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집으로 돌아온 그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욕실로 향했다. 씻지 않고 잤더니 몸이 영 찝찝했다.
샤워기를 틀어 놓고 그 아래에 서자 물이 피부에 닿으며 따끔한 통증이 스며들었다. 문서윤은 통증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귀걸이에 찔려 발갛게 변한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상처가 난 살 주변을 꾸욱 누르자 통증이 더해졌다. 같은 곳을 매만지던 우연재의 손톱이 떠오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손가락을 아무렇지 않게 머금던 입술과 살결을 빨아 들이던 혀가 그 뒤를 따라왔다.
뜨겁고 축축하고 물컹물컹했다.
“하…….”
눈을 감은 문서윤은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곧이어 나지막한 신음이 욕실 안을 울렸다. 미미한 성감 속에서 비구름 같은 자괴감이 불쑥 차올랐다.
* * *
“오빠. 오빠 친구 왔어요.”
“내 친구? 누구? ……저번에 걔?”
송주아가 비품실 안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말을 걸어왔다. 문서윤은 티 나지 않게 눈썹 앞머리를 찌푸렸다. 우연재가 아르바이트가 끝날 시간에 맞춰 드문드문 찾아온 것도 벌써 몇 번째였다.
“네. 근데 저 사람 우연재 아니에요?”
“어떻게 알았어?”
갑자기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문서윤은 일회용 빨대를 품에 잔뜩 안은 채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던지, 송주아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팔을 툭 건드렸다.
“뭐야. 우리 학교에 우연재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물론 있긴 하겠지만. 커뮤니티 단골이잖아요, 저 사람.”
“아, 유명한가 보네.”
당사자가 있는 홀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어 두 사람은 비품실에서 짧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오빠. 잘생긴 남자는 원래 유명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에요. 예쁜 여자는 많아도 잘생긴 남자는 별로 없다니까? 그리고 무슨 남 말 하듯이 얘기해요. 오빠도 군대 가기 전에 유명했다면서요.”
내가? 문서윤은 이번에는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연예인도 아닌데 유명하고 말고 할 게 또 뭐가 있지.
“처음 듣는 소린데. 내가 왜 유명해?”
“커뮤니티 안 해요? 우리 카페 손님 많아진 것도 오빠 때문인데. 오빠 중딩 때 피아노도 쳤다면서요.”
“그런 얘기도 해? 커뮤니티 있는 건 아는데 해 본 적은 없어서……. 다른 사람 얘기 많이 하는구나.”
제 과거까지 줄줄 딸려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가까운 사람이 퍼뜨린 이야기는 아닐 테고, 아무래도 동창들의 입을 통해 커뮤니티에까지 퍼진 듯했다. 피아노에 딱히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건 아니라 남들이 알아도 상관없긴 했지만, 별 정보가 다 떠도는구나 싶어 새삼스레 신기했다.
“하긴, 오빠는 그런 거 관심 없게 생겼어요. 그래도 유명한 건 알 줄 알았는데.”
“아니, 유명할 이유가 없다니까.”
송주아는 농담을 다 듣겠다는 듯 옅게 웃는 남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예쁘다는 얘기 엄청 많이 들어 봤을 것 같은데. 은근히 무던한 면이 있어 아무래도 흘려듣는 모양이었다.
실례가 될 수 있어 면전에서 외모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어도 문서윤은 누가 봐도 미인이었다. 하얀 피부에 짙은 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선이 둥근 눈매와 곡선을 그리는 콧대가 단정한 분위기와 어우러지며 차분한 느낌을 선사했다. 오죽했으면 피아노를 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그럴 것 같았어, 하는 혼잣말이 절로 튀어나왔을까. 선한 듯 깨끗한 분위기가 제법 잘 어울렸다.
저에 대한 평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문서윤이 나가자는 듯 비품실 바깥을 향해 고갯짓했다. 송주아는 곧장 등을 돌리는 대신 문서윤의 품에 가득 안긴 빨대를 빼앗았다.
“왜?”
문서윤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마무리할게요. 저번에 오빠가 마무리했잖아요.”
“같이해도 돼.”
“친구 기다리잖아요.”
쏙 빠져나간 송주아가 ‘서윤 오빠 곧 나올 거예요.’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같이해도 되는데.”
비품실 문을 멀거니 쳐다보던 문서윤은 결국 앞치마를 정리하며 코트를 챙겨 들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이 빨라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우연재를 보는 게 부담스러운 한편, 좋았다. 엄밀히 말하면 부담보다 설레는 감정이 훨씬 컸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죄책감마저 집어삼킬 정도로 무거운 무게를 띠고는 했다.
혹시라도 눈에 띄게 좋아하는 티가 날까 표정을 가다듬은 그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비품실 밖으로 나섰다. 쇼케이스를 들여다보던 우연재가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문서윤.”
문서윤은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우연재가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를 때면 버릇처럼 하는 행동이었다. 저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라도 욱여넣어야 했다.
“왜 자꾸 찾아와?”
“누가 안 만나 주니까 할 일 없는 사람이 와야지.”
우연재가 당연하다는 듯 어깨에 팔을 둘렀다. 문서윤은 송주아에게 인사하기 위해 비스듬히 몸을 틀며 은근슬쩍 거리를 뒀다. 혹여나 심장 뛰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걱정이 밀려와 버릇처럼 움직인 것에 가까웠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한 조바심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주아야, 먼저 갈게. 고마워.”
“아니에요. 잘 가요. 그리고 케이크 잘 먹겠습니다, 선배님!”
“응. 안녕.”
우연재는 송주아를 향해 손을 흔들며 뻔뻔하게 대답을 가로챘다. 가볍게 흔들리던 손이 자연스레 문서윤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주말 지나고 봐.”
문서윤은 재차 뒤를 돌아보며 송주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쯤은 우연재에게 끌려가다시피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갔다. 곧 3월인데도 날씨는 도무지 따뜻해질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케이크 사 줬어?”
코를 훌쩍인 문서윤은 우연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너 빨리 보내 주길래 뇌물.”
“무슨 또 뇌물이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굴자 우연재가 키득거리더니 차를 향해 까딱 고갯짓했다.
“뭐 먹을래.”
“아니, 왜 자꾸 뭐 먹이려고 해? 이 시간에 먹는 거 부담스럽다니까.”
“살 빠졌길래. 말했잖아, 2년 동안 못 먹인 거 먹인다니까.”
살이 빠졌다는 말에 문서윤은 반사적으로 제 몸을 내려다봤다. 군대에서 몸무게를 잰 이후 따로 재 본 적이 없으니 살이 빠졌는지 쪘는지 확인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래도 우연재가 빠졌다면 빠졌을 것이다. 눈썰미 하나는 기가 막혔다.
‘신경 써 본 적 없긴 한데……. 빠질 만했지.’
문서윤은 스트레스에 취약한 편이었다. 신경 쓰는 일이 생기면 곧장 그 여파가 몸으로 나타나곤 했는데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가 체중 감소였다.
“겨울옷 입었는데 용케 알아보네.”
여름에야 맨살을 드러내니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다 알아보겠지만, 봄의 초입에 들어선 시기였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데도 알아챈 게 그저 신기했다.
“안아 보면 알아.”
“뭔 헛소리야.”
“진짠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위해 콧잔등을 찌푸린 채 쳐다보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크게 손을 흔들었다. 우연재의 어깨 너머였다.
시선이 비껴간 걸 눈치챘는지 우연재가 그 방향을 향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무우운! 어, 뭐야. 우연재 새끼 아냐?”
발음이 어찌나 또렷한지 제법 먼 거리인데도 새끼라는 단어가 귓가에 곧바로 내리꽂혔다.
“김현승이네.”
우연재가 평온하게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금방이라도 차에 타려는 사람처럼 문에 손을 가져다 대자 상대가 미친 속도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몸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멈춰 선 김현승이 우연재의 등을 팡팡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야, 우연재!”
“우연재 새끼가 아니라?”
“뭐야. 들었어?”
낄낄거린 그가 번갈아 시선을 보내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어색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 가냐 너네끼리?”
“문서윤 뭐 먹이러.”
“와, 이 새끼 존나 섭섭하게 구네. 내 입은?”
어쩐지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라 문서윤은 피식하고 웃었다.
“아직 뭐 먹을지 안 정했는데……. 같이 갈래?”
“아, 우리 현승이한테는 물도 사 주기 싫은데.”
“뭐? 맛있는 거 사 준다고? 고맙다.”
다시금 우연재의 등을 툭 친 김현승이 잽싸게 뒷좌석에 올라탔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차 안을 쳐다보던 우연재는 이내 문서윤에게로 시선을 끌어 올렸다. 서운하다는 듯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내 친구는 눈치도 없지.”
“뭐가.”
“데이트하는데 다른 사람 끼우면 어떡해.”
“여자 친구도 있으면서 무슨 나랑 데이트야.”
“친한 사람 둘이서 만나는 것도 데이트인데?”
뻔뻔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그런 말 좀 하지 말라며 타박하면 과민 반응처럼 보일 것 같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는데 우연재가 타라는 듯 재차 차를 향해 까딱, 고갯짓했다. 문서윤은 그제야 천천히 차에 올라탔다.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법한 언행이 우연재의 말버릇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뭐야. 둘이 무슨 얘기 했냐? 바로 차 안 타고.”
“누가 데이트 방해한다고.”
“현승이도 데이트 끼워 주세요.”
뒤에 앉은 김현승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꽃받침을 해 보였다. 짝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괜히 여자 친구 운운한 것 같아 멋쩍어졌다.
혹시라도 티가 났을까 걱정돼 문서윤은 김현승의 모자챙을 뒤로 젖히며 장난을 걸었다. 다음부터는 나도 이런 식으로 반응해야겠다, 다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