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빛 샤워 (13)화 (13/139)

13화

“어, 어어. 오랜만이다, 연재야.”

한철민은 그새 술이 깼는지 번쩍 정신을 차린 얼굴이었다.

“네가 개총 올 줄은 몰랐네.”

“선배님께서 여기 계신 줄 몰라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취준 때문에 바쁘신 줄 알았는데 제 생각이 짧았죠.”

우연재가 한철민과 일대일로 대화에 나서자, 동기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곧 저들끼리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어색한 공기가 감돌던 테이블이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하, 하하. 과 행사 참석해야 자소서에 쓸 것도 많아지고…….”

“아아, 그러셨구나.”

자세를 바로 한 우연재는 문서윤이 마시던 맥주잔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뒤늦게야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아, 하고 천연덕스럽게 목을 울린 그는 테이블에 올려 둔 맥주병을 쥐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철민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흡사 겁먹은 거북이 같았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누가 보면 제가 이걸로 선배님 머리통이라도 깨트리는 줄 알겠어요.”

나지막하게 웃은 그는 사근사근한 어조로 농담을 던졌다.

“술 받으실래요?”

“아니, 나 취한 것 같아서 괜찮…….”

“왜요.”

한철민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으나 우연재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말을 잘랐다. 늘어지는 말꼬리 덕에 무례하기는커녕 애교 넘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예쁘장한 남자 새끼가 따라 주는 술은 맛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시다면서요.”

“아니, 연재야. 그건…….”

한철민은 꿀꺽 침을 삼켰다. 거기까지 듣고 있을 줄은 몰랐다.

조금 전까지 제 옆에 앉아 있던 사내새끼가 여자들의 말을 빌려 청순하게 생겼다면, 눈앞의 남자는 화려한 외모를 자랑했다. 오죽하면 처음 본 순간 연예인이나 할 것이지 대학은 뭐 하러 왔지, 생각했겠는가. 어떤 집안인지 알고 나서 납득하긴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아직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 우연재 앞에서 예쁘장한 남자 새끼가 따라 주는 술이라니. 실언했다는 자각이 들자마자 낭패감이 솟구쳤다.

“아. 문서윤은 예쁜데 저는 안 예쁘신가 봐요.”

맥주병에서 손을 떼어 낸 우연재가 이내 그 옆에 있는 소주를 들어 올렸다. 손등 위로 미약하게 핏줄이 불거지며 까드득, 소리와 함께 뚜껑이 떨어져 나갔다.

“응?”

우연재는 상대의 의사를 무시한 채 빈 맥주잔에 소주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한철민은 저도 모르게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붙잡았다. 자존심이 상했으나 우연재가 빤히 쳐다보고 있어 이제 와 물리기도 어려웠다.

“하, 하하. 네가 더…… 예쁘지.”

한철민은 남자에게 예쁘다는 말은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피아노를 쳤다던 그놈에게 예쁘니 뭐니 빈정거린 것 역시 곱상한 외모를 모욕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우연재가 내뱉는 예쁘다는 단어는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키가 크고 몸이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누가 봐도 화려한 인상이라 그런지, 남성성의 훼손은커녕 오히려 특유의 여유로움이 끼얹어지는 느낌이었다. 화려한 생김새의 포식자에게 수컷다움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아, 선배님 눈에는 제가 더 예쁘구나.”

우연재는 얄팍하게 입매를 허물어트리며 소주병을 테이블 위로 내려 두었다.

“그럼 저 보면서 드세요. 예쁜 애가 따라 주면 얼마나 더 맛있어지는지 저도 궁금하니까.”

나긋한 말투에 서린 신랄함에 한철민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시선을 끌어 내렸다. 투명한 액체가 맥주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계치를 넘어 잔 위로 물방울처럼 폭 솟은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아슬아슬했다. 소독용 알코올 냄새를 풍기는 액체는 조금만 움직여도 잔을 쥔 손가락은 물론 손바닥까지 흠뻑 적실 터였다.

모멸적인 언사도 아닌데 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내려다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느릿하게 접히는 눈꼬리에 싸늘한 시선이 교활하게 가려졌다.

“사람 기분 좆같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하게만 들렸다.

“문서윤으로 눈요기할 생각 하지 마시고.”

툭. 매끈한 손가락이 가볍게 잔을 건드렸다. 싸구려 액체가 흘러넘치며 하얗게 질린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우연재가 사람 좋은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 올린 것과 동시였다.

* * *

문서윤은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하며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우연재의 등장을 핑계로 열을 식히고 돌아왔을 때는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제가 앉았던 자리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옆자리를 불청객이 아닌 우연재가 차지했다는 점이었다.

“아직도 빨간데. 바람 쐰 거 맞아?”

우연재가 키득거리며 이리로 오라는 듯 고갯짓했다. 테이블을 차지한 동기들은 그새 술에 떡이 됐는지 저들끼리 큰 소리로 떠들어 대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예쁜 애가 따라 주는 술이 더 맛있다는 둥 어떻다는 둥 망발을 지껄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어?”

문서윤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글쎄. 화장실 가셨나.”

그럼 다시 돌아오는 거 아닌가?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피려는데 우연재가 앞에 놓인 잔을 가져가며 단언했다.

“아마 안 올걸.”

가벼운 말투였으나 확신하는 어조였다.

“그럼 다행이긴 한데……. 내 잔은 왜 가져가?”

불시에 잔을 빼앗긴 문서윤은 우연재의 손을 멀뚱히 바라봤다. 딱히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더 마실 생각은 없어도 불청객이 사라졌으니 동기들과 적당히 어울리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였다.

“그만 마셔.”

우연재가 장난치듯 술이 든 잔을 얕게 흔들었다.

“그것만 마실게.”

막상 술을 따라 준 동기는 잔뜩 취해 낄낄거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 잔은 비우는 게 나을 듯했다.

“너 이것까지 마시면 과음이야.”

“한 잔이잖아.”

“내가 네 주량 모르는 것도 아니고.”

같은 테이블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제가 얼마나 마셨는지 알지도 못할 텐데 왜 갑자기 주량 운운하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문서윤 저 자신조차도 몇 잔이나 비웠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냥 줘. 마시게.”

아무리 생각해도 저 한 잔에 취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문서윤은 빨리 내놓으라는 의미로 손을 뻗었다.

“으음.”

앞까지 다가온 손을 빤히 내려다보던 우연재는 눈꺼풀만 살짝 올려 손의 주인을 응시했다. 번잡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집요한 시선을 견디지 못한 문서윤이 슬쩍 눈을 피하려는 찰나 우연재가 팔을 움직였다.

잔을 채우고 있던 맥주가 느슨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넘어갔다. 문서윤은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위아래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목울대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우연재가 술을 마시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터라 절로 당황스러워졌다.

사실상 짝사랑 상대를 의식하지 않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난 몇 시간 동안 우연재가 사람들이 내미는 잔을 부드럽게 거절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그걸 왜 마셔? 차 가져왔잖아.”

깔끔하게 잔을 내려놓은 손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손등이 입술을 쓸었다. 문서윤은 살짝 젖은 우연재의 입술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입을 열었다. 그것 외에는 달리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누가 고집부리길래.”

“아니, 그 정도로 안 취한다니까?”

“내일 고맙다고나 해.”

문서윤은 대답 대신 괜히 눈가를 찌푸리며 물 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기껏 식힌 뺨이 또다시 달아오르는지 얼굴로 열이 올랐다. 술을 마시면 뺨이 쉽게 붉어지는 편이라 다행이었다. 다른 이유로 열이 올랐다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할 테다.

가만히 있기가 멋쩍어 물을 마시며 시선을 흐트러뜨리자 방금 전 우연재가 입술을 댄 맥주잔이 눈에 들어왔다.

자취를 감춘 싸구려 맥주가 꼭 제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재의 가벼운 손짓 하나에 찰랑찰랑 흔들리다가 종국에는 그에게 먹혀들어 가는 꼴이 볼만했다.

* * *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건 침대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캐리어였다. 여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룸메이트보다 훨씬 익숙해진 물건이었다.

“다음 주에야 오시려나 보네.”

문서윤은 침대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어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약간 잠겼을 뿐, 목소리는 멀쩡했다. 하마터면 과음으로 넘어갈 뻔한 술자리가 별 탈 없이 끝난 덕분이었다.

‘내일 고맙다고나 해.’

우연재가 자신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축 늘어진 컨디션을 보아하니 분명 한 잔만 더 마셨으면 숙취에 시달렸을 몸 상태였다.

문서윤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8시였다. 화요일은 2교시부터 시작이니 준비할 시간은 넉넉했다.

그는 짧은 고민 끝에 메시지를 한 통 보냈다.

[고마워]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 왔다. 무시하기에는 메시지와 전화 사이의 간격이 지나치게 짧다는 게 문제였다.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반, 이대로 피하고 싶은 마음이 반, 갈등이 일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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