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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은 무슨 이야기야.”
“무슨 도자기 공예 자격증이 있나 봐. 선생님이 요즘 돈벌이가 안 되나, 나한테까지 영업을 하시더라고.”
“네가 그만큼 잘하니 그렇지.”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족속이라더니, 권이강이 딱 그랬다. 등에 바짝 붙어 어깨와 목덜미를 꾹꾹 누르는 입술이 간지러워 몸을 움츠렸다.
“하지 마, 힘들어.”
그냥 앉아있기도 힘든데 등짝에 커다란 짐을 지고 있는 기분이다. 갈비뼈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배에도 짐이 있는데 등에도 짐을 짊어진 기분은 정말 최악이다.
“그만하고 일어나자.”
권이강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차피 첫날이라 제대로 된 모양은 나오지도 않을 것 같고, 허리도 끊어질 것처럼 아프니 그만할까. 갈대 같은 마음이 달콤한 속삭임에 흔들렸다.
“안 돼. 만들던 건 끝내야지.”
나 그렇게 의지 약한 사람 아니야.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등 뒤에 찰싹 달라붙은 권이강을 떼어내려 몸을 뒤틀었다. 둥근 배를 쓸던 손이 슬금슬금 가슴 위로 올라왔다.
“하지 마.”
“수경아.”
니트 위로 가슴께를 지분거리는 손길에 작게 소리 죽여 칭얼거리자 귓불을 앙앙 짓씹으며 권이강이 내 이름을 불렀다.
“거의 다 했어. 좀만 기다려.”
화병 주둥이만 좁혀서 다듬으면 대충 모양은 나올 것 같은데 문제는 등 뒤에 달라붙어 치근거리는 권이강이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옷 위로 몸을 쓸어올릴 때마다 움칠거려서 금방이라도 모양을 무너뜨릴 것처럼 위태로웠다.
좀 떨어져서 기다려주면 좋으련만 권이강은 반듯하게 소매를 걷어 올린 손을 움직여 물을 적셨다. 뭘 하려고 이러나 싶었는데 화병의 모양을 만들고 있는 내 손 위에 겹치듯 올리고 젖은 흙의 표면을 쓸었다.
“야, 야야…….”
조금만 힘을 주어도 모양이 무너지기에 다급하게 권이강을 불렀지만, 방어하듯 밀어내는 내 손을 붙잡고 그는 간신히 화병의 모습을 찾아가던 흙덩이를 주물럭거렸다.
시간 들여 기벽을 올리고 겨우 모양을 잡고 다듬어서 이제 입구만 좁히면 끝나는 거였는데.
화병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쓰레기를 겹쳐 잡은 손으로 문지르며, 권이강이 목덜미에 입술을 붙인 상태로 뜬금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남의 예술 작품을 쓰레기로 만들어놓은 주제에 뭐가 좋은지 알지도 못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권이강의 손이 마치 애무하듯 내 손등과 팔을 부드럽게 쓸었다. 젖은 흙을 팔등까지 묻히고 마사지하듯 주무르는 손길에 고개를 돌려 권이강을 바라보았다.
낮게 울리듯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요즘 티브이에 나와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 못지않게 감미롭고 달콤했지만, 한낱 쓰레기로 전락해버린 내 작품을 손으로 주물럭거리는 행동은 참고 넘어가줄 수가 없는 행태였다.
“내가…… 좀만 기다리라고 했는데.”
손을 빼내 몸을 뒤로 돌리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권이강의 뺨을 콱 붙잡았다. 흙으로 범벅이 된 손이 철썩, 하고 잘생긴 얼굴에 들러붙었다.
“야, 인마. 남의 예술 작품을 지금 쓰레기로 만들어놓고, 노래가 나오냐!”
뺨이 눌려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얼굴인데도 참 잘생겼다. 젖은 흙을 권이강의 얼굴에 마구 문질러 화풀이를 하며 왈왈거리자, 권이강이 허탈한 얼굴로 웃으면서도 나를 끌어안았다.
“오늘은 집에 가서 저녁 먹고 영화 한 편 보자.”
“뜬금없이.”
“분위기도 뭘 알아야 잡을 수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거든. 오늘 영화 보고, 다음에 다시 시도한다. 그때도 이렇게 산통 깨면 혼나.”
지금 혼날 짓을 한 게 누구인데, 나보고 혼난대. 남의 작품을 아주 뭉개놨는데. 구시렁거리며 달싹대는 입술을 권이강이 부드럽게 머금었다.
“너 얼굴에 흙 묻었어.”
고개를 뒤로 빼 피하며 말하기가 무섭게 권이강이 내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젖은 손이 뺨과 머리까지 감싸 가깝게 끌어당겼다.
“이제 둘 다 더러우니 상관없겠지.”
“오늘따라 참 철없게 구시네요, 권 이사님.”
“서방님이 연애를 몰라도 너무 모르셔서 말입니다.”
장난스럽게 꾹 눌렀다 떨어진 입술이 다시 들러붙었다. 뭉근하게 문질러 비비던 입술이 벌어지고 따스한 숨결이 틈을 메우듯 스몄다. 흙으로 범벅이 된 손으로 권이강의 하얀 셔츠를 부여잡고 코를 울려 웃었다.
“아버님들, 여기까지만 하시죠. 배 속에서 아이가 보고 있답니다. 남의 영업장에서 이러시면 안 되죠.”
참다못해 나왔는지 선생님이 짜게 식은 눈으로 우리를 보며 일침을 가했다. 커흠, 헛기침을 하며 입술을 떼어냈지만 얼굴 두꺼운 권이강은 나를 안은 채 웃기만 했다.
∞ ∞ ∞
“오늘은 늦으시네요.”
공방 한쪽에 마련되어있는 소파에 축 늘어져 앉은 나를 향해 선생님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권이강의 퇴근 시간에 맞출 요량으로 수업은 여섯 시까지였는데, 시간을 맞춘 보람도 없이 권이강은 항상 한 시간에서 삼십 분 정도 일찍 와서 내가 수업받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보죠.”
퇴근 시간이 여섯 시인데 그 전에 제멋대로 퇴근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긴 했지. 모처럼 퇴근 시간까지 버티다가 퇴근을 하나 싶었는데, 벌써 일곱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흙이 묻은 손과 얼굴도 씻었고, 더러워진 작업복을 입고 왔던 옷으로 갈아입기도 했다. 권이강이 오면 바로 공방을 나설 수 있도록 준비를 끝냈는데, 정작 권이강은 언제 온다는 소식조차 없었다.
“전화도 안 받아요?”
“……네.”
“앉아서 기다려요. 먼저 가라거나, 곧 오겠다거나 연락이 오겠죠. 뭐 좀 먹으면서 기다릴까요?”
“네, 먹을래요.”
임신한 뒤 수시로 뭔가를 먹는 습관도 생겼고 저녁 먹을 시간이기도 해서 배 속이 허했다. 사양하지 않고 냉큼 답하자 선생님이 사무실에서 에끌레르와 컵케이크를 가져왔다.
“선물로 들어온 건데, 너무 달아서 몇 개 못 먹겠더라고. 나 커피 한 잔 마실 건데, 수경 씨 우유 줄까요?”
“네.”
본능적으로 움직이려는 손에 꾹 힘을 주어 붙잡고 있자 선생님이 웃으며 손짓을 했다.
“눈치 보지 말고 들어요. 단 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수경 씨가 먹어주지 않으면 버려야 하니까. 어서 먹어요.”
“그럼 사양 안 하고 먹습니다?”
냉큼 손을 뻗어 에끌레르를 입에 넣었다. 빈속에 들어가는 음식물에 입도 배도 기꺼워했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단맛에 그나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배고프면 얘기를 하지. 천천히 먹어요.”
세 개째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나를 보며 선생님이 혀를 찼다. 목이 메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에 우유도 마셨다. 목구멍을 꽉 채우고 있던 음식이 액체와 함께 꿀떡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냥 집에 갈 걸 그랬어요.”
“한 번쯤은 수경 씨가 기다리는 것도 좋지, 뭐. 항상 먼저 와서 기다리셨잖아요. 보는 사람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지극정성인데, 한 번 늦은 거로 그렇게 투덜거리면 안 되죠.”
그렇긴 하지만 연락도 없는 건 너무하잖아.
시무룩한 마음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단 컵케이크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데도 기분은 한없이 추락했다. 조금 전 에끌레르를 처음 입에 넣었을 때의 좋은 기분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니, 그 조금도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보고 싶어요? 내가 솔로였으면 엄청 속 뒤집어졌겠네. 누구는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한 줄 아나. 아주 그냥 둘이서만 절절해.”
“연애도 얼마 못 했고, 결혼한 것도 몇 달 안 되었잖아요. 아직 절절할 때 맞는데.”
“그래요. 세상에 둘만 있는 것처럼 애절하게 연애해요. 즐길 것도 미리미리 즐겨두고. 애 태어나면 지옥이니까.”
선생님이 악담 같은 충고를 했다.
권이강은 건강하게 낳기만 하라고 했는데. 무탈하게 낳기만 하면 나머지는 본인이 다 알아서 하겠다고. 내가 신경 쓰고 피곤할 일은 전혀 없을 거라고.
아이에 관해 모르는 건 나나 권이강이나 비슷하니, 권이강이 아이를 키우겠다는 뜻은 아닐 테고. 육아 전문가를 어디서 초빙이라도 해올 모양이지. 권이강을 한없이 신뢰하고 있는 나로서는 아무런 걱정도 없었다.
“출산일까지 몸조심하고. 아이 낳고 몸조리 잘하고. 그리고 여유 생기면 다시 나와요. 그때는 차근차근 자격증 준비해봐요.”
“선생님, 저 아직 수업 남았어요. 그렇게 아련하게 말씀 안 하셔도 되는데.”
“그래도 다음 주면 끝이잖아요. 아쉬워서 그러지, 아쉬워서.”
배가 불러서 더는 수업을 받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음 주까지만 수업을 받고, 이후로는 집에서 출산일을 기다리며 심신에 여유를 갖기로 했다.
“수업 완전히 끝나기 전에 항아리 하나 만들어야죠.”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제 손에서 예술품 하나 나오는 건 정해진 결과죠.”
“모쪼록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가는 수경 씨도 보람차고, 보내는 나도 보람 있을 테니까.”
아직 안 가는데 자꾸 보내시려고 그런다. 포크로 케이크 조각을 싹싹 긁어 입에 넣으며 자신 있다는 얼굴로 웃었다.
“도련님.”
반쯤 남은 우유를 마시고 있는데 공방 문을 열고 이경진이 들어왔다. 호산 쪽 집에서도 나왔고, 이제는 권이강이 고용하는 건데도 도련님이라 부르는 호칭은 여전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도련님이 아닌 다른 호칭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이경진이 나를 부를 적당한 호칭이 뭘까.
‘사모님’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몸서리치게 싫고, 그렇다고 회장이니 사장이니 부장이니 하는 직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수경 님’은 오버 같고, ‘수경 씨’나 ‘수경아’ 하고 부르는 걸 듣는다면 권이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고.
이경진도 그냥 도련님이 무난하니까 부르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그렇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 기사님, 권이강한테서 연락 없어요? 너무 늦어.”
“지금 연락받았습니다. 출발하셔야겠습니다.”
“내가? 권이강은 여기로 안 온대요?”
권이강이 출발을 한 게 아니라 내가 출발을 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