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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37)화 (37/139)

37화

살랑이는 바람이 가볍게 코끝을 스쳤다. 차가운 온도는 아니었으나 열 오른 눈가를 식히기에는 충분했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눈 안쪽으로 끈덕하게 고여 든 수분을 앗아 가 줄 정도는 될 듯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운 것도 아닌데 눈두덩이로 열이 올랐다. 문서윤은 괜스레 눈꺼풀을 꾹 누르며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중간고사가 끝난 주말이라 그런지 학교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아니면 주말 아침치고는 이른 시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몸은 물론이고 머리까지 축축 가라앉았다.

‘잠 못 잘 건 예상했는데…….’

평소였다면 소화가 안 돼 밤새 끙끙 앓았을 터였다. 식사 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꼬박꼬박 소화제를 챙겨 먹곤 했지만, 아버지와의 식사 자리는 늘 갑갑한 속으로 끝났다.

침대에 누울 때면 금방이라도 속을 게워 낼 듯한 답답함과 그 기분을 강제로 억눌러야 하는 거북함이 가슴에 차곡차곡 쌓인 상태였다. 새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어젯밤 내내 뒤척인 건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다. 우연재 때문이었다.

소화되지 못한 건 꾸역꾸역 먹은 음식이 아닌 이리저리 뒤섞인 감정일 테다.

“하…….”

문서윤은 한숨을 내쉬며 모자를 푹 눌러썼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 싫어 밖으로 나왔는데도 우연재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구겨지던 젤리와 다정한 경고가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나 질투 많은 거 알잖아.’

고작 젤리 하나였다. 별 의미 없이 내민, 조그마한 성의 표시.

“내가 잘못한 거니까.”

무섭도록 휘몰아치는 자괴감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잘잘못을 따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친구의 여자 친구에게 무언가를 받은 건 명백한 제 잘못이었다. 사적으로 친한 사이라면 또 모를까, 엄연히 선이 존재하는 관계에서 그 선을 흐트러뜨린 사람은 문서윤 자신이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다. ……다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연재의 친구인 제가 조심하는 게 맞았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게 마음 편했다. 젤리 하나에 질투하는 우연재를 보며 그의 여자 친구를 부러워하는 것보다 잘못을 인정하는 게 덜 추했으니까.

잘못에 대한 죄책감을 앞세워서라도 그 부러움을 감추고 싶었다. 짝사랑을 나쁜 색채를 띤 감정이라 생각한 적은 없어도 제 마음은 질 나쁜 색채를 띠고 있을 것 같아 무서웠다.

그만 생각하자. 문서윤은 모자 그늘 안에 감춰진 창백한 뺨을 누르며 문을 열었다. 딸랑, 맑은 소리와 함께 익숙한 전경이 나타났다.

“어? 오빠!”

“안녕.”

문서윤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반가운 기색의 송주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기숙사 안에만 있었더니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 머리를 비울 겸 잠깐 몸을 움직일 겸 일하는 카페에 온 참이었다. 시험이 끝나 공부에 집중할 수도 없으니 걷기라도 해야 했다.

“모자 썼는데 용케 알아보네.”

“장난해요? 멀리서 봐도 알죠. 오빠 같은 피지컬이 흔한 줄 알아요?”

“나 같은 피지컬은 또 뭐야.”

문서윤은 픽 웃으며 송주아의 농담을 받았다.

“음……. 실루엣 예쁜 사람?”

곰곰이 고민하던 송주아가 황급히 말을 더했다.

“아니, 말이 좀 이상한데 오해하지 마요. 오빠 비율 좋아서 한 말이에요. 저 덕질하는 배우 아시죠? 딱 그런 스타일. 그리고 오빠 키도 큰 편이잖아요.”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뻔해 문서윤은 또다시 피식 웃고 말았다.

“오해 안 했어. 그나저나 주말인데 너무 일찍 왔나 보다. 미안.”

“괜찮아요. 대타 뛴 만큼 알바비 받는데요, 뭐. 그리고 손님이랑 오빠는 다르죠. 진상 부릴 것도 아닌데.”

그제 마감 시간에 쳐들어와 진상을 피우던 손님을 말하는 듯했다.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대화할 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뭐 드실래요? 아!”

앞치마에 손을 닦던 송주아는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카운터에 몸을 기댔다.

“저희 신메뉴 만들기로 한 거 있잖아요. 정확히 말하면 사장님이 만드시는 거지만.”

“밀크티?”

“네. 아까 주고 가셨는데 드셔 보실래요? 저희 입맛에 맞으면 그때부터 메뉴로 내놓을 건가 봐요.”

“너는 마셔 봤어?”

“사실 아직 안 마셔 봤어요. 티 걸러야 해서 귀찮더라고요. 그런데 오빠 마신다고 하면 겸사겸사 마셔 보려고요. 찻잎 걸러야 해서 시간 조금 걸리는데 바빠요?”

문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카운터 안쪽으로 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간단한 일이니 도와줄 생각이었다.

“안 바빠. 내가 찻잎 거를게.”

“됐어요. 돈 받고 일하는 건데 지금 알바하는 제가 해야죠. 마신다는 거죠?”

“응, 상관없어.”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소매를 걷어붙인 송주아가 냉장고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텅 빈 카페를 둘러보며 멀거니 서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문서윤은 곧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똥강아지, 어디야.

장난기 묻은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어제 자정 가까워서 들어온 것 같던데 술 많이 마셨나. 이불 안에 몸을 구긴 채 머리를 벅벅 긁으며 눈을 감고 있을 모습이 눈에 훤했다. 생활관에서 오랜 시간 함께 지내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된 버릇이었다.

“잠깐 카페 왔어요. 뭐 드실래요?”

- 달고 차갑고 시원한 음료를 대령하도록.

거절하기는커녕 뻔뻔한 목소리로 읊는 주문이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문서윤은 카운터 앞에 놓인 메뉴를 훑어 내리며 물었다.

“에이드 드실래요? 아니면 스무디?”

- 어디 카페 갔는데?

“저 알바하는 데요.”

- 아, 거기. 거기는 또 수제 청으로 만든 에이드가 맛집이지. 레모네이드를 대령하도록.

“더 필요한 거 없죠?”

- 필요한 거 많지. 한강 뷰 아파트 한 채랑…….

문서윤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송주아가 밀크티를 들고나온 것과 동시였다.

“주아야. 미안한데 레모네이드 하나만.”

“한 잔? 다른 사람 거예요?”

“응.”

“알았어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송주아가 테이크아웃 잔에 레몬청을 넣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누구예요?”

“뭐가?”

“아까 전화한 사람이요. 오빠 전화 끊을 때까지 웃고 있던데? 여자 친구 생겼어요?”

이제야 의미심장한 표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문서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부정했다.

“갑자기 무슨 여자 친구야. 기숙사 룸메 형. 농담 던져서 웃은 거야.”

“뭐야. 드디어 여자 친구 생겼나 했더니.”

송주아가 김빠진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미성년자들의 연애를 지켜보는 중년 어르신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 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맞다. 어제 오빠 친구 왔었는데.”

“……우연재?”

“네. 누구 기다리는 것 같길래 처음에는 오빠 만나러 왔나 했더니 여자 친구 만나시더라고요.”

문서윤은 밀크티가 든 병을 만지작거렸다. 찬 기운이 스민 물방울이 지문 모양을 따라 날카롭게 스며들었다.

“둘이 옆에 앉아서 대화하는데 엄청 사이좋아 보여서 괜히 그쪽 보게 되는 거 있죠.”

허리를 굽힌 송주아가 얼음을 퍼 레몬청 위로 쏟아부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자못 경쾌하게 들렸다.

“잘 사귀는 것 같아. 둘 다 성격 좋으니까.”

문서윤은 간신히 대꾸했다. 어제 하루 아르바이트를 쉰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버지와의 식사 약속이 잡히자마자 스케줄을 비워 둔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우연재의 질투를 언뜻 엿본 뒤 두 사람을 마주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오빠 친구라서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확실히 눈에 띄긴 하나 봐요. 어제 사장님이 오빠 대신 일했잖아요? 저번 학기에 카페 온 걸 아직도 기억하시더라고요. 역시 잘생긴 사람은 달라. 손님 워낙 많아서 단골도 겨우 기억하시는데. 신기하죠?”

2년 넘게 사귀었으니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이야기도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하지만 김현승을 통해 사귄다는 이야기를 듣던 때보다 기분이 훨씬 이상했다.

‘2년이면…….’

곯아 터진 마음도 익숙해질 때가 되지 않았나.

사이다를 따르는 소리와 함께 얼기설기 이루어진 얼음벽이 무너져 내렸다. 가득 쌓인 얼음 산이 밑으로 꺼지는 건 이토록 쉬운 일이었다.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문서윤은 그제야 기분이 이상한 이유를 깨달았다. 과거와 지금은 많은 게 달랐다.

특히 지금은 2년 전과 달리 여자 친구와 함께 있는 우연재를 선명하게 그려 낼 수 있었다. 함께 있는 두 사람을 직접 봤으니, 기억에 남아 그런지도 모르겠다.

무의식적으로 병을 쥔 손에 힘을 싣자 그 안에 담긴 밀크티가 출렁거렸다.

“오빠. 듣고 있어요?”

“어? ……아, 응. 그러게.”

사이다에서 솟아 나온 기포를 멍하니 쳐다보던 문서윤은 송주아가 손에 들린 음료를 가져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으나 다시 묻는 것도 뭣해 그럴싸한 대답을 꾸며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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