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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23)화 (23/139)

23화

바짝 입 안이 마르는 기분에 문서윤은 괜히 차를 마셨다. 델 리 없는 온도인데도 이상하게 몸 어딘가가 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연재가 저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을 할 때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마음이 아픈 것 같기도 했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양가적인 감정이 온 신경을 쥐락펴락했다.

우연재가 내뱉는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제일 친한 친구는 저라는 의미였다. 17년간 함께한 소꿉친구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 말에 어떠한 여지를 느낄 정도로 문서윤은 멍청하지 않았다.

“나도 너밖에 없어.”

문서윤은 테이크아웃 잔을 매만지며 잔잔하게 고백했다. 단순히 우연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정말 저에게 남은 것은 우연재뿐이었다.

“근데 왜 나는 네 친한 형을 모르지.”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단정하게 뻗은 눈썹 위로 긴 홈이 패었다. 눈동자를 보면 짜증이 난 것 같은데, 목소리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친하긴 한데 전역하고 연락 끊겨서 반년 만에 만난 거야. 계속 연락했으면 너한테도 말했을걸. 다음에 마주치면 소개해 줄게.”

“반년 만에 본다고.”

우연재의 시선이 얼굴을 비껴갔다. 잠시 앞 유리에 머무른 시선은 다시금 문서윤을 향해 떨어졌다.

“반년 만에 보는데…….”

입술이 말꼬리처럼 느릿하게 벌어졌다.

“왜 문서윤을 주물럭거리지?”

월요일 아침이었다. 9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라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차 안이라 대화 사이에 끼어드는 자잘한 소음조차 없었다. 우연재의 목소리가 한층 날카롭게 들리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주물럭이라니, 떡도 아니고 누가 누굴 주물럭거린단 소리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설마 뺨 잡은 것 때문에 이러나? 그렇다 해도 고작 얼굴 한 번 잡았다 놓은 행위에 주물럭이라는 단어는 어폐가 있었다.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뺨 한 번 잡은 거 가지고 무슨 주물럭이야. 주물럭 뜻 몰라?”

“누가 성인 남자 뺨을 그렇게 잡아. 애인 사이라도 돼?”

순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아니……. 너도 그러잖아.”

우연재가 설핏 눈썹을 찌푸렸다. 입술 끝이 비스듬히 올라가자 뺨이 경련하듯 실룩거렸다.

“나랑 고작 1년 반 본 그 새끼랑 같아?”

무슨 말이 나오든 대꾸할 준비를 하던 문서윤은 입을 다물었다.

같을 리가. 우연재가 제게 치대는 걸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지만, 멀쩡한 성인 남자가 제게 우연재처럼 치댄다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테다. 적어도 주변인들은 그랬다.

물론 어깨동무나 뺨을 잡는 행위 정도는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스킨십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남태은과 제가 같냐는 우연재의 물음에 그렇다고 답할 기준이 되지는 못했다.

“그 새끼가 오해하면 어떡하려고.”

“무슨 오해…….”

문서윤은 머뭇거리다 되물었다.

“그동안 내가 이상한 새끼들 쳐 내느라 얼마나 좆빠지게 고생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모르면 안 되지.”

저절로 중·고등학교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외모나 피아노와 관련된 소문 때문에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꼬이기는 했다. 우연재처럼 덩치가 월등히 큰 것도 아니라 더 그랬다.

“태은이 형 그런 오해 할 사람 아니야. 군 생활 같이해서 잘 알아.”

그제야 우연재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남태은을 잘 모르는 상태라 경계심에 더욱 날을 세우는 듯했다. 우연재 입장에서는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도 있겠다 싶어 문서윤은 순순히 말을 덧붙였다.

“근데 너는 형 잘 모르니까…… 걱정될 수도 있겠네. 아무튼 왜 갑자기 그 얘기 꺼냈는지 이해했어. 네 말 잘 들을게.”

“그래야지. 지금까지 내 말 들어서 나빴던 적 없잖아.”

우연재가 가느스름하게 눈을 접으며 말했다. 다소 물러진 말투와 달리 확답을 요구하는 눈길이 집요하게 느껴졌다.

“알아. 네가 왜 그런 말 했는지도 이해했다니까.”

샅샅이 살피는 눈길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문서윤은 차를 마시는 척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차를 홀짝이며 곁눈질로 우연재를 살피자 미묘하게 짜증스럽던 얼굴이 그럭저럭 풀려 있었다. 큰 표정 변화는 없었으나 미세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읽어 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교수님 만난 건 어떻게 됐는데. 연락 없어서 걱정했는데. 또 울고 있을까 봐.”

컵을 쥔 손에 힘이 실렸다. 아버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빠져나온 거짓말이 뒤늦게야 머릿속을 엄습했다. 아파서 본가가 아닌 기숙사로 향했다는 핑계는 전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한 상태였는데 갑자기 아팠다니, 의아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내가 애야? 아버지 만났다고 울게. 그냥, 똑같으시지.”

결국 문서윤은 또다시 거짓말을 택했다. 아버지와 불편한 일이 있으면 스트레스 때문에 잘 앓는 편이라 아픈 이유를 둘러대기에도 적절한 거짓말이었다.

무엇보다 왜 갑자기 아팠냐고 물으면 솔직하게 털어놓기가 곤란한 상황이었다. 네가 더럽다는 말을 해서 울었고, 그 꼴을 남태은에게 걸렸고, 속이 상해 술을 마시다 보니 아팠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하필 우연재에게, 그것도 아버지와 관련된 핑계를 대며 거짓말을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으나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주말에 아팠던 것도 스트레스받아서 그런가 보네.”

“그랬나…….”

본가에 다녀왔다는 거짓말 하나면 모든 게 간단히 풀릴 문제였다. 단순히 환절기라 아팠다고 말하는 것보단 이쪽이 설득력을 높이기에도 좋았다.

게다가 환절기 핑계만 대기에는 상황이 애매했다. 감기에 걸릴 만한 날씨이기는 해도 자주 외출하는 편은 아닌 데다, 금요일에도 계속 차를 타고 다녔는데 갑자기 감기에 걸리는 것도 이상해 보일 테다.

연이은 거짓말에 죄책감이 더해졌으나 문서윤은 그 죄책감을 눌러 삼켰다.

“룸메가 전화 대신 받은 것도 아파서 그랬던 거고?”

“약 먹고 자느라 못 들어서 대신 받았나 봐.”

“그분은 취한 것 같던데.”

새끼가 그분이 된 걸 보니 남태은에 대한 인상이 그럭저럭 회복된 모양이었다. 문서윤은 시트에 등을 기대며 조금 안심했다.

“태은이 형 술 마시고 들어와서 그래.”

“그래?”

시동을 건 우연재가 핸들 위로 손을 뻗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맞닿은 시선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알았어.”

톡 튀듯이 가벼운 대답과 함께 차가 출발했다.

* * *

[이번에 연재도 같이 들르는 건 어떻니. 얼굴 본 지 오래된 것 같은데.]

간헐적으로 오고 가는 메시지창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아파서 다음에 들르겠다는 문자에 몸 잘 챙기라는 말과 함께 정 불편하면 집으로 오라는 답장 아래로 새롭게 도착한 내용이었다.

어릴 때부터 우연재가 제집 드나들듯 드나든 터라 딱히 이상할 것 없는 문자였다. 부모님과 함께 식사하는 일도 종종 있었으니까.

입대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본가에 왕래하는 일이 잦았다. 문서윤 역시 우연재의 부모님과 여러 번 식사 자리를 가지고는 했다.

[연재한테 얘기해 볼게요.]

문서윤은 답장을 보낸 뒤 곧장 핸드폰 화면을 껐다. 곧 있으면 강의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개강 이후 고작 한 주가 지난 시점이라 강의실 분위기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혼자 본가 가는 것보다는 같이 가는 게 좋긴 한데…….’

아버지의 관심이 우연재에게 집중될 테니 한숨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문서윤은 태블릿 구석에 우연재의 이름을 써넣었다가 그 위로 사선을 그어 넣었다. 별 의미 없는 낙서였다.

아버지가 마음을 쓰는 대상은 실상 우연재보다는 그의 아버지였다. 문서윤에게는 이웃집 아저씨나 다를 바 없으나 아버지에게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아버지의 시선이 보편적이기는 했다.

우연재와 소꿉친구가 된 건 어머니가 우씨 집안과 연이 있어서였다. 유복하게 자란 그녀는 제법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 하나가 우연재의 집안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서서히 연이 끊기는 게 자연스럽겠지만, 문서윤 제가 그 집 아들과 친한 덕분에 지금까지 교류가 이어져 오는 중이었다.

‘아버지 욕심이지.’

어른들 사이의 우열은 어린아이들의 눈에도 쉽게 보이는 법이었다. 사립 음대 교수가 기업인의 눈치를 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고.

‘아저씨가 좋은 분은 맞지만…….’

막연하게나마 아버지가 편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연재에게 관심을 쏟고 살갑게 대해 주는 것도 그래서일 테다. 문서윤은 그런 아버지가 부끄럽다기보다는 조금 불편했다.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보여서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나 혼자 가는 것보다는 우연재랑 같이 가는 게 덜 불편하긴 한데. 정 교수님도 같이 계시려나.’

문서윤은 어색하게 웃는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처럼 바쁘시니, 식사 자리에 참석할지는 미지수였다.

문득 우연재라면 그 자리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졌다. 높은 확률로 신랄하게 씹어 대지 않을까 싶었다. 교수님 얼굴 좋아 보이시더라, 로 시작하는 물 흐르듯 부드러운 목소리는 빈정거림을 가득 안고 있을 터였다.

이러나저러나 같이 가자고 하면 흔쾌히 승낙할 가능성이 높았다. 제가 아버지를 불편해한다는 사실도, 함께 가면 제게 관심이 분산되니 그나마 편해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곧바로 연락하지 않은 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여자 친구랑 만나느라 주말에 시간 내기 어렵지 않으려나. 그 이유로 거절당하면 상처받을 것 같은데.’

생각은 도돌이표처럼 다시 우연재에게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 우연재가 내뱉은 말이 종종 마음을 찔러 대고는 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그러나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더럽다는 말을 들은 순간 창백하게 질린 마음은 때때로 보여 주는 다정함에 금세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얼음이 뜨거운 차에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홑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교수님!”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데 교수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문서윤은 후배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전공 자료가 띄워진 태블릿 구석에는 여전히 우연재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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