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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1)화 (11/139)

11화

“뭘 벌써부터 좆같은 새끼야. 룸메 이상한 경우 생각보다 별로 없다던데.”

어쩐지 말이 씨가 될 것 같아 문서윤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완곡하게 부정했다.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어도 우연재의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멍청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생활 패턴 안 맞으면 힘들 수도 있다는데 그거야 맞춰 가면 되는 거고.”

애초에 기숙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것 같지도 않았다. 그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무언가를 향한 몰두였다. 그러니 당분간은 카페 아르바이트와 공부에 집중할 계획이었다. 그래야 우연재와 거리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상하게 느끼지 않을 만한 선에서.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뭘 맞춰 가.”

목소리에 언뜻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섞여들었다.

저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문득 김현승이 우연재를 향해 공동체 생활 운운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남에게 굳이 맞춰 줄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왔으니 저 말이 어떤 인과 관계를 거쳐 튀어나왔는지도 알 것 같았다.

“같이 사는 거니까 어쩔 수 없잖아.”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우연재의 표정이 묘하게 삐딱해졌다.

“왜 그렇게 봐?”

“서윤아.”

“왜?”

“나한테서 독립하려고 하지 마.”

문서윤은 순간 당황했다. 단순히 우연재가 저를 자신과 한 울타리에 묶어서는 아니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인연이다 보니 우연재는 때때로 저를 가족의 범위에 집어넣고는 했다.

그의 부모님의 말버릇 중 하나가 ‘서윤이도 우리 아들이면 좋을 텐데.’였으므로 문서윤 역시 딱히 그게 이상하다고 여겨 본 적은 없었다. 교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감정적 상호 작용이 깊어질수록 가족애가 생겨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당황한 건 우연재가 제 마음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문서윤 자신조차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마음이었다. 은연중에 우연재에게서 떨어져 나갈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람 서운하게…….”

우연재가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언제 삐딱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얼굴 위로 번져 나갔다.

“독립은 무슨 독립이야. 진짜 우리 아버지 자리 뺏게?”

문서윤은 결국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우연재가 이런 식으로 농담을 던지는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이제는 그럴싸하게 받아칠 수 있었다. 꼬꼬마 시절부터 시작된 말버릇이라 우연재는 제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별 의미 없는 한마디에 정처 없이 휘둘리는 사람이 존재할 뿐이었다.

마음을 빼앗긴 대가란 이토록 잔혹했다.

“다음에 교수님 만나면 졸라 볼까 봐. 문서윤 나 주라고.”

서너 살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말장난 같았다. 헛소리하지 말란 의미로 인상을 찌푸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김현승이었다.

- 문! 어디야?

“기숙사.”

- 나 방금 오티 끝났는데 밥이나 같이 먹자고.

“어, 그래. 나 지금 연재랑 같이 있는데 셋이 먹으면 되겠다.”

- 우연재랑 기숙사에 있다고?

힐긋 쳐다보자 우연재가 몸을 일으켰다. 목소리가 워낙 커 김현승의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기숙사 궁금하다고 해서 잠깐 왔어. 지금 나갈게.”

- 오, 나도 궁금한데 구경시켜 주면 안 돼?

“안 돼.”

우연재가 단칼에 말을 잘랐다. 갑작스레 핸드폰을 빼앗긴 문서윤은 뭐 하냐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유려한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 우연재는 꺼지시고요.

“문서윤 룸메 들어왔어.”

룸메라는 단어에 문서윤은 바깥쪽으로 고개를 뺐다.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는커녕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뻔뻔한 거짓말이 나긋한 입술 사이로 잘도 흘러나왔다.

- 엥. 진짜임?

“지금 나갈게.”

산뜻하게 대답한 우연재가 핸드폰을 건넸다. 언제 끊었는지 통화 화면이 종료된 채였다. 엉겁결에 핸드폰을 받아 든 문서윤은 다시 걸려 오지 않는 전화를 확인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기다리려는지 우연재는 먼저 나가지 않고 신발장에 멀뚱히 서 있었다. 혼자 있을 때는 몰랐는데, 확실히 성인 남자 두 명이 있어서일까, 구석에 서 있는데도 방이 꽉 차 보였다.

“왜 거짓말해? 진짜 사람 온 줄 알았잖아.”

“김현승 오면 정리한 거 무용지물 될 텐데.”

우연재가 침대를 향해 턱짓했다. 신발을 신던 문서윤은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김현승이 왔으면 지금쯤 잘 정돈된 이불이 바닥을 걸레질하고 있을 것 같기는 했다. 주인 없이 캐리어만 덜렁 올라간 침대 위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을지도 몰랐고.

“그건 그렇지.”

신발을 마저 신고 뒤를 돈 순간 문서윤은 움직이지 못하고 멈칫했다. 우연재가 좁디좁은 신발장에서 나가지 않고 서 있는 바람에 함부로 걸음을 내딛기가 어려웠다. 네 개의 발이 자그마한 직사각형에 갇혀 거리가 지나칠 정도로 가까웠다.

문서윤은 저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서인지 우연재의 얼굴이 아닌, 너른 어깨가 시야에 들어왔다. 타고난 골격 덕에 굳이 전신을 훑어 내리지 않아도 몸이 탄탄하다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맨몸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르기만 한 저와 달리 골격에 맞게 꽉 짜여 있던 근육이 떠올라 뺨으로 열이 오를 것만 같았다.

“그리고 서윤아.”

머리 위로 이름이 떨어져 내렸다. 문서윤은 그제야 파드득 떨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둥글게 휘어졌다.

“방에 다른 사람 함부로 들이는 거 아니야.”

“휴. 오랜만에 학교 다니려니까 죽겠다.”

김현승이 모자를 벗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개강 주라 시간이 여유로워 학교에서 약간 떨어진 곳까지 점심을 먹으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너네 어떻게 같이 있냐? 역시 경영은 월요일 1교시부터 전공 수업인가.”

“같은 전공 들으니까.”

천연덕스러운 우연재의 대답에 김현승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야, 우. 너 지금 3학년 아냐? 문서윤 군대 가자마자 1년 통으로 휴학했고……. 작년에 2학년이었으니까 3학년 맞네. 근데 어떻게 같은 전공 듣지? 경영은 전공 미리 안 들으면 존나 힘들지 않냐?”

“2학년 전공 몇 개 드랍했대.”

문서윤은 불과 두 시간 전에야 알게 된 사실을 툭 내뱉었다.

“엥? 미친놈인가? 설마 문서윤이랑 같이 들으려고?”

“전부는 아니고.”

김현승의 거침없는 비난에도 우연재는 별것 아니라는 양 느긋하게 굴었다.

“선수 과목은 들었어. 전필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새끼 진짜 개또라이네. 그럼 문이랑 몇 개 같이 듣는데?”

“세 개였나…….”

“9학점? 미친. 사서 고생을 하시네요.”

“문서윤 없어서 학교 재미없는 걸 어떡해.”

완전히 질린다는 표정을 지은 김현승은 이내 측은해하는 얼굴로 문서윤을 쳐다봤다.

“너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런 거머리 새끼 소꿉친구가 된 거냐.”

“그러게. 우리 서윤이는 무슨 죄를 지어서 옆에 김현승을 달고 있지.”

“뭐래. 문이랑 친해진 거 너 때문이잖아.”

문서윤은 두 사람의 유치한 말장난을 내버려 둔 채 음식을 가져다준 직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곧 앞으로 초밥이 놓였다. 까다로운 우연재의 취향을 맞춘 식당답게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야, 근데 경영 팀플 많지 않냐? 우연재 있으면 좀 편하긴 하겠다. 조원 구하는 것도 일이잖아. 특히 복학생 별로 안 좋아할 텐데.”

김현승이 팔을 툭 치자 문서윤은 고개만 끄덕였다. 초밥이 입 안을 가득 채운 상태라 대답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나저나 쟤야 작년에 학교 다녔으니까 상관없고. 문서윤 넌 괜찮냐? 나야 공대니까 남자들 드글드글해서 복학해도 딱히 크게 달라진 거 모르겠는데 너네 과는 아니잖아.”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문서윤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2년 만에 누리는 대학 생활이라 낯선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안 괜찮을 만한 일이 도대체 뭐가 있지, 의문이 들었다. 게다가 반년 정도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회생활을 한 덕분에 적응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와, 문……. 넌 잘난 남자를 향한 남자들의 질투를 모르는구나.”

김현승이 크,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본인은 아주 잘 느끼고 있다는 어조였다. 뭐라는 거야. 객관적으로 잘생긴 편이라 반박할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친한 친구가 저러고 있으니 입맛이 떨어졌다.

문서윤은 자연스레 김현승을 무시하며 초밥을 먹었다. 고기보다는 해물을 좋아하는 편이라 입에 잘 맞았다.

“문서윤 쳐다보는 후배들 존나 많더라.”

우연재가 대신해서 말을 받았다. 희한한 소리에 문서윤은 재차 인상을 찌푸렸다.

“너 쳐다보는 거겠지.”

잘 모르는 사이 같은데 우연재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에게 쉽게 곁을 내주는 편은 아니었으나, 화려한 외모와 달리 말투가 워낙 나긋한 데다 성격 역시 유들유들하게 좋아 보여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작년에도 학교를 다녀서인지 알은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훔쳐보듯 힐긋거리는 시선도 섞여 있었다.

“우리 문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어요.”

김현승이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너 이번에 개총 가지? 조심해라.”

의미를 알 수 없는 조언까지 덧붙였다.

“뭘 조심해?”

“야. 1학년 때야 뭘 모르는 애기들이니까 그냥 넘어가지, 복학한 다음부터는 아니라니까? 분명 너 기죽이려고 하는 새끼들 나타날걸.”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 많네.”

문서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밥이나 먹으라는 의미로 김현승을 타박했다. 우연재라면 또 모를까 저한테 그런 일이 일어날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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