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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27)화 (27/139)

27화

과자 더럽게 먹어서 짜증 났나?

닫혀 있던 입술이 느슨하게 벌어지며 제가 아는 우연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그렇게 치면 가족들도 오래 보면 다 질리겠네? 열일곱 정도 되면 집을 나가야 하나 봐. 우리 현승이는 왜 이제야 독립했지?”

“야, 그렇게 받아칠 줄은 몰랐다…….”

다소 멍청해진 김현승의 표정에도 우연재는 이겼다는 듯 거들먹거리는 대신 짜증스레 눈썹을 찌푸렸다. 질렸다는 말이 신경을 갉작거렸다. 가족을 들먹이긴 했으나, 저라고 가족과 친구가 다르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아니면 설마 삐졌나? 씁, 아닌데. 문서윤 성격 좋아서 삐질 리가 없는데.”

“걔가 나한테 왜 삐져.”

“그건 그렇지. 화났…… 을 리도 없고. 하긴, 화났으면 그때 너랑 같이 밥 먹었겠냐.”

“애초에 문서윤이 나한테 화났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어디서 나왔지?”

우연재는 소파 위로 팔꿈치를 세웠다. 손가락에 관자놀이가 닿을 정도로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찌푸려진 인상이 한층 더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너 걔 군대 있는 동안 연락 안 했잖아.”

도리어 어이가 없어진 김현승은 과자 봉지를 내려 두며 황당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왜.”

“아오, 우연재 이 새끼 진짜. 너는 군대 안 가서 모르겠지만, 면회 안 오면 존나 섭섭하다니까? 씨발, 이 새끼들은 내 친구가 아니었구나…… 생각하게 된다고. 뭐, 면회는 그렇다 쳐. 존나게 바쁘면 못 올 수도 있지. 그런데 편지 한 장 안 쓰는 건 너무하지 않냐? 난 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한테 절교당한 줄.”

갑자기 군 생활이 떠올랐는지 김현승이 주먹을 꽉 쥐며 열변을 토해 냈다. 우다다다 내뱉는 친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우연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일부러 연락 안 한 거야.”

“그러니까 왜 안 했냐고. 문이 착해서 받아 준 거지 존나 섭섭했을걸? 하물며 넌 소꿉친구잖아, 이 새끼야.”

“숨통 좀 트이라고.”

영문 모를 소리에 김현승이 무슨 개소리냐는 듯 인상을 구겼다. 우연재는 가늘게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나 지겨울까 봐.”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미소였다.

우연재는 망설임 없이 핸들을 돌렸다. 차는 오피스텔이 아닌 기숙사를 향해 방향을 바꿨다. 반쯤은 충동적이고 또 반쯤은 계획적인 행동이었다. 김현승의 자취방에 들른 게 전자라면, 기숙사로 향하는 건 후자에 가까웠다.

규칙적으로 핸들을 두드리는 손가락 위로 나지막한 한숨이 쏟아졌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내리 인내하는 것치고는 나름대로 여유롭게 들리는 숨소리였다.

졸업 전까지 올 일이 없던 신축 건물 앞에 또다시 차를 세운 그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역시나,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어쩔까.”

우연재는 계획에서 벗어나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다. 통제적인 성향 때문인지 병적인 강박증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상황이 제가 설계한 그림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금세 기분이 나락으로 처박혔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그의 제반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는 곧 어떤 일이든 쉽게 풀린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회에 나간 것도 아니고, 고작 대학 생활 중이라면 더더욱 쉬웠다.

문제가 있다면 문서윤이었다.

우연재는 제가 하나뿐인 소꿉친구에게 집착하고 있음을 잘 알았다. 사람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으나, 문서윤만큼은 예외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어릴 때 만나서 그런가.”

우연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군데군데 불이 꺼진 환한 기숙사를 응시했다. 멋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악의 없이 순수한 소유욕을 지닌 시기도 없을 것이다. 제가 이 모양인 건 그래서 그럴 테고.

한참 동안 불 켜진 기숙사를 올려다보던 그는 마침내 시동을 걸었다. 곧 차가 출발했다.

“질 나쁜 새끼들만 안 만나면 상관없긴 한데…….”

그저 문서윤이 상처받는 일 없이 좋은 사람들만 만나며 제 울타리 안에서 안온하기를 바랐다. 문서윤을 둘러싼 주변 인맥을 적당히 쳐 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웬 쓰레기 같은 것들을 만나서 쓸데없는 일로 감정을 소모하며 상처받으면 안 되니까.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났고.’

2년 만에 마주한 친구가 좋은 사람 운운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뺨에 기분 좋은 기억이 매달렸다. 우연재로서는 알 수 없는 기억이었다.

‘누군데.’

뭐라고 대답했더라.

‘말해도 모르지, 너는.’

근래에 기분이 바닥을 치는 이유는 명료했다. 문서윤이 묘하게 연락을 피하는 건 둘째 치고, 그 주변에 제가 모르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이 순식간에 차올라 손끝을 적셨다. 자연스레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대로 학교 밖으로 빠져나가려는데 차는 계속해서 나아가는 대신 어느 순간 부드럽게 멈춰 섰다. 언뜻 익숙한 인영이 시야를 스친 탓이었다.

시선이 한 곳에서 멎었다. 흡연 구역이었다.

“하.”

우연재는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마터면 잘못 본 줄 알고 지나칠 뻔했다. 문서윤이 담배? 그러나 반사적으로 차를 멈춰 세운 직감이 틀릴 리 만무했다. 연약한 가로등 아래에서도 선이 분명하게 보이는 인영은 문서윤이 확실했다.

심지어 혼자가 아니었다. 지난번에 본 웬 양아치 같은 새끼가 함께였다.

남태은. 우연재는 어렵지 않게 남자의 이름을 복기했다. 그의 이름과 간단한 신상 정보를 알아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을 뿐, 학교 내에서 나름대로 유명 인사였다. 슬쩍 운을 뗀 것만으로도 발 넓은 동기들의 입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던 걸 보면 많은 소문을 끌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담배는 도대체 언제 배웠지. 문서윤이 담배를 배웠다면 군대에서일 확률이 높았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담배를 시작할 성격은 되지 못했다.

골몰하듯 곧게 뻗은 눈썹이 찌푸려지며 그 위로 신경질적인 홈이 패었다. 우연재는 집요한 시선으로 문서윤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생활관에서 옆자리를 썼다던 남자와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설마 담배 가르친 새끼가…….”

저 새끼한테 배웠나.

제가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 그 선을 가늠해야만 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순간, 남태은이 손을 뻗어 문서윤의 엉덩이를 건드렸다.

“씹…….”

순식간에 전신을 관통하는 불쾌함에 우연재는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익숙하다는 듯 멀거니 서 있는 문서윤의 태도에는 기어코 짜증이 솟았다.

아무렇지 않게 문서윤의 엉덩이를 친 새끼는 곧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멀어져 갔다.

“하…….”

우연재는 안면조차 트지 않은 남자를 향한 원인 모를 적개심을 적당히 갈무리했다. 이 시간에, 학교라는 장소에서 사람에게 손을 댈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몇 초간 극렬하게 치솟는 짜증을 간신히 잠재운 그는 문서윤과 저 사이의 적당한 선을 다시금 재단하며 차에서 내려섰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흡연 구역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문서윤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우연재는 그제야 남태은이 건넨 물건이 담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뺨에 힘이 실리자 턱이 팽팽하게 당겼다.

등 뒤에 멈춰 설 때까지 문서윤은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뒤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을 테다. 각기 다른 불쾌함이 담배 연기처럼 지저분하게 뒤섞였다.

우연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팔을 뻗었다. 담배를 쥘 일 없던 손가락이 반쯤 타들어 간 물체를 낚아챘다. 다른 새끼가 내준 물건부터 눈앞에서 치우는 게 먼저였다.

“아, 형. 뭐예요.”

형? 문서윤이 웃는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우연재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우리 서윤이가 담배 피우는 줄 몰랐네?”

올려다보는 시선이 당황함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한층 더 바닥으로 처박혔다.

미지근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공기가 미지근한 건지 열 오른 머리가 그렇게 받아들이는 건지 모든 게 불분명했다. 확실한 건 축축한 공기에 섞인 담배 냄새가 사람의 신경을 예민하게 충동질한다는 사실이었다.

“담배 가르친 게 그 새끼야?”

우연재는 하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 움직이며 평온한 어조로 물었다. 핑계라도 댈 줄 알았건만 문서윤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순식간에 심기가 비틀려 그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네가 입에 달고 살던 좋은 사람이 아까 그 새끼냐고.”

비틀림의 원인은 명백했다. 다른 사람이 문서윤에게 무언가를 처음으로 가르쳤다는 데서 기인한 비틀림이었다.

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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