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장난기가 섞인 말투였다. 조금 전, 후배들과 있던 일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내가 애야?”
“내 눈에는 다를 것도 없다니까.”
어릴 때부터 우연재 앞에서 운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차마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나저나 교수님이 같이 보자고 하셨나 보네.”
“어떻게 알았어?”
“교수님이 먼저 이야기 안 꺼내셨으면 네가 같이 가자고 할 리가 없으니까.”
지금까지 그랬나? 문서윤은 오래된 기억을 더듬고 나서야 우연재의 말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인이 된 후, 우연재를 집으로 부른 건 아버지가 그의 안부를 물을 때가 전부였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곧잘 집으로 부르던 걸 생각하면 큰 변화이기는 했다. 저조차도 여태 의식하지 못한 사실을 우연재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언제 갈 건데.”
이번 주에 갈까, 하고 물으려던 문서윤은 곧바로 말을 바꿨다.
“다음 달쯤?”
우연재는 제가 지난 주말에 본가에 다녀온 줄 알고 있었다. 이번 주를 들먹이면 수상쩍게 보일 만한 상황이었다. 집에 있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기숙사행을 택한 사람이 주말마다 본가에 들르면 이상해 보일 게 뻔했다.
문서윤은 먼저 맞는 매가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아버지와 관련된 일만큼은 도망치는 쪽을 택하고는 했다. 우연재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테니 아예 다음 달로 미뤄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중간고사 끝나고 가?”
머그잔을 향해 눈꺼풀을 내리깐 우연재가 느릿하게 시선을 끌어 올렸다.
“그것도 괜찮고. 그 전까지는 공부한다는 핑계 대면 되니까.”
“알았어, 그럼. 교수님한테 말씀드려.”
대략적으로나마 일정이 정해지자 맥이 풀렸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내심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우연재가 여자 친구와의 약속을 이유로 거절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던 차였다. 그래도 아직은 제가 시간을 내줄 만한 친구인 것 같아 다행이라는 안도가 찾아왔다.
문서윤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이 끝났으니 슬슬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무리 손님이 없다지만 송주아에게 온전히 카운터를 맡기는 것도 미안했다.
“간다. 있다 가.”
“잠깐 앉아 봐.”
그대로 스쳐 지나가려는데 우연재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문서윤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소파를 붙잡았다. 끌려가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붙든 것에 가까웠다. 우연재의 시선이 그리로 향하더니 눈썹 한쪽이 슬쩍 올라갔다.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피하는 게 너무 티가 났나 싶어 문서윤은 적당한 핑계를 둘러댔다.
“나 일하는 중이잖아.”
“손님 없는데.”
평소라면 퇴근 시간과 맞물려 북적여야 정상이건만, 오늘따라 카페 내부가 조용했다.
“그래도 나 혼자 일하는 것도 아니고.”
“주아야.”
“네?”
우연재가 친한 사람 부르듯 송주아를 불렀다. 카운터에 있던 송주아는 깜짝 놀란 사람처럼 파드득 떨더니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많이 바빠? 서윤이 잠깐 잡고 있어도 되나 싶어서.”
“괜찮아요. 바쁘면 제가 서윤 오빠 부를게요.”
“응, 고마워.”
송주아를 향해 예의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인 우연재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곤 당황해하는 문서윤을 빤히 올려다보며 옆자리를 향해 까딱,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는데.”
손목을 쥔 악력은 그대로였다.
“잠깐만이다.”
송주아가 괜찮다는데 계속 우기기도 뭣해 문서윤은 마지못해 우연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성인 남자 두 명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소파였으나, 어쩐지 좁게만 느껴져 숨이 막혔다.
“왜 잡았는데.”
“과제 얘기 좀 하게.”
우연재가 노트북을 비스듬히 돌려주며 가까이 앉으라는 듯 허리를 당겨 안았다. 옆구리를 타고 오르는 간지러움에 움찔, 몸을 떤 문서윤은 제가 떨어 놓고도 지레 놀라 우연재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노트북에 시선이 고정된 덕분에 과민한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여기부터 봐.”
“알았어.”
문서윤은 노트북에 집중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내용이 눈에 들어오기는커녕 입 안이 바짝 말라붙었다. 이럴 때면 2년의 공백기를 절감하게 됐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사소한 스킨십이 지나치게 의식되는 기분이었다.
당분간 거리를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 * *
“오빠. 수고하셨어요.”
가벼운 재킷 차림으로 나온 송주아가 지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문서윤은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너도 수고했어.”
“요즘 손님 엄청 많은 것 같아요.”
“봄이라 그런가. 중간고사 기간에는 더할걸.”
“그래도 시험 기간에는 보통 아메리카노 시키니까 괜찮아요. 요즘은 손 많이 가는 메뉴들만 나간단 말이에요.”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바쁘게 살겠다는 다짐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다. 오랜만의 학교생활에 적응할 때쯤 되니 과제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카페는 카페대로 바빴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기숙사에 들어가면 남태은 등쌀에 떠밀려 가볍게 학교 운동장을 돌거나 야식을 먹는 식이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면 한 주가 훌쩍 지나 있었다.
우연재와 마주치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일주일에 세 번, 함께 전공을 듣거나 가끔 점심을 같이 먹는 정도였다. 아니면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언제 꽃신을 줄 거냐느니, 안 놀아 줘서 서운하다느니 하던 말버릇 때문에 치대지 않을까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였다.
다행이라는 생각 한편으로는 섭섭함도 있었다. 말만 저를 기다린 것 같아서.
“그래도 내일 주말이라서 다행이에요. 알바 주말에도 할까 하다가 말았는데, 역시 주말에는 쉬는 게 좋더라고요.”
“그건 그렇지.”
“오빠도 빨리 옷 갈아입고 나와요. 저 조명 끄고 있을게요.”
“알았어.”
문서윤은 송주아에게 일을 맡기고는 비품실로 들어가 앞치마를 벗었다. 옷을 갈아입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날씨가 많이 풀린 덕분에, 카디건만 챙기면 끝이었다.
“내가 문 잠그고 갈게.”
“알았어요. 다음 주에 봐요.”
“잘 가.”
송주아를 먼저 보낸 그는 카페 내부를 둘러보고는 익숙하게 문을 잠갔다.
불현듯, 이 순간이 몇 달 전의 어느 날과 겹쳐졌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가려던 길이었다. 익숙한 향수 냄새와 함께 허리가 끌어당겨진 건.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우연재의 존재 여부뿐이었다.
“나도 나다, 참…….”
문서윤은 스스로를 비웃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실소했다. 우연재와의 거리에서 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주제에 그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것도 웃겼다.
괜히 머리카락을 헝클인 그는 기숙사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조만간 벚꽃이 필 것 같았다.
“어, 강아지 왔냐.”
“강아지는 무슨 강아지예요.”
방에 들어가자 초췌한 꼴의 남태은이 의자를 뒤로 주욱 빼며 손을 흔들었다. 과제 폭탄을 맞았다더니, 바쁜 모양이었다.
“담배 피우러 가자.”
기도하듯 양손을 모은 자세가 퍽 애처로웠다.
“아니다. 안 피워도 되니까 나 담배 피우는 거 구경할래?”
“아니, 왜 자꾸 나만 보면 담배 피우러 가재. 형 친구 없어요?”
“지금 이 시간에 같이 담배 피울 친구는 없엉.”
남태은이 능글맞게 대꾸했다. 문서윤은 잠깐 고민하다 안쪽으로 들어서는 대신 다시 운동화를 신었다. 신호를 알아들은 남태은이 잽싸게 겉옷을 챙기며 다가왔다.
“밖에 춥냐?”
“별로 안 추워요. 며칠 있으면 벚꽃 필 것 같던데.”
“그래? 중간고사 시즌이네.”
남태은이 슬리퍼에 발을 끼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문서윤은 기숙사에 도착한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건물을 빠져나와야 했다.
“야, 문서윤.”
“네?”
“어떻게 되고 있냐? 짝사랑.”
“흡, 콜록, 콜록!”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던 문서윤은 예상치도 못한 노골적인 질문에 기침을 터뜨렸다. 알싸한 연기 때문에 목에서 매운 기운이 올라왔다.
“뭐예요?”
“뭐가. 어쭈, 노려보네? 눈물 달고 노려보면 무서운 줄 아냐?”
남태은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낄낄거렸다. 벤치에 대충 걸터앉아 한쪽 다리를 허벅지 위로 턱 올려 둔 자세가 껄렁해 보였다. 사람을 놀리는 말투와 무척 잘 어울리는 자세였다.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요. 그 뒤로 별말 없길래 궁금해할 줄 몰랐는데.”
“딱히 궁금해서 물어본 거 아냐. 너 걱정돼서 그렇지.”
“걱정이요?”
걱정될 게 뭐가 있지. 문서윤은 눈매를 찌푸렸다.
“나도 너한테 들은 얘기 지금 반은 날아가서 정확한 기억은 안 나는데, 하나는 확실하게 기억난단 말이지. 걔가 너한테 존나게 흘리고 다니는 거.”
“뭘 흘려요. 원래 말버릇이 그렇다니까?”
“그래. 그게 흘리는 거라니까.”
남태은이 담배를 끼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혀를 찼다.
“그렇게 순진해서 이 험난한 세상 어떻게 살래, 문서윤아.”
“저 안 순진해요.”
“아무튼. 어떻게 되고 있냐고. 오지랖인 거 아는데 묻는 거야.”
문서윤은 입술을 달싹였다. 담배 때문인지 가슴이 텁텁했다.
“어떻게 되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친구 사이인데 뭐가 어떻게 돼요. ……연락은 잘 안 하고 있지만.”
“걔 피해 다녀?”
피해 다닌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했다. 선을 지킨다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