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바이스-142화 (142/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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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편을 들어줘야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심통이 나서 어깨를 꾹꾹 턱으로 눌러댔다.

“일 아직 안 벌였어. 그냥 살짝 불만 붙이고 온 거야. 일 벌일 사람 따로 있거든!”

적어도 그게 나는 아니거든. 이번에는 내가 일 벌이는 거 아니거든.

억울해서 변명처럼 쏘아붙였지만, 일단 불붙인 게 나라는 점에서 글러 먹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네. 살짝 반성을 했다.

“우리 집에 정말 망조가 든 모양인데, 너희 아버지가 나 더 싫어하시겠다.”

“괜찮아. 너희 집 망조 들면 오히려 좋아하실 거다.”

“……그건 또 그러네.”

서로 앙숙이니까 어느 집구석이든 한쪽이 망해야 시원하게 끝이 나지 않을까. 그것과 별개로 우리 결혼은 어쨌거나 환대받지 못할 거고.

아직은 체감하지 못하지만 하루 사이에도 아이는 부쩍부쩍 클 거고 네다섯 달만 지나도 배가 나오기 시작한다던데. 이러다 정말 혼인신고만 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결혼식을 호화찬란하게 하라고 요구한 사람이 오메가 아버지잖아. 어차피 결혼을 반대하는 거라면, 오메가 아버지의 말에 따라서 크고 요란스럽게 할 필요도 없다는 거 아냐?

그냥 구색만 맞춰서 해도 상관없겠구나 싶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배가 나오기 전에 대충 아는 사람만 불러다 놓고 얼른 식을 올려야겠다. 그런데 양가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식이라 올 가족도 없고, 심지어 나는 아는 사람도 없는데.

아는 사람이라고는 기껏해야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들뿐인데. 거기서 조금 친한 사람을 고르면 이 기사님하고 최 기사님 정도?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내 결혼식에는 와주겠지. 우리 서로 결혼식 챙겨줄 정도로는 친하지 않나.

“결혼식 하지 말까. 그냥 물그릇 하나 놓고 식 올릴래?”

“뭐?”

“결혼식 해봤자 올 사람 없을 것 같아. 부모님들도 안 올 거고, 나 아는 사람도 없어. 올 사람도 없는데. 그냥 작은 성당 같은 데서 할까? 드라마 보면 그런 거 나오던데.”

내 걱정 어린 푸념에 권이강이 웃음을 흘렸다. 올라앉은 몸뚱이가 덩달아 들썩거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걱정하지 마. 최고로 크고 화려하게 해줄 테니까. 네가 부르지 않아도 올 사람은 많으니,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걱정을 안 하려고 해도 걱정이 돼. 좀 있으면 배도 나온다잖아. 나는 내 모습이 어떨지 상상이 안 돼.”

대체 어떤 모습일지 인터넷으로 찾아볼까 싶다가도 무서워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남자가 임신한 모습이라니, 분명히 이상할 거다.

알파나 오메가는 수가 많지도 않을뿐더러, 뒷골목에서 가끔 알파를 보긴 했지만 오메가는 거의 볼 기회가 없었다. 심지어 임신한 남성 오메가를 볼 일이 있었으려고.

“이러다 애 낳고 결혼하게 될 것 같기도 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네. 최고로 멋진 모습으로 결혼식 올리게 될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괜한 걱정 하면 아이도 고민이 많아지는 법이다.”

타이밍 생각 못 하고 일찌감치 자리 잡은 놈 잘못이지. 결혼 얘기도 오가기 전에 누가 먼저 생기랬나. 그러니 이 정도 고민은 함께 나눠 가질 책임이 있다.

아이라고 너무 오냐오냐 키우면 안 돼. 적어도 내 부모가 나 때문에 어떤 고민을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효도를 하지.

“저녁 아직이지?”

“응.”

“옷 갈아입고 나와서 차려줄게. 뭐 먹고 싶은 거 있나.”

“딱히 없는데. 고기?”

“……고기 너무 자주 먹는 것 같은데. 어제도 고기 먹었잖아.”

“고기는 자주 먹어도 돼. 세 끼 전부 고기 먹는 것도 아니고 하루 한 끼는 고기를 먹어줘야 하는 거야.”

고기가 사람에게 얼마나 이로운 건데.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나고, 고기를 먹어야 삶이 즐거워지는 법이다.

심지어 권이강이 구워주는 스테이크는 밖에 나가서 사 먹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맛이 있었다. 삼겹살을 금겹살처럼 먹던 내가 스테이크의 참맛에 눈을 떴다.

“아직 입덧은 안 하지?”

“하는 사람도 있고 안 하는 사람도 있대. 나는 안 하려는 모양이지.”

“입덧 오면 고생이라던데, 그럼 다행이지. 참, 내일부터 사람 올 거다. 청소하고 식사 차려주실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왜 새삼스럽게?”

“새삼스럽게 네가 끼니를 안 챙기니까. 귀찮다고 점심 안 먹고 그냥 넘기지?”

그런 것만 귀신처럼 알아차린다. 한 끼 정도는 건너뛰어도 괜찮은데, 아이가 생기니 사소한 것까지 챙기려고 들어서 귀찮기도 했다.

“간단하게라도 먹어야지. 그리고 초기에는 최대한 가만히 있는 게 좋다니까, 청소니 뭐니 해서 움직이지 말고.”

“알았어. 자기 애라고 엄청 아끼네.”

“아이 때문에 그럴까. 혹시라도 너 잘못될까 봐 그러지.”

아무튼 말로는 못 이겨 먹겠다. 잔소리를 토해내는 입을 입술로 꾹 눌러 막자, 뭔가 한 소리 더 하려던 권이강이 말을 멈추고 눈을 휘었다.

∞ ∞ ∞

영어 수업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 중간에 이러저러한 일도 많았고 자꾸 가출도 하고 심지어 지금은 출가 상태여서 영어 과외를 무기한 중단했었는데, 태교 문제도 있고 자식놈이 태어나서 영어 못한다고 무시할까 봐 생각을 고쳐먹었다.

오랜만에 보는 선생님은 이렇게 일방적으로 수업 스케줄에 영향을 주면 안 된다며 한 소리를 했고, 마음 내킬 때마다 하는 건 공부가 아니라며 두 소리를 했다.

수업을 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건 내 잘못이 아닌데, 생각해보니 내 잘못인 듯도 해서 빠르게 사과했다.

“수경이 지금 자는 거예요?”

“안 자요, 선생님.”

“너 지금 책상에 코 박기 직전이에요.”

수그러지는 이마를 손바닥을 받쳐 들어 올리며 선생님이 혀를 찼다.

아무리 집중력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수업받는 두 시간 정도는 버티지 않을까 했는데. 날이 따뜻해서 그런가, 자꾸 꾸벅꾸벅 졸게 된다.

“임신하면 잠이 늘어난다더니 진짠가 보네요.”

“임신 때문인지는 모르겠던데.”

“수업 시간 십 분 남았는데, 그냥 그만할까요?”

“선생님 요즘 자꾸 수업을 날로 먹으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시간을 확인하며 묻는 선생님의 말에 핀잔하자, 네가 할 말이 아니라며 콧방귀가 돌아왔다.

“자투리 시간 모아서 보너스 수업 한 번 해줄게요. 주말에 이 근처 올 일 있으면. 아, 물론 이번 주말은 아니고.”

“와, 보충 수업을 본인 일정에 맞춰 하시네.”

“와서 수업해주는 건 안 귀찮은데, 여기까지 오는 게 너무 귀찮아서. 외출하려면 준비해야 하는데, 보너스 수업하러 오기 위해서 준비 시간을 소모하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난 선생님이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때 너무 짜릿하더라. 멋져서.”

심지어 솔직하기까지 하시고. 싫은 건 싫고, 아닌 건 아니고, 귀찮은 건 귀찮은 거고. 자기표현이 확실한 사람이라서 오히려 편하고 좋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현하지 않고 마음에 꾹 담아두기만 하면, 그게 커져서 어떤 형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오메가한테, 심지어 임신한 남자한테 고백받는 건 처음이네요.”

“고백 아니거든요.”

“다행이네요. 나도 남의 가정 파탄 내고 싶지 않거든요.”

교재를 정리해 가방에 넣으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가 나왔다. 진짜 무서운 분일세. 혀를 차며 책상 위에 뺨을 대고 엎드렸다.

“내일하고 모레는 주말이니까 쉬고, 월요일에 봐요. 혼자서라도 복습하고. 예습까지 바라는 건 무리죠?”

“네.”

“수경이는 참 당당해. 그나마 그런 장점이라도 있어서 다행인 것 같아요.”

“선생님 지금 욕하시는 것 같아요.”

“아녜요. 애 아빠한테 욕할 수는 없지. 애가 듣잖아.”

차라리 욕을 해라.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을 배웅했다.

오늘 수업 잘했다거나 배움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다는 입에 발린 소리는 절대 나오지 않았다. 오늘 진도 나간 부분의 예문을 열 번씩 읽어보라는 숙제만 내주고, 선생님은 뭐가 그리 바쁜지 쌩하니 가버렸다.

참 부지런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말이나 행동에서 자신감이 흐르고 당당하고. 같이 있으면 에너지가 전해지는 것 같아서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식사 차려드릴까요?”

원래는 예전처럼 점심시간 뒤에 수업을 받았는데, 책과 임신과 식곤증이 합쳐져 수마의 공격력이 무시무시하게 높아졌다. 선생님과 상의를 해 수업을 오전으로 옮긴 덕분에, 수업이 끝나면 점심시간이었다.

끼니 챙겨 먹는 것도 귀찮은데, 차려주는 사람이 있으니 이제는 귀찮아서 안 먹었다는 핑계도 통하질 않는다.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고기요.”

“아이고. 고기 말고. 요즘 고기 너무 자주 드신다고, 이사님이 점심에는 고기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어요.”

고기를 주지 말라니,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런 것까지 신신당부할 필요는 없잖아. 세세한 것까지 용의주도한 놈이다.

그런데 솔직히 억울한 게, 고기가 아니면 딱히 먹을 게 없지 않나. 그렇다고 시금치나물이 먹고 싶다거나 연근 조림이 먹고 싶다고 할 수는 없잖아. 그런 건 음식이 아니라 반찬이라고. 메인 요리가 아니라 곁들여 먹는 거.

“그냥 간단하게 시켜 먹을까요?”

“아니요.”

“햄버거 같은 거 먹으면.”

“네, 안 돼요.”

“그럼 피자는요? 고기 안 들어가는 야채 피자.”

“당연히 안 되죠.”

권이강이 아주머니를 너무 잘 고용했다. 웃으면서 단호하게 거절하는 법을 아는 분이네. 틈 하나 보이지 않는 철벽 방어에 시무룩해졌다. 고기 아니면 기름진 거 먹고 싶은데.

“그럼 그냥 비빔밥?”

“그건 괜찮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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