”

여태껏 견고한 벽에 가둬 뒀을 뿐이라는 듯 빈정거리는 말투에 날것의 감정이 섞여 들었다. 불시에 그리고 갑작스레.

“서윤아. 내가 너한테 고해성사라도 바란 줄 알았어?”

금이 가는 표정에 문서윤은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어떤 새끼든 간에 남자면 감정 묻으라고 시간 줬더니…….”

스러지는 말꼬리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덜컥. 안전벨트를 해제하는 소리가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내 차 타고 가.”

“……뭐?”

“나 지금 운전하면 사고 낼 것 같으니까 내 차 타고 가라고. 학교 멀잖아.”

이어 문이 열렸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왔으나 차 안의 기류는 싸늘하기만 했다. 체온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피가 몽땅 빠져나가 손끝이 차게 식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짝사랑이라 다행이네, 그치.”

우연재가 툭, 바지를 털어 내며 물었다. 대답을 요한 질문인지 알 수 없어 문서윤은 입술조차 벙긋거리지 못했다.

“감정 정리하기 쉽잖아.”

뒤이어진 말에서는 시선이 부딪쳤다.

“그러니까 묻어. 그 새끼 찾아내서 지랄 떨기 전에.”

7년간 버둥거려도 해내지 못한 일을 우연재가 별것 아닌 일이라는 양 요구했다.

“나 또 사고 치면 쉽게 안 끝날 것 같은데……. 문서윤 아니면 누가 도와주지.”

늘어지는 말꼬리를 따라 눈꼬리가 길게 접혔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사나운 기색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네 짝사랑, 아, 씨발. 씹어 대서 지금 나 꼴도 보기 싫을 테니까…….”

“우연재.”

“마음 정리해서 연락해.”

커다란 몸이 미련 없이 차에서 내려섰다. 우연재는 곧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등을 보인 채 서 있던 몸이 천천히 뒤를 돌아 허리를 굽혔다.

“서윤아.”

“…….”

“세 번째는 그냥 안 넘어가.”

세 번째? 그게 무슨 의미인데. 되묻고 싶었으나 거짓말에 들러붙은 입술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연재가 얼핏 버림받은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런 말 했다고 나 미워하지 마.”

망설임 없이 돌아서는 움직임 뒤로 문이 닫혔다. 문서윤은 창밖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대화가 단란하게 끝나리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이런 식의 끝맺음을 상상한 건 아니었다.

‘서윤아. 내가 너한테 고해성사라도 바란 줄 알았어?’

이실직고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제 착각이었다.

‘어떤 새끼든 간에 남자면 감정 묻으라고 시간 줬더니…….’

우연재가 원하는 건 부정이었던 모양이다.

“하…….”

문서윤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감정 정리하기 쉽잖아. 그러니까 묻어.’

다른 사람도 아닌 짝사랑 상대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게 안 되는데 어떡하라고.”

손바닥에 고인 물기가 결국 범람하고 말았다. 바지 위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봄바람처럼 미지근했다.

‘나 미워하지 마.’

그래도 미워하지 못할 테다.

* * *

우연재는 욕설을 짓씹으며 바람에 헝클어지는 머리칼을 대충 흐트러뜨렸다. 차라리 겨울바람이었다면 머리라도 식힐 수 있었을 텐데, 불어오는 공기는 봄기운처럼 따스하기만 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잠재우기에는 감정의 밀도가 지독히도 높았다.

문서윤을 몰아세운 날부터 촘촘하게 쌓여 가던 감정이었다. 고작 단어 하나로 명명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들끓음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우연재는 감히 알지 못했다.

분명한 건 그 감정의 정체성이 음습하고 질척거린다는 사실이었다. 분노, 혐오감, 적개심 뭐 그런 것들.

차를 탁 트인 곳까지 몰고 온 것도, 문서윤을 앉혀 둔 채 내려선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좁은 장소에서, 그것도 폐쇄된 차 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면 끝 갈 데를 모르고 몰아붙였을 것이다. 최악은 몰아붙이는 데서 끝나지 않았을 테고.

우연재는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며 길게 이어진 길을 걸었다. 악력을 따라 솟아오르는 핏줄이 아니어도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장 문서윤에게로 돌아가 집요하게 굴고 싶은 욕구를 참기 위한, 그리고 간신히 이어붙인 인내심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이었다.

담뱃재에 벌겋게 달아오른 하얀 손가락이 떠올랐다.

“하…….”

피아노를 치던 손가락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붉은 생채기가 아니었다면 기어코 문서윤을 울렸을지도 몰랐다. 남자를 좋아하냐는 물음 뒤로 이어질 추궁이 수십 가지는 떠올랐으니까. 그나마 눈에 보이는 상처가 있어 다행이었다.

우연재에게는 당장의 제 감정보다 문서윤의 안위가 중요했다. 하얀 손을 헤집은 상처에만 신경을 기울이면 입술 사이로 튀어나오려는 날 선 언어를 그럭저럭 억누를 수 있었다.

‘나…….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야.’

거짓말을 모르는 척하기에는 문서윤을 너무나도 잘 안다는 게 문제였다. 운전대를 잡고 있어 표정까지 살피지는 못했으나 꼬리가 달달 떨리는 목소리에서부터 빤히 티가 났다.

차를 세운 우연재는 느릿하게 핸들을 두드리다 잠금장치부터 풀었다. 저도 모르게 화를 내면 문서윤이 언제든 도망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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