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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샤워 (10)화 (10/139)

10화

“아니, 야…….”

“그럼 오신다고 혜미 언니한테 전해 둘게요. 아! 선배님, 혹시 괜찮으시면 제 번호 저장해 주실 수 있으세요?”

문서윤은 엉겁결에 서지은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제가 선배님 번호 갖고 있기는 한데 혹시 몰라서요. 나중에라도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오늘 개총 시간이랑 장소는 단톡에 올려 둘게요.”

“고마워.”

“그럼 이따 봬요.”

서지은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라졌다. 개강 첫날답게 벌써부터 정신이 사나웠다. 문서윤은 우연재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뭐야.”

“뭐가?”

“개총 간다고?”

“왜. 나 창피해?”

우연재가 눈썹꼬리를 떨어트리며 처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창피야. 그게 아니라 너 사람 많은 거 싫어하잖아. 특히 그런 술자리 영양가 없고 시끄러워서 싫다며.”

문서윤은 목소리를 죽였다. 우연재 때문인지 이쪽을 힐긋거리는 사람이 많아 조용히 말해야 했다.

“작년에도 개총은 갔어. 그리고…….”

언제 불쌍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우연재가 눈매를 달싹였다.

“나 없으면 문서윤 심심하잖아.”

“……안 심심해.”

“술 주는 거 거절 못 할 거 뻔하고.”

할 말이 없어져 문서윤은 괜히 제 뺨을 문질렀다. 우연재가 저를 너무 잘 알아서 곤란할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한층 활기찬 공기가 주변을 맴돌았다. 2학기도 아니고, 막 입학한 신입생들이 곳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그런 모양이었다. 문서윤은 조잘조잘 떠드는 무리를 지나치며 시간표를 확인했다. 개강 주답게 시간이 붕 떠 버린 상태였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옆에서 불쑥 고개를 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한 발자국 물러서려던 그는 가까스로 어깨에 힘을 실어 몸을 고정시켰다. 목부터 다리까지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놀란 거 티 나지는 않았겠지. 슬쩍 눈길을 내리고 나서야 우연재가 왜 제게 고개를 기울였는지 알 수 있었다. 핸드폰 화면에 뜬 제 시간표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5교시까지 공강이네. 뭐 할까?”

하루 종일 저와 있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별 의미 없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가락 끝이 간질거렸다. 문서윤은 약간의 고민 끝에야 입을 열었다.

“……여자 친구랑 안 놀아?”

“선주?”

입을 연 게 무색하게도, 곧바로 입술 안쪽을 짓씹게 됐다. 여자 친구의 존재를 입에 담은 이유도, 심지어 제가 말을 꺼내 놓고 속상함을 느끼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여자 친구가 화두에 올라서인지 우연재가 살포시 눈썹을 찌푸리며 입매를 비틀었다.

“왜 갑자기 선주 얘기를 꺼내지? 문서윤 오늘따라 존나 이상하네? 애인 생기면 나랑 안 놀 거야?”

애인. 나. 가슴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문서윤은 손톱 아래의 여린 살을 꾹 짓눌렀다. 언제 간질거렸냐는 듯 손끝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애인과 저를 분리하는 말에 상처를 입는 마음이 우스웠다. 고백할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꼴불견이었다.

“애인이랑 친구는…… 별개지.”

문서윤은 간신히 단어들을 이어 붙였다.

“응. 별개지. 그러니까 오늘은 애인 말고 친구랑 놀겠다고.”

애인 말고 친구. 이게 우연재가 정의 내리는 관계였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문서윤은 티 나지 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알았어. 어디 갈래?”

그러고는 가벼운 어조와 함께 가까스로 들이마신 숨을 내뱉었다. 주제 파악을 해야 할 때였다.

이렇게 데려와도 되는 건가. 문서윤은 룸메이트의 부재로 바꾸지 못한 비밀번호를 누르며 고민했다. 곧 삐리릭 소리를 내며 도어록이 열렸다. 신발장은 처음 나갈 때와 다를 바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아직도 안 오셨구나.’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얼굴도 보지 못한 룸메이트가 덜컥 친구를 데리고 오면 그쪽도 당황스러울 테다. 문서윤은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들어와.”

기숙사를 구경시켜 달라는 조름 아닌 조름에 우연재를 데리고 온 참이었다. 왜 기숙사에서 사냐며 싸늘하게 반응할 때는 언제고, 기숙사에 사는 친구는 제가 처음이라 내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문서윤 자신에게 있었다. 기숙사치고는 넓은 편이어도 기껏해야 원룸만 한 크기였다. 그래서인지 우연재의 존재가 지나치게 거대하게 느껴졌다.

어색하게 가방을 내려 두고 뒤를 돌아본 순간, 문서윤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우연재가 갑자기 멈춰 선 바람에 하마터면 정면으로 부딪힐 뻔했다. 놀란 마음을 쓸어내린 그와 달리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우연재는 천천히 시선을 떨어트렸다.

“신기하네.”

“뭐가.”

문서윤은 약간 거리를 벌리며 물었다. 우연재의 입술이 느지막이 열린 것과 동시였다.

“들어오니까 문서윤 냄새 나네?”

냄새라는 말에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소매에 코를 묻었다. 냄새날 게 뭐가 있지? 향수를 썼다면 향수 냄새겠거니 했겠지만, 그는 향수를 자주 사용하는 편이 아니었다. 선물받은 게 몇 개 있긴 해도 1년에 두세 번 뿌릴까 말까였고, 그마저도 전부 본가에 두고 온 참이었다. 빨래 자주 하는데……. 신축 건물이니 건물에 밴 냄새도 아닐 터였다.

“무슨 냄새?”

소매에서는 은은한 섬유 유연제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혹시 담배 냄새가 나나 싶어 문서윤은 티 나지 않게 우연재의 눈치를 살폈다. 군대에서 담배를 배운 걸 알게 되면 난리를 칠 게 눈에 훤했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일주일에 한두 개비 피우는 게 전부였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우연재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지레 찔려 소매를 킁킁대는 게 웃겼던지 우연재가 가늘게 웃으며 거리를 좁혔다. 아무렇지 않게 문서윤의 허리에 팔을 두른 그는 옷 위로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내렸다. 간신히 거리를 벌린 누군가의 노력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 냄새.”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숨소리에 문서윤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워낙 어릴 때부터 알아 와서인지 우연재는 툭하면 지금처럼 사람을 끌어안고는 했다. 문서윤 역시 익숙하다는 듯 얌전히 안겨 있던 과거가 있는지라, 이제 와 기겁하며 밀어내기도 뭣했다. 새삼스러운 의식이 수상해 보일 것이다.

물론 짝사랑을 자각한 뒤로는 포옹 같은 사소한 스킨십도 조심하는 편이었다. 다만 미묘하게 두는 거리를 우연재는 타인의 시선 때문이라고 지레 결론 내린 듯했다. 둘만 있는 공간에서는 어릴 때처럼 서슴없이 몸을 붙여 와 지금처럼 종종 저를 곤란하게 만들고는 했다.

문서윤은 슬쩍 우연재를 밀어냈다. 이 정도는 과민 반응처럼 보이지 않을 테다.

“섬유 유연제 냄새라고 하면 되지 갑자기 냄새난다고 하길래 깜짝 놀랐네.”

아직 날씨가 추워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반팔 같은 얇은 옷을 걸쳤다면 시뻘겋게 물든 피부를 그대로 들켰을지도 몰랐다.

“딱히 섬유 유연제 말한 건 아니었는데.”

자연스레 물러난 우연재는 방을 한 번 더 둘러보더니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서윤은 숨결이 닿았던 피부를 쓸어내리며 우연재를 따라 발을 내디뎠다. 목덜미는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과 달리 열이 오른 것처럼 뜨거웠다.

“화장실 반대 방향이야.”

“알아. 살 만한가 보게.”

욕실까지 확인하는 모습이 꼭 자식을 멀리 보내는 학부모 같았다. 어쩐지 긴장이 풀려 문서윤은 픽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아빠야 뭐야.”

“문 교수님 자리 뺏을까?”

능청맞은 대꾸와 함께 우연재는 욕실까지 꼼꼼하게 훑은 뒤에야 방으로 돌아왔다. 길게 그어진 시선이 침대 위의 검은색 캐리어로 향했다.

“룸메는.”

짧은 물음에도 언짢은 기색이 묻어 나왔다. 문서윤은 바닥이 아닌 침대에 올려 둔 캐리어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며 제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외출복 상태인 우연재가 침대에 앉을 리는 없어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향해 눈짓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 얼굴 못 봤어.”

침대 쪽으로 의자 방향을 틀어 앉은 우연재가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인상이 살짝 바뀐 것뿐인데도 언짢은 기색이 배로 느껴졌다.

“이상한 새끼 아니야?”

“주아가 오티 주 끝나서 들어오는 사람도 꽤 많대.”

“주아? 아, 그 카페 알바 같이하는 걔.”

건성으로 대꾸한 우연재는 책상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었다. 텅 빈 침대 위의 캐리어를 힐긋 쳐다보던 시선이 곧 제자리를 찾았다. 긴 눈꼬리가 찌푸려지듯 미세하게 접힌 것과 동시였다.

“좆같은 새끼면 나한테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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