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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갑자기 그런 편지를 남겨두었을까. 생각해보면 짐작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자신이 사고를 당해 잠깐 기억을 잃었던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생각이 복잡해졌겠지.
놀라기도 했겠지만 그보다 완전히 남처럼 변해버린 자신을 보며 수경이 본인의 일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다른 사람이 아닌 진짜 권이강이냐고 몇 번이나 묻기도 했었다.
원래의 성격이 개 같은 놈이었다고, 사실 예전 성격만 그런 게 아니라 지금도 여전하다고, 네게만 다정한 거라고. 속 시원하게 밝힐 수 없어서 얼버무리고 넘어간 일이 수경의 불안감을 더 키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항상 그런 생각으로, 그런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차수경에게 좋지 않은데. 자신이 언제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산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은 평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하다고, 그런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을 해봤자 그것은 차수경을, 아니, 차수경 속에 있는 민재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발언이나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역효과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이강이 손으로 거칠해진 얼굴을 문질렀다.
“……이사님.”
“아, 최 비서. 잠깐 딴생각을 했네요. 미안합니다.”
언제부터 들어와서 기다렸는지 책상 너머에 서 있던 최 비서가 이강을 넌지시 불렀다.
“아닙니다. 것보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결재할 서류를 넘겨주며 최 비서가 물었다. 아침 출근길부터 좋지 않던 이강의 표정에 내심 신경을 쓰고 있던 그는 출근 후에도 계속해서 딴생각에 빠져있는 이강의 상태에 우려를 표했다.
“수경이가…….”
“사모님께 무슨 일이라도?”
“……아니, 아닙니다.”
뭔가 말을 하려다 우물거리며 고개를 내젓는 이강을 보며 최 비서가 속으로 혀를 찼다.
권이강을 저리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이는 세상천지에 딱 한 사람뿐인데. 분명 권이강과 그의 오메가 사이에 무슨 일이 있구나, 이 상황은 절대 오래 지속되면 안 될 상황이구나. 강한 예감이 들었다.
“병원 건은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은행 쪽에서 꾸준하게 압력을 넣고 있습니다. 저번 식사 자리에서 감명이라도 받았는지 움직임이 아주 좋습니다.”
그 식사에 자리했던 또 한 사람에게는 그리 좋지 못한 경험이었는지 권이강의 미간에 금이 갔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이강이 찌푸린 미간을 문질렀다.
“돈 나올 구멍은 재단뿐이니, 타깃을 재단으로 잡으세요. 가지고 있는 자료 다 뿌리고, 조사도 들어가게 하고. 감사도 넣을 수 있으면 넣읍시다.”
“너무 과하게 쑤시면 너덜너덜해집니다. 그럼 먹을 때 배가 안 차실 텐데요.”
“먹을지 말지는 고민 중입니다.”
그걸 대체 왜 고민해. 먹을지 말지도 모르는 병원을 들쑤시느라 뺑이치는 자신의 고생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최 비서가 터지는 울분을 애써 삼키며 어렵사리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버릴 생각도 하십니까? 사모님이 서운해하지 않으실까요.”
사실 이것도 조금 이상한 물음이긴 하지.
반대하는 결혼을 밀어붙였을 정도로 사모님과 친정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대뜸 친정 가업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시점에서 짐 싸고 도망갈 타이밍이 아닌가.
최대한 좋게 생각해서 그 병원을 가져와 와이프에게 포장해 선물할 예정이라면 어떻게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아예 망가뜨리고 버리겠다니. 누구 좋으라는 결말인지 최 비서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운해한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친정 집안을 아예 부숴버리겠다고 하는데 서운해하지는 않겠지. 원망하고 저주하고 미워서 치를 떨지 않을까. 묘하게 자신만만한 이강의 얼굴을 보며 최 비서는 대체 저 자신감의 원천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병원을 밀어버린다고 해도 잘했다고 할 거고, 병원을 먹었다고 해도 좋다고 할 겁니다.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신경 안 쓰고 내버려 둬도 괜찮다고 할 사람이죠.”
“아, 예.”
그러니까 결국엔 권이강이 뭘 하든 차수경은 좋다, 괜찮다, 편을 들어줄 거라는 말이었다. 최 비서의 생각을 증명하듯 권이강이 마지막 말로 쐐기를 박았다.
“뭘 하든 내 편을 들어줄 내 사람이니까요.”
둘이 참 잘 만났다. 다른 사람과 이어졌다면 시끄러워질 문제가 한두 개는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둘이 찰떡같이 만나서 세상이 한결 평화로워졌다.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걸 천운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아예 병원이 망하는 것보다는 남겨두는 게 낫지 않겠습니다. 사모님이 가업을 이어받을 마음이 있으실 수도…….”
“망하는 쪽을 더 좋아할 겁니다. 아예 싹 밀어버리고 그 땅만 주면 더 좋아할……. 생각해보니 이것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수경이가 부동산도 좋아하니까.”
“…….”
최 비서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부였다.
“지금은 일단 최대한 밀어붙입시다. 먹든 버리든, 무너뜨리고 나서 생각해볼 문제니까. 이게 이렇게 질질 끌 문제는 아닌데……. 그동안 돈 처먹은 인간들은 밥값 좀 하라고 해요. 모자란다고 하면 더 먹이고. 토할 정도로 먹이세요. 돈 쌓아두고 뭐 할 겁니까.”
이어지는 목소리에 설핏 짜증이 섞였다.
역시 권이강을 괴롭히는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차수경과 관련된 어떠한 문제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만사가 짜증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하든 듣는 척을 하는 게 중요했다.
“수경이 아버님이 아직도 이혼 서류에 도장을 못 받으신 것 같은데. 겸사겸사 그것도 정리해드리면 좋겠고. 수경이와 가끔 연락하는 모양이던데, 이럴 때 도움을 줘야 예쁜 소리라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쪽으로도 연락 넣겠습니다.”
생색이 나지 않는 일만 산더미다. 비서 일이 그렇다지만, 그래도 결과물이 남아야 보람이라도 찾을 게 아닌가.
나직하게 한숨을 흘려보낸 최 비서가 이사실을 나가려다 생각난 것에 몸을 돌렸다.
“참, 저녁 식사 예약은 해두었습니다.”
“그래요?”
“네. ……사모님 기분이 안 좋으신 거라면, 꽃다발이라도 준비하는 것이 어떠십니까.”
권이강이 나쁜 상사는 아니다.
화풀이를 하거나, 폭력을 쓴다거나, 책임 전가, 희롱 등의 망종 같은 짓을 하지도 않는다. 다만 직장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상사의 컨디션이 나쁘면 아랫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눈치를 보게 된다.
말 한마디 내뱉지 않아도 온몸으로 뿜어져 나오는 흉포한 기세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한 채 눈치만 보는 상황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았다.
“수경이는 꽃 같은 거 안 좋아합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지만 또 막상 받으면 좋아하더군요.”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오늘 저녁 식사를 만족스럽게 끝내고 내일 아침 출근할 때는 기분 좋은 상태가 되어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 비서가 열정적으로 어필했다.
“그거 최 비서 경험담입니까?”
“뭐, 그렇죠.”
멋쩍게 웃으면서도 최 비서는 ‘그래서 꽃다발 오케이?’ 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꽃다발이라.”
낮게 중얼거리며 이강이 엄지로 턱을 꾹꾹 눌렀다.
사람은 말과 행동이 다르다지만, 적어도 차수경은 좋으면 좋다고 말을 한다. 금 두꺼비를 줬을 때 얼마나 좋아했던가. 반대로 두어 번 꽃을 선물한 적이 있지만, 먹지도 못하고 쓸모도 없다며 매번 시큰둥했다. 이 정도면 확실히 안 좋아하는 거다.
“일반적인 꽃다발 말고, 돈 꽃다발은 어떻습니까.”
돈 꽃다발? 돈을 접어서 꽃을 만드는 건가. 생경한 단어에 컴퓨터로 검색을 해본 이강이 모니터에 나타난 관련 이미지를 보며 미간을 모았다.
“효도 꽃다발이라고 나오는데…….”
“어버이날 많이 드리긴 하지만, 돈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물며 연애할 때 금 두꺼비를 선물 받고 좋아했다던 사모님이 아닌가.
금 두꺼비를 선물하겠다는 이강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극구 만류한 사람이 최 비서였다. 그 결과가 최 비서의 예상과 다르게 너무나도 좋았다며, 권이강이 뻐기듯 자랑했던 것을 떠올렸다.
일반적이지 않은 커플이다. 일반적인 방법을 대응시켜서는 절대 안 되지.
현금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 그 과정에서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것.
최 비서는 차수경의 취향을 단번에 파악했다.
“음……, 나쁘지 않네요. 퇴근 전까지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알아보고 제작 주문 넣겠습니다.”
“백 송이 정도면 좋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뭔가 한 건 해냈다는 얼굴로 뿌듯하게 사무실을 나가는 최 비서의 등을 바라보며 이강이 모니터 위에 뜬 꽃다발 사진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 정도면 별로라는 소리는 듣지 않겠네.
돈으로 별짓을 다 한다며 혀를 차면서도, 수경이 이 꽃다발을 받고 평소처럼 시큰둥해할 수 있을까 유쾌한 상상에 젖어들었다.
∞ ∞ ∞
“미안, 좀 늦었어.”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정도 늦게 도착한 수경이 급하게 룸 안으로 들어오며 사과했다.
“좀 늦어도 괜찮다. 괜히 서두른다고 속도 높이다가 사고 나는 것보다 낫지.”
“나오려는데 갑자기 용희가 막 울잖아. 어디 아픈 거 아닌가 좀 지켜보느라.”
“아파?”
“아니. 배고팠었나 보더라.”
별일 아니었다며 어깨를 으쓱인 수경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늦을까 봐 마음을 졸였는지 물 한 컵을 순식간에 비우고 크게 숨을 내쉰다.
“너 외출하는 거 알고 투정부렸나 보다.”
“단순히 그런 거면 다행이고. 아무리 데이트라지만, 그래도 아픈 것보다는 눈치 없이 우는 쪽이 낫잖아.”
“아빠 다 됐네.”
수경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겉옷을 받아 건 이강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주문은?”
“일행 오면 바로 음식 준비해달라 했으니 곧 나올 거다.”
그리 답하며 이강은 옆에 두었던 꽃다발을 수경에게 내밀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불쑥 튀어나온 꽃다발에 수경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웬 꽃이야?”
주니까 받긴 하지만 딱히 좋진 않고, 이걸 왜 주나 싶은 얼굴이다. 심드렁한 표정에 웃음을 참으며 꽃을 감싸고 있는 종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펴봐.”
“왜? 포장한 건데 그냥 두지.”
“찢어지지 않게 하나만 펴봐.”
“별걸 다 시키네.”
투덜거리면서도 수경은 꽃다발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꽃송이를 감싸고 있는 종이를 조심조심 뜯어냈다. 둥글게 말려있던 종이가 펴지며 그 안에 적힌 것을 본 수경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거 진짜 돈이야?”
“그래.”
“이거 전부?”
“어.”
“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만 벌리고 있던 수경이 꽃다발을 한 번, 권이강을 한 번,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러면 안 좋아할 수가 없는데?”
“좋아해달라고 주는 선물인데, 당연히 좋아해야지.”
“이거 몇 송이야?”
“백 송이.”
“백 송이 전부 백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