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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2)화 (12/139)

12화

시선을 내리자 맥주잔이 보였다. 문서윤은 억지로 한숨을 삼켰다. 세상에는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미처 잊고 있었다.

개강총회가 술자리로 이어지리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사실상 학과 행사는 대부분 술자리로 이어지기 마련이었으니까. 저를 따라 개총에 참석하겠다는 우연재에게 그런 자리 싫어하지 않냐고 반문한 것도 비슷한 의미에서였다.

그렇다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아, 또 왔어.’

서지은이 짜증스레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아무 테이블에나 가지 말고 옆에 붙어 있어.’

아니면 단과대에서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던 중 우연재가 가볍게 충고를 던졌을 때부터.

복학생으로 가득한 테이블에 앉게 된 건 문서윤 제 의지가 아니었다. 우연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름 모를 집행부원에게 이끌려 앉다 보니 이 테이블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서윤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죄 없는 신입생 여자애들을 시커먼 복학생들과 합석시키는 것보다는 이쪽이 낫지 않나, 하는 싱거운 생각을 했을 뿐이다. 이러나저러나 자주 얼굴을 봐야 할 사이라 안면을 트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또 대부분은 얼굴이 익숙한 동기들이라 대화를 주고받기에도 편했다.

무엇보다 우연재의 충고처럼 그의 옆에 붙어 있을 생각이 없던 터라 오히려 괜찮았다. 다 큰 성인이, 그것도 군대까지 갔다 온 남자가 친구를 따라다니는 것도 우스워 보일 테다. 대부분은 신경도 쓰지 않을 테고 또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다들 취해 까맣게 잊어버리겠지만 우연재가 보모도 아니고 이런 자리에서까지 저를 챙기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문서윤 잘 부탁한다고 얼굴 좀 팔게.’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으나 우연재는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돌아다니기 바빴다. 정확히 말하면 여기저기서 부르는 사람이 많아 짧게 앉아 있다 일어나는 것에 가까웠다. 문서윤은 우연재를 좇으려는 시선을 억지로 테이블 위에 고정시키며 동기들과 술을 마셨다.

‘아, 씨발. 저 새끼 이쪽 봤다.’

문제를 감지하기 시작한 건 옆에 앉은 동기가 볼멘소리를 내뱉었을 때였다.

‘왜?’

‘저 새끼 존나 진상이야. 4학년인데 개총 온 거 보면 알 만하지. 오죽하면 나한테 소문이 들리겠냐?’

영문을 몰라 묻자 동기가 안경을 닦는 척 고개를 숙이며 관련된 이야기를 일러 주었다. 서지은이 말한 ‘또 왔어’의 주인공인 모양이었다.

‘복학생들 여기 모여 있었네? 오랜만에 대학 오니까 어떠냐?’

낯선 손이 어깨를 툭 치며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문서윤은 당황해하면서도 자리를 내주며 고개를 숙였다. 진상을 부려 봤자 얼마나 부릴까, 싶은 마음이 반, 대충 맞춰 주자 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인간관계에 무던한 편인 데다 사람들과 부딪치는 걸 싫어하는 그로서는 남에게 맞춰 주는 게 나름대로의 최선이었다. 여태 성격 때문에 누군가와 크게 부딪친 적도 없으니 이 시간도 잘 넘어가리란 낙관도 있었다. 허울이 뭐든지 간에 오늘의 모임 역시 수많은 술자리 중 하나일 뿐이었다. 술에 취해 웃고 떠들다 잊어버리면 그만인.

‘너는 어디 나왔냐?’

그래서 처음 보는 선배가 친밀한 사이라도 되는 양 허벅지를 툭 치며 군대를 물었을 때도 예의 바르게 답했다.

‘와, 이 새끼 존나 꿀 빨았네. 나는 말이야…….’

동기들이 무용담을 내뱉는 고학번의 으스댐에 어색하게 맞장구칠 때도 그럭저럭 어울렸다.

‘마셔, 마셔! 원래 선배가 주는 잔은 거절 안 하고 전부 마시는 거야. 이제 전역한 것들이 벌써 빠져 가지고……. 사회생활 어떻게 하려고 그려나, 니들?’

소맥이랍시고 맥주잔의 반을 소주로 채운 잔을 돌렸을 때도 군말 없이 마셨다.

문서윤뿐만 아니라 다들 불청객의 심기를 맞춰 주는 분위기였다. 불쾌하기는 해도 폭언이라 하기에는 애매했고, 잠깐이면 끝날 일인데 애꿎게 주변 테이블의 즐거운 공기까지 망칠 정도로 심각한 자리도 아니었다. 불편한 대상이 테이블에서 물러나면 안줏거리 삼듯 씹고 끝날 일이었다.

“따르라니까.”

옆에 앉은 남자가 술병을 툭 건드리며 명령했다. 테이블에 턱을 괴듯 몸을 돌린 자세라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도 벌겋게 취한 얼굴이 자세히 들여다보였다. 문서윤은 재차 한숨을 삼켰다. 평소대로라면 한 잔 따르고 말았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선배에게 술을 따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예쁜 애가 따라 줘야 술맛이 산다니까?”

술에 전 목소리에서 빈정거림과 희롱이 가득 묻어 나오지만 않았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테다.

“저, 선배님. 물 드릴까요?”

“끼어드냐?”

싸늘해진 분위기에 동기 한 명이 나섰으나 뒤따라온 반응은 빈정거림뿐이었다. 잇새로 혀를 씹은 문서윤은 마지못해 술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예쁜 애와 술맛 운운하는 상황이 매우 불쾌했으나 차라리 빨리 넘겨 버리는 게 편했다.

진상으로 유명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테이블에서도 이 지랄을 떨었을 게 분명했다.

“야, 너 이름이 뭐였더라?”

빨리 술을 따르고 끝내려는데 불현듯 손목이 잡혔다. 문서윤은 잡힌 손목을 힐긋 내려다보다 순순히 대답했다.

“문서윤입니다, 선배님.”

“아하, 문서윤. 너는 씨발 남자가 이름도 존나 여자 같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동기가 물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집행부를 불러오려는 눈치였다.

“그래서 얼굴도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나?”

문서윤은 입술을 달싹였다. 난데없는 외모 지적은 대처하기가 애매했다. 아닙니다, 하고 대답하면 뭐가 아니냐고 물을 것 같았고, 감사하다고 하면 칭찬으로 들리냐고 배배 꼴 인간이었다.

“남자 이름이 그게 뭐냐. 남자는 나처럼 이름도 묵직해야지. 한철민. 얼마나 묵직하냐고. 엉?”

“오. 어떤 한자 쓰십니까?”

넉살 좋은 동기 하나가 화제를 돌리자, 한철민은 손목을 놓으며 제 이름에 관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그가 몸을 돌려 앉은 덕분에 문서윤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릴 수 있었다. 사람 때문에 이렇게 불쾌하긴 오랜만이라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야. 너 바이올린 했다고 했나?”

관심이 멀어진 틈을 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한철민이 또다시 시비를 걸어왔다. 피아노에 관한 얘기가 도대체 어디까지 퍼진 건지 궁금했다. 하긴, 타과생인 송주아가 알고 있을 정도면 과 사람들이 아는 것도 영 이상하지는 않았다.

“피아노 쳤었습니다.”

문서윤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피아노? 그 와꾸에 피아노까지 쳤으면 여자들이 줄을 섰겠다? 너같이 생긴 애들이 피아노 쳐야 된다고 떠들던데.”

피아노와 여자, 그리고 외모가 무슨 상관관계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대답하든 상대의 심기를 거스를 게 뻔해 문서윤은 최대한 말을 골랐다.

“그런 상황 없었습니다.”

“없긴 뭐가 없어. 남자 새끼가 좀 솔직해져라. 이제 복학했으니까 골라 사귀겠네? 스무 살짜리 애들로? 아니, 근데 너처럼 예쁘장하면 여자들이 싫어할 것 같은데. 남자 새끼가 피부 하얀 거 봐라. 속눈썹은 존나 길어 가지고. 군 생활은 어떻게 했냐?”

기죽이려는 새끼들이 나타날 거라던 김현승의 조언이 귓가를 스쳤다. 원색적인 인신공격에 기가 죽을 정도로 심약한 성격은 아니어도 불쾌함이 스멀스멀 몰려들었다.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외모 운운하며 공격을 당하는 것도 오랜만이라 기분이 언짢았다.

“남들처럼 똑같이 했습니다.”

“퍽이나. 아무튼 한잔 따라 봐. 예쁘장한 남자 새끼가 따라 주는 술은 또 맛이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네.”

이제 언짢음을 넘어서 피곤함이 몰려왔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한 잔 따라 주자, 생각하며 맥주병으로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뺨을 쥐었다.

“얼굴 빨개진 거 보니까 취했네.”

난데없는 접촉에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우연재가 생글거리는 얼굴로 서 있었다.

“아……. 많이 빨개졌어?”

“응. 바람 좀 쐐야겠는데.”

나갔다 오라는 듯 그가 뒤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핑계에 자리를 빠져나가야겠다 싶어 문서윤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럼 나 물 마시고 바람 좀 쐬고 올게.”

갑작스러운 우연재의 등장에 놀랐는지 한철민이 눈을 끔벅였다. 문서윤은 까딱,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하고는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리가 비자 우연재는 원래 제자리인 것처럼 자연스레 문서윤이 앉아 있던 자리에 착석했다. 웃는 낯으로 동기들에게 인사를 건넨 그는 이내 옆에 앉은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편한 기색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쓸데없는 사람은 기억하지 않는 편이라 이름은 잊어버렸으나 얼굴만큼은 눈에 익은 선배였다. 예쁘장한 신입생에게 집적거리기로 유명한 새끼였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선배님.”

신입생들을 철통 방어하는 집행부원들을 피해 여기서 이 지랄을 떨어 대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문서윤이 별 병신 같은 새끼에게 걸려 억지로 술을 마실까 봐 걱정했더니, 그보다 더 병신 같은 게 들러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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