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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24)화 (24/139)

24화

조별 과제는 누구에게나 기피 대상이지만 개중에서도 최악이 있다면 알아서 조를 짜야 하는 수업일 테다. 조별 과제야 넌더리가 날 정도로 익숙했으나 휴학했다 돌아오니 1학년 때처럼 휘뚜루마뚜루 조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얼굴을 아는 동기들이 몇 있기는 해도 각자 친했던 무리끼리 모여 있는 바람에 끼어들기도 여의치 않았다.

“오빠. 안녕하세요. 혹시 조 정하셨어요?”

남는 사람 모아서 해야겠다, 결정했을 때 서지은이 다가왔다.

“안녕. 아니, 아직.”

“그럼 저희랑 하실래요? 저희 딱 세 명인데.”

서지은 뒤로 낯선 얼굴 둘이 보였다.

“끼워 주면 나야 고맙지.”

문서윤은 고민하지 않고 수락했다. 무임승차자가 발생하더라도 화낼 시간에 대신 일을 처리해 버리는 편이라 거리낄 게 없었다.

“아니에요. 저희야말로 감사하죠. 연재 오빠한테 들었는데 공부 잘하신다면서요? 저희 학점 관리 열심히 하는 편이라 이왕이면 잘하는 분이랑 같이하고 싶어서 그래요.”

우연재가 서지은에게 잘 부탁하니 뭐니 하는 말을 듣긴 했어도 설마하니 그런 말까지 전했을 줄은 몰랐다. 민망함이 몰려와 문서윤은 어설프게 웃기만 했다.

“이쪽은 강수하, 2학년 부과대고 이쪽은 박예은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세요!”

강수하가 꾸벅 허리를 숙이며 극존칭을 사용했다. 문서윤은 엉겁결에 까딱, 고개를 숙였다. 지나치게 깍듯한 후배들이 생기니 조금 부담스러웠다.

“집행부원이라 저희 셋이 제일 친해서 같이 다녀요. 말 편하게 하세요.”

“아……. 알았어, 고마워.”

“선배님. 혹시 형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불러도 돼. 그리고 그렇게 높임말 안 써도 되는데.”

“엇, 그럼 형이라고 부를게요! 아니, 가끔 뭐라고 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강수하가 주변 눈치를 힐금 살피며 귓속말을 하듯 손날을 세워 입술 옆으로 가져다 댔다. 그러지 않아도 강의가 끝나자마자 조를 짜라는 폭탄을 던지고 사라진 교수 때문에 주변이 온통 시끄러워 아무도 듣지 못할 것 같기는 했다.

“오빠. 혹시 바쁘세요? 아예 오늘 발표 주제까지 정하면 어떨까 해서요.”

박예은이 상황 정리에 나섰다. 문서윤은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한 시간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 이후에는 알바 가야 해서.”

“알바하시는구나. 어디서 하세요?”

“나 알아! 형 정문 근처 개인 카페에서 알바하시죠?”

“어……. 어떻게 알았어?”

“저 그 길 자주 지나다니거든요. 단골까지는 아닌데 가끔 가서 알아요.”

“그럼 아예 카페에서 주제 정하는 거 어때? 오빠, 괜찮으세요?”

“괜찮아. 그럼 카페 가서 정리하자.”

한시름 덜었다. 문서윤은 후배들과 자리를 옮기며 우연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본가 갈 때 시간 낼 수 있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해 봤자 쓸데없는 문제였다. 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학점 관리를 열심히 한다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었는지, 순식간에 주제와 역할 분담이 정해졌다. 그러고 나자 대화가 슬슬 사적인 영역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지은이한테 들었는데, 형 연재 형이랑 친하시다면서요?”

강수하가 아이스 초코를 빨대로 쪼옥 빨아들이며 물었다. 딱딱한 높임법을 사용할 때는 언제고, 한참 어린 동생처럼 해맑은 분위기를 풍겼다. 커피를 사 주며 디저트도 함께 먹으라고 첨언하자 눈을 반짝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어렸을 때부터 알아서.”

“그럼 두 분 소꿉친구, 그런 거예요?”

관심이 생겼는지 박예은이 대화에 합세했다.

“응.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알았으니까 소꿉친구지. 그런데 그건 왜?”

“신기해서요. 연재 형이 뭐라고 해야 되지……. 두루두루 아는 사람 많고 다들 친해 보이긴 하는데 진짜로 친한 사람은 없는? 그런 분위기였거든요.”

“친한 애들 비슷한 시기에 군대 가서 그래.”

문서윤은 티백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저를 시작으로 김현승은 물론, 다른 친구들까지 줄줄이 입대했으니 이제야 스물한 살인 후배들은 모를 법도 했다.

“아아, 그래서 그렇구나. 아무튼, 갑자기 서윤 오빠 잘 부탁한다고 해서 놀랐어요. 저도 얼굴 오래 본 건 아닌데 그런 얘기 잘 안 하는 사람이잖아요.”

“맞아, 맞아. 연재 형 개총 뒤풀이 왔을 때도 진짜 놀랐는데. 형 때문에 온 거라면서요?”

“오빠 때문에 온 거였구나. 어쩐지.”

종알거리는 목소리들이 한데 뒤섞였다. 이렇게까지 활기찬 분위기는 오랜만이라 문서윤은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기만 했다.

“그 진상 보낸 것도 연재 형이잖아.”

강수하가 케이크를 포크로 찌르며 툭, 내뱉었다. 동시에 서지은과 박예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깊이 공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막을 모르는 문서윤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진상?”

“나이 어디로 처먹었는지 모를 새끼 한 명 있어요.”

서지은이 카페 내부를 힐금 둘러보며 소리 죽여 말했다. 학교 근처라 말을 조심하려는지 태도가 사뭇 조심스러웠다.

“오빠도 아실걸요? 복학생 테이블 가서 진상 부리다가 연재 오빠한테 털려서 홀랑 내뺐는데.”

“복학생 테이블? 아…….”

저번 주에 있었던 일인데도 벌써 흐릿해진 기억이었다. 후배들이 말한 진상에 대한 기억은 더욱 흐릿했다. 그때 화장실 갔다고 하지 않았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갔다 들어온 후 얼굴을 본 적이 없기는 했다.

“누군지 아세요? 하, 진짜. 짜증 나 죽는 줄 알았잖아요.”

서지은이 넌더리 나는 표정으로 빨대를 휘저었다.

“그래도 중간에 가서 편했잖아. 2차까지 따라왔으면, 윽.”

“연재 형이 그렇게 안 생겼는데 기가 존나 세긴 해. 그렇지?”

“뭔 소리야. 딱 봐도 기 엄청 세게 생겼는데. 원래 인상 좋은 사람들이 더 무서워.”

다른 사람의 입으로 우연재에 대한 평가를 들으려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끼어들면 불편해할 것 같아 문서윤은 잠자코 있기를 택했다.

“오빠는 여자 친구 없으세요?”

서지은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오빠한테 관심 있는 애들 많은데. 근데 맨날 수업 끝나자마자 바로 가 버리셔서 다들 말 못 거는 것 같아요. 아니면 연재 오빠랑 사라지고.”

부담스러운 질문이긴 해도 20대 초반 후배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일 것이다. 한창 연애하기 좋은 시기이니 비슷한 질문이 연거푸 들어오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같은 조인 거 알면 다리 놔 달라는 애들 생길걸요. 혹시 관심 있는 사람 없어요?”

“아…….”

요즘 애들은 저돌적이구나. 문서윤은 뺨에 힘을 실으며 황급히 핑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 말려들면 어느 날 불쑥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릴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사전에 차단하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나는 연상 좋아해서.”

두 살이나 어린 후배들에게 취향 운운하기가 머쓱했지만, 지금으로선 이 대답이 최선이었다. 나중에 곤란한 일이 생기는 것보다는 잠깐 부끄러운 게 나을 듯했다.

“오오, 형. 진짜 의외다.”

“연상이요? 그럼 최소 4학년이네요?”

스물넷 이상이면 취업 준비에 한창이거나 사회인이라 괜히 둘러댄 소리였다. 기실 문서윤에게는 이상형이랄 게 없었다. 우연재를 좋아하게 된 이후로는 특별히 그런 생각 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애들한테 서윤 오빠가 엄청 단호하게 연상이 취향이라고 했다고 말해야겠다.”

아무리 거짓말이라지만 내뱉고 나니 민망해졌다.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차를 마시는 척 눈꺼풀을 내리까는데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지나가는 사람이겠거니 생각한 것도 잠시,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서윤 연상이 취향인 거 이제야 알았네?”

우연재가 소파 위로 팔을 걸치며 몸을 기울여 왔다.

문서윤은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며 카운터로 나섰다.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송주아가 불쑥 트레이를 내밀었다.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는 트레이였다.

“왜? 손님이 가지러 안 왔어?”

“그게 아니라 오빠 친구 왔잖아요. 손님도 없는데 얘기하고 있으라고요. 이거 시키신 거예요.”

“아……. 미안해. 빨리 끝낼게.”

후배들이 우연재와 간단한 대화를 나눈 후 카페를 빠져나갔을 때는 막 아르바이트 교대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문서윤은 우연재를 앉혀 둔 뒤 비품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는 사이에 송주아가 주문을 받은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바쁘면 부를게요.”

트레이를 받아 든 그는 구석진 자리를 향해 다가갔다. 아무 이유 없이 카페에 들른 건 아니었는지, 우연재는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갑자기 뭐야?”

문서윤은 트레이를 내려 두며 그 맞은편에 앉았다. 왜 여기까지 왔지.

“문자 보냈길래.”

“그냥 문자 보내지.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 없는데.”

“문서윤이 안 놀아 주니까 내가 와야지 어떡해.”

우연재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실실 웃었다. 머그잔 때문에 입술이 가려져 정확한 표정을 읽어 내기가 어려웠다.

“나 없이 학교생활 잘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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