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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32)화 (32/139)

32화

우연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남자를 좋아하냐며 추궁할 때는 언제고, 애초에 그런 대화 따위는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굴었다. 평소처럼 말하고, 웃고, 행동하니 문서윤 역시 엉겁결에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하아…….”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진 건 아니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 말할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문서윤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우연재는 단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인내심이 제법 긴 편이니, 생각보다 오래 기다려 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고해실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까지 바뀌는 건 아니었다. 마음을 고백할 생각은 없는데 정작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털어놓아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위가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나도 답이 없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는 그대로 몸을 기울였다. 곧 풀썩, 매트리스가 꺼지는 느낌과 함께 등 아래로 푹신한 이불이 닿았다. 홀로 남은 기숙사에서 청각을 자극하는 소음이라고는 자그마한 숨소리가 전부였다.

문서윤은 아무 무늬 없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저 자신을 자책했다.

우연재에게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킨 상황에서도 귀걸이가 왜 오피스텔에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하등 중요할 것 없는 문제라 더 그랬다.

언젠가 닥쳐올 고해성사를 피하고 싶어 의식적으로 다른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되는 건지, 아니면 그 사소한 문제조차도 우연재가 관련되어 있어 궁금증이 치미는 건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와 함께 별것 아닌 문제로 고민하는 꼴이 바보 같았다.

“어떡하지.”

우연재에게 어떤 식으로 운을 떼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켰으니, 최소한 상대가 그라는 것만큼은 들키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도 온 신경이 너덜거리는 중인데 남자를 좋아한다고 밝힌 뒤에도 표정을 관리할 만한 여력이 남아 있을지 의문이었다.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답이 나왔다.

“없겠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난제를 가지고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자 불현듯 키패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서윤은 입구를 향해 눈동자만 움직였다. 곧 문이 닫히는 소리에 이어 현관 등이 켜지더니 남태은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피곤함에 잔뜩 찌든 채였다.

“어어, 알바 끝났어?”

“시간이 몇 신데……. 설마 아직도 과제 못 끝냈어요?”

“방금 교수님한테 메일 보내고 오는 길. 그 씨발 새끼들을 이끌고 과제를 끝낸 내가 자랑스럽다, 서윤아.”

크으, 남태은이 자아도취 하듯 과장되게 목을 울리며 콧대를 높였다. 학기 초부터 거지발싸개 같은 조원들이 걸렸다고 한탄을 하더니 어찌어찌 끝낸 모양이었다.

“드디어? 고생했네요.”

“엉. 개고생했지. 너는 조원 괜찮냐? 경영 조별 과제 많지 않나.”

“저희 조원들은 1인분씩 해요.”

“조원 잘 만나는 것도 천운이다. 나 봐, 그 새끼들 때문에 중간고사 일주일 전에야 과제 끝나는 거. 아오, 시간은 또 왜 이렇게 빠르냐.”

“그러게요.”

벌써 다음 주면 중간고사였다. 언제 화사하게 피었냐는 듯 벚꽃이 몽땅 떨어지자마자 시험 일정이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차라리 시험 기간이라 다행이었다.

우연재와 전처럼 지낸다는 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였다. 두 사람 사이에 걸리적거리는 문제가 대두된 이상, 문서윤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연재를 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함께 듣는 수업이 끝날 때마다 시험공부를 핑계로 도서관으로 도망쳤다. 우연재는 대놓고 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는 했지만, 굳이 붙잡지는 않았다. 저 나름대로 시간을 주려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도서관에 가면 카페에 가기 전까지 열람실에 처박혀 시험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부에 집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회피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오히려 다른 일에 집중하는 편이라, 당장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시험 안 끝났으면 좋겠는데.”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남태은이 침대 밖으로 튀어나온 종아리를 툭, 건드리며 지나갔다.

“얼씨구. 난 빨리 종강이나 했으면 좋겠다.”

“형. 개강한 지 두 달도 안 지났어요.”

“양심적으로 1학기는 두 달이면 충분하지 않냐? 취직하는 순간 방학도 없는데.”

낄낄거리며 농담을 내뱉은 남태은은 씻고 정신 좀 차려야겠다며 수건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문서윤은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 또다시 천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중간고사가 끝나지 않길 바라는 사람은 저뿐일 테다. 시험이 끝나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도리어 괴로워질 게 눈에 선했다.

“하…….”

문서윤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덮는다고 사라질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 * *

“기다렸어?”

저절로 걸음이 멎었다. 시험지를 제출하고 강의실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우연재가 고요한 복도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여자 친구와 연락 중이었는지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오늘 점심 교수님이랑 먹기로 했잖아.”

“아, 오늘이었지.”

마지막 시험이 끝나자마자 아버지와의 점심 약속이 잡혀 있었다. 우연재를 피해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숨 막히는 식사 자리라니, 벌써 체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가면 시간 딱 맞을 것 같은데.”

“……시험은. 잘 봤어? 너도 이게 마지막이지?”

대화 없이 걷는 게 오히려 어색할 것 같아 문서윤은 가장 무난한 주제를 꺼내 들었다.

“누가 같이 공부 안 해 줘서 잘 모르겠는데.”

“……뭐가.”

피아노를 그만둔 후에는 줄곧 우연재와 공부를 하곤 했다. 고등학교 때는 주말마다 그의 집에서 공부했고, 가끔은 손님방에서 자며 주말을 통째로 함께 보낼 때도 있었다. 대학까지 내리 이어진 습관은 일상처럼 너무나도 익숙해져 미처 의식할 틈도 없었다.

문서윤은 이번 시험 기간을 처음으로 우연재 없이 보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같이 공부했잖아. 혼자 하려니까 심심해서 보고 싶던데.”

“너랑 나랑 전공 완전히 겹치는 것도 아니고…….”

어물쩍거리며 말을 흐릴 즈음, 타이밍 좋게 발걸음이 차 앞에서 멎었다. 문서윤은 조수석에 앉으며 힐긋 그 안쪽을 살폈다. 하얀색 귀걸이가 떨어져 있으면 쉽게 눈에 띌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잘 보이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식당 어딘지 알아?”

또 공부 이야기가 나오면 곤란해질 것 같아 문서윤은 금세 대화 주제를 바꿨다.

“우리 몇 번 같이 가 봤는데.”

“그래? 이름만 들었을 때는 잘 모르겠던데.”

“한식당.”

오래 붙어 다닌 만큼 하도 여러 장소를 갔더니 곧바로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음식에 크게 관심을 두는 편이 아니라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교수님 오랜만에 뵙네.”

덜컥 본가에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한 게 떠올라 문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끌어안은 가방만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교수님 만나면 문서윤 나 주라고 해야지.”

정처 없이 움직이던 손가락이 움츠러들듯 멎었다. 문서윤은 티 나지 않게 우연재를 살폈다. 운전 중이라 옆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눈꼬리만 접어 웃는 얼굴이었다.

남자 좋아한다는 사실 눈치챘으면서 왜 저런 말을 하지. 말버릇이라는 걸 알지만, 제 성적 취향을 눈치챈 상황에서 오해를 살 법한 발언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다.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 주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제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 일부러 저러는 건지 도통 저 머릿속을 읽어 내기가 벅찼다. 아니라고 부정했을 때는 네 거짓말 버릇을 내가 모르냐며 할 말이 없게 만들더니, 지금은 저렇게 굴고 있으니 우연재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진짜 말버릇이라 그런가. 제가 아는 우연재는 결코 단순하게 행동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버릇이란 결국 입에 붙은 습관이니 저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머리와 달리 마음은 쉽게 안도를 누리지 못했다. 우연재가 하는 말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스스로를 검열하게 됐다.

“잠깐 기다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는데 돌연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우연재는 기다리라는 말만 남긴 채 운전석에서 사라졌다.

“하…….”

혼자 남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몰려와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은 습관처럼 우연재의 뒷모습을 좇았다.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남자가 약국으로 자취를 감췄다.

어디 아팠나? 문서윤은 뒤늦게야 우연재의 얼굴을 상기했다. 평소처럼 마주 볼 자신은 없어 힐금거린 게 전부지만 인상이 날카롭기는 했다. 최근 저기압이라는 김선주의 말도 그렇고 확실히 컨디션 안 좋은 모양이었다.

약국 문이 재차 열리자 문서윤은 보지 않은 척하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머지않아 운전석이 열리더니 가방 위로 하얀 봉지 하나가 툭 올라왔다. 파란색 잉크로 약국 이름이 쓰여 있었다.

“뭐야?”

“마셔.”

우연재는 간단한 답과 함께 차를 출발시켰다. 영문 모를 소리에 문서윤은 제법 무게감이 느껴지는 봉지를 만지작거리다 내용물을 확인했다.

소화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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