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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31)화 (31/139)

31화

“오빠! 괜찮아요?”

문서윤은 송주아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에이드에 들어가는 사이다를 넘치게 따를 뻔했다.

“미안해.”

“저한테 미안할 건 없죠.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피곤해서 그런가? 중간고사 기간이라고 너무 밤새우는 거 아니에요?”

사이다를 뺏어 든 송주아가 뚜껑을 덮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피곤함이 얼굴에서 티가 났나 싶어 문서윤은 괜스레 뺨을 문질렀다.

“요즘 잠 잘 못 자서 그런가.”

“왜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별일 아니야.”

“그럼 다행인데 안색 너무 안 좋아서 걱정돼요. 아, 캐모마일이 숙면에 좋다고 했던 것 같은데. 티는 금방 만드니까 제가 해 드릴게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근데 나 진짜 괜찮아. 그 에이드 마지막 주문이었지? 마감하고 가자.”

문서윤은 애써 괜찮은 척하며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상태가 좋지 못한 건 인지하고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컨디션이 좋은 게 오히려 이상했다. 우연재에게 담배를 들킨 이후로는 계속해서 이런 상태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에게 남자를 좋아하냐는 물음을 들은 이후부터였다.

‘모르겠다.’

며칠간 내리 이어진 생각은 녹아내린 실타래처럼 잔뜩 엉켜 있어 도무지 풀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서윤은 작게 고개를 털어 내며 기계를 세척했다. 손에 닿은 커피 머신들처럼 전원 버튼을 누르면 작동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에 봐요.”

“잘 가.”

괜찮다는 대답에도 송주아는 캐모마일 티를 만들어 손에 쥐여 주었다. 문서윤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남은 손을 카디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문득 손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부스럭거리는 감각이 느껴져 손끝에 걸린 물건을 꺼내자 조그마한 박스 하나가 나타났다. 응급실을 찾은 날 받아 온 밴드 상자였다. 그 물건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우연재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 말할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또다시 묻기 전에 솔직하게 말하라는 의미가 분명했다. 우연재가 준 기회라는 걸 알았으나, 그 기회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남자를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어떤 물음이 따라올지 몰라 더 무서운 것 같기도 했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였으나 문서윤은 그 순간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인정 후에는 좋아하는 상대가 우연재라는 걸 들키게 될 것만 같았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학교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어? 서윤아!”

맑은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후배면 또 모를까, 친근하게 이름을 부를 만큼 친한 사람 중에 여자는 없던 터라 문서윤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김선주가 크게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어떻게 여기서 마주치지?”

“아……. 안녕.”

문서윤은 어설프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기숙사 들어가는 길이야?”

“응. 알바 끝나서. 너는? 야작 중이야?”

김선주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버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며칠 전 사건으로 신경이 너덜거리는 중이라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응. 작업하다가 배고파서 잠깐 나왔어. 기숙사 가는 길이면 나랑 같이 편의점 들렀다 가면 안 돼? 가는 길에 미대 지나가잖아.”

“편의점?”

“라면 먹고 싶은데 친구들은 다 싫대서. 혼자 먹는 건 또 싫은데 마침 너 보이길래. 아, 친구 여자 친구라 너무 부담스러운가?”

문서윤은 희미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아니야. 가자. 나도 배고파.”

아무리 그래도 우연재의 여자 친구인데 거절하기도 뭣했다.

대학생이라면 다들 공감할 만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걷자 금세 편의점 앞에 도착했다. 김선주가 근처의 야외 테이블에 라면을 내려놓았다.

“아, 내가 할 걸 그랬다.”

“응? 아니야. 내가 오자고 했으니까 당연히 내가 해야지. 물 받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나도 그 정도 양심은 있다?”

그녀는 젓가락을 내밀며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나 만난 김에 물어보고 싶은 거 있는데.”

“뭐?”

“연재랑 싸웠어?”

필연적으로 우연재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김선주가 라면을 휘저으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다른 게 아니라 요즘 저기압 같길래. 너도 알잖아. 연재 감정 변화 별로 없는 거. 근데 저기압 티 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그래서. 나랑은 별일 없는데 친구들이랑 싸웠나 싶더라고.”

“아마 시험 기간이라 그럴 거야. 걔도 공부 욕심 있어서.”

우연재와 있었던 일을 싸움이라 말할 수 있을까. 말다툼이라고 하기엔 지극히 일방적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을 뭐라고 명명하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이야기라 문서윤은 적당한 핑계를 둘러댔다.

“그래? 흠, 그럴 수도 있겠다.”

김선주는 수긍한 듯 가볍게 답한 뒤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걸리적거리는지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자 하얀 진주 귀걸이가 눈에 띄었다.

“아, 그 귀걸이.”

“응?”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김선주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재가 줬구나 싶어서.”

“이거?”

“응. ……아니야?”

진주 귀걸이는 다 비슷한 디자인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괜히 말했다. 알은척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뒤늦게야 친구의 여자 친구와 나누기에는 부적절한 대화 주제라는 자각이 들었다.

“어디서 봤어?”

김선주가 호기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대답해도 되나.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어 문서윤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입조심을 했어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주제였다.

“우연재 오피스텔에서.”

“연재 오피스텔?”

“응.”

“거기 가 봤어?”

문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괜히 라면을 휘저었다. 김선주를 향해 시선을 끌어 올린 건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였다. 김선주는 콧잔등을 찌푸린 채였다. 어딘가 서운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뭐야, 우연재. 부모님도 출입 못 하게 한다면서 나도 안 된다고 하더니.”

예상치 못한 말에 문서윤은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꼭 우연재의 오피스텔에 가 본 적이 없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친구들은 부르는 거 처음 알았네.”

그 순간 어떠한 직감이 찾아왔다. 우연재의 오피스텔에 드나든 사람은 문서윤 저 자신뿐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 * *

귀걸이가 도대체 왜 오피스텔에 있었을까. 문서윤은 치사하다느니, 이걸로 약점 잡았으니 졸라 봐야겠다느니 종알거리던 김선주를 떠올렸다. 미대 건물 앞에 이를 때까지 이어진 대화였다. 진심으로 화가 났다기보다는 애인에게 섭섭해 투정을 부리는 말투에 가까웠다. 혹은 말실수를 했나 싶어 당황해하는 저를 위해 일부러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맙다며 편의점에서 산 젤리를 손에 쥐여 주던 모습이 선연했다. 라면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더니 내키지 않는 자리에 마지못해 따라왔다고 생각했는지 미안해하는 기색이었다.

그에 문서윤은 오히려 미안해졌다. 그녀와의 자리가 편했던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무언가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 뿐이다.

“그냥 귀걸이 예쁘다고 할걸.”

문서윤은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침실에서 본 귀걸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면 갑작스레 혼잣말이 튀어나올 일도, 오피스텔 출입 사실을 김선주에게 고할 일도 없었다.

당연히 그녀 역시 오피스텔에 갔으리라 생각했다. 침실에 귀걸이가 있다면 누구나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귀걸이에 찔린 순간 마음이 진창에 처박힌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손가락을 찌르는 통증 따위에는 신경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절망과 비슷한 감정이 몰아닥쳤다.

그런데 정작 귀걸이의 주인은 오피스텔에 간 적이 없다고 했다.

우연재가 찾아서 가져다 뒀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가정이었다. 차에서 바꿔 끼우려다 잃어버렸다고 했으니, 조수석 어딘가에 떨어졌을 테고 우연재가 발견해 일단 집에 가져다 둔 게 아닐까 싶었다. 우연재 성격에 주인 있는 물건을 글로브 박스도 아닌 굳이 집으로 다시 가져간 게 의아했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당사자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 물어볼 수도 없어 마음이 답답했다.

그 사건 이후 우연재와 못 본 척 지내는 건 아니었다. 같은 수업을 세 과목이나 듣는 데다 알음알음 친한 사이라는 소문이 퍼져 갑자기 절교한 사이처럼 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모르는 척 지내면 한바탕 이상한 소문에 휩쓸릴 게 뻔했다. 높은 확률로 있지도 않은 여자 때문이라는 낭설이 퍼질 터였다.

물론 문서윤이 우연재와 표면적으로나마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건 그러한 외부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순전히 우연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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