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바이스-139화 (139/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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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상황 때문에 엄청 난리였지.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정색하고 빽빽 소리를 지르고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서 엄청 웃겼는데.

퇴원한 뒤로는 조금 사이가 좋아졌다는 생각도 했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도 가끔은 걱정하는 말을 툭 내뱉기도 하고, 내가 생활하는 데에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주기도 했으니까.

아, 원래 이런 사람이었구나. 원래 이런 아버지였구나. 차수경 성격이었으면 혼자서 눈물 쏟아낼 만도 했다. 정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두고 심약한 차수경이 배려 같은 것을 느낄 수나 있었을까.

이 집구석에 들어와 생활하고, 연극 같은 가족들의 일상을 지켜보며 또 생각이 달라졌다. 할아버지의 구박과 알파 아버지의 외면과 전처 자식들의 무시에 본인 스스로를 지키고자 얼마나 힘겨웠을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기계처럼 딱딱한 저 모습은 본인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가 아니었을까, 안쓰럽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오메가 아버지에 대한 평가를 조금 달리했다. 저 사람이 저렇게 숨을 죽이고, 모든 것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데에는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렇기에 그가 받는 부당한 처사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넘길 수 있었던 거라고.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네요. ……아버지가 원하시는 거. 어떤 미래를 생각하고 계세요?”

오메가 아버지가 숨을 죽이고 할아버지의 구박에도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당했던 것은 분명 차수경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집안 대소사에 관여하지 않고 관심도 갖지 않은 건, 그냥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주제 파악을 해서 찌그러져 있었다거나, 구박과 외면에 눈시울을 적시면서 속으로만 끙끙 앓는 가련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리는 큰 그림이 대체 뭐예요?”

“네가 호산을 갖는 거.”

“눈물 나게 아름다운 꿈이기는 하지만, 자식에게 모든 걸 주고 싶은 부모 마음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내 자식이 최고고, 내 자식이 모든 걸 다 가져야 한다. 그런 부모의 마음은 오메가 아버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오메가 아버지를 곡해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진짜 객관적으로 봐도 오메가 아버지는 본인 자식을 위해 욕심을 부리고 자신을 희생할 사람은 아니었다.

차수경에 대한 태도만 봐도 그렇다. 퉁명스럽지만 속으로는 걱정해주는 아버지? 아니, 오메가 아버지에게 차수경은 그냥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 자식이었다.

원래 차수경처럼 조용히 찌그러져 살아도 상관없고, 지금의 나처럼 천둥벌거숭이같이 날뛰어도 상관없었다. 돈을 요구하면 돈을 주고, 카드를 요구하면 카드를 주고, 무엇을 한다고 하며 그래라, 무엇을 하지 않겠다고 해도 그래라.

자기 자식이라서 이해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식이라도 당신과는 별 상관이 없던 거였다. 그 미묘한 간극을 알아차리기란 어려웠지만, 약간의 의심을 가지고 보기 시작하면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내 자식이 모든 걸 다 가졌으면 좋겠고, 어떻게 해서든 갖게 해주고 싶은 부모 캐릭터, 별로 안 어울리는데. 제 편견이에요?”

내 물음에 아버지는 작게 실소했다.

“그냥…… 주는 걸 받을 생각은 없는 거니. 이제 다른 형제도 없고, 고분고분 말만 잘 들으면 병원도, 재단도 네 것이다. 결혼이야 그 뒤에 그 사람과 하든 다른 사람과 하든 상관없잖니.”

“그러니까 왜요. 난 딱히 재단에 욕심도 없는데. 돈 욕심은 좀 나지만, 그게 권이강하고 맞바꿀 정도는 아니거든요. 나도 좀 행복하게 살아봅시다. 돈이야 먹고살 만큼만 있으면 되는 거지.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 굶어 죽을 정도만 아니면 거기서 거기더라고요.”

돈이 아무리 많아봤자 죽을 때 싸 들고 갈 것도 아니고. 조금 많을 때와 어마어마하게 많을 때의 먹고사는 차이도 그리 크지 않은데. 발 뻗고 누워 잘 수 있는 집만 있으면, 돈이야 굶지 않을 정도로도 충분하다.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민재희였을 때보다 돈이 많아도 가끔 자장면이나 탕수육이 먹고 싶을 정도로 나란 인간 역시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잠잘 곳이 있고, 걸칠 옷이 있고, 삼시 세끼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데 뭘 더 바랄까. 하물며 권이강을 버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재단을 손에 넣으면 돈은 좀 만지겠지만, 그렇다고 권이강이랑 헤어지면서까지 욕심을 낼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배에 권이강 자식까지 있는데. 자고로 아이는 부모 둘이서 같이 키워야 하거든. 그게 내가 꿈꾸는 가족이었다.

“병원은 무슨 소용이고, 재단은 또 무슨 필요예요. 아버지처럼 숨죽이고 비위 맞추며 사는 거, 제 성격에는 안 맞아요. 아시면서 그러네.”

“다 가질 수 있는데, 남들은 갖고 싶어 안달을 내는데…… 필요 없다고? 철이 없어도 너무 없구나. 괜히 네 형들이 병원장 자리 물려받겠다고 형제끼리 날카롭게 가시 세우며 싸운 줄 아니?”

“상대적인 거죠. 누구한테는 어떻게든 갖고 싶은 보물이 나한테는 별 필요 없는 장난감일 수도 있잖아요. 한순간은 좋고 즐거울 수 있지만 뭘 포기해가면서까지 가질 필요는 없는 거.”

병원이나 재단이 나한테는 그런 거거든.

있으면 좋긴 하겠지. 내가 당장 병원이나 재단을 어떻게 꾸려나갈 능력은 쥐뿔 없지만, 운영이야 돈 주고 능력 좋은 사람을 구해서 시키면 되는 거고. 나는 거기서 나오는 돈이나 연금처럼 꼬박꼬박 받으면 되니 얼마나 좋아.

그래도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가질 필요는 없잖아. 하물며 권이강을. 나한테 유일하게 다정한 놈. 유일하게 내 편인 놈. 내가 사람 죽여도 괜찮다고, 더 죽여도 좋다고, 못 하겠으면 대신 죽여주겠다고까지 하는 놈. 그런 놈을 내 주제에 또 어디 가서 만나겠어.

“저한테는 권이강이 더 중요해요.”

“넌 호산을 물려받아야 해!”

쾅, 하고 테이블을 내려치며 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타이밍에 뜬금없이 화를 내서, 어지간하면 놀라지 않던 나도 찔끔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기 위해서 널 낳았고, 그러기 위해서 널 키웠어. 그런데 지금 네가 그걸 거부하겠다는 거니? 숟가락으로 떠먹여주겠다는 데도 그걸 거부해?”

“배부르면 안 먹을 수도 있는 거죠. 네, 괜찮아요. 넣어두세요.”

“왜 자꾸 그런 식으로 구는 거니, 왜! 지금 내가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 넌 호산 병원을, 호산 재단을, 이 집구석에 있는 모든 걸 다 가져야 한다고. 다 네가…….”

쏟아내듯 퍼부어지는 말은 마치 한을 품은 것처럼 악에 받쳐있었다. 그래, 이 사람도 많이 참긴 했지. 그동안 속에 꽁꽁 감추고 있었으니, 그 속이 멀쩡하지는 않을 거다. 무슨 생각을 품고 조용히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아버지 정신 건강에 결코 좋지만은 않았겠지.

“우리 이쯤에서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하죠. 진실게임 같은 거요. 또 알아요? 아버지 진심을 알게 되면 내 마음이 움직일지.”

아무리 감동을 하더라도,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 마음이 움직일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이유로 이러는지는 알아야겠다. 말없이 입 꾹 다물고 무조건적인 이해를 바라는 건 아이나 하는 일이잖아. 이 정도 되면 패는 까 보여야지.

“절 설득해보세요. 정작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호산인데 왜 내가 꼭 호산을 먹어야 하는지 이유가 있을 거 아녜요.”

“네가…… 가지면 끝난다. 네가 다 가지면, 차씨 집안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걸 네가 다 가지면…….”

“내가 갖게 되면 뭐가 끝나는데요?”

“복수, 내 원한.”

생뚱맞은 단어의 조합에 찌푸린 미간을 긁적거렸다. 여기서 나올 단어가 아닌데, 자리를 잘못 찾아오신 건 아닌지.

“제가 가진다고 복수가 돼요? 아버지가 가지시는 건 어떨까요.”

무슨 복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빼앗기를 원한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본인이 가져야 복수가 되는 게 아닐까.

“된다. 그렇게 무시하던 핏줄에게 호산이 넘어가는 꼴을 그 집안사람들이 볼 테니까. 그러니까 네가 가져야 하는 거란다. 알파에 현혹되어 결혼 문제에 시간을 허비할 게 아니라.”

왜 이 집구석과 관련이 되면 멀쩡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 정말 호산이 문제인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했던 말 중에서 적당한 단어가 떠올랐다.

응, 아주 글러 먹은 집구석이야.

“뭐에 대한 복수예요?”

왜 내가 복수를 이뤄주는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왜 내가 가져야 끝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대체 무슨 복수냐는 거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이 답답한 아버지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할아버지한테 이십 년 동안 구박받은 거? 아니면 알파 아버지가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방관한 거?”

그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차갑게 웃는 얼굴을 보며 혹시나 싶어 말을 흘렸다.

“애초에 결혼부터 문제였죠?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었어요? 억지로 결혼했어요?”

아니, 이건 말이 안 되지. 호산에서 억지로 결혼을 밀어붙여 시킨 거라면, 할아버지가 저렇게 눈을 부릅뜨고 구박을 했을 리도 없잖아. 게다가 결혼 전에 이미 임신을 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할아버지도 유산 나눠 줄 일은 결코 없다 말했지만, 결혼까지 반대할 수는 없었던 걸 텐데.

“나, 어떻게 생겼어요? ……알파 아버지랑 어떻게 만났는데요.”

“네 아버지는 쓰레기란다.”

평소와 다름없이, 단조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의 욕을 저렇게 책 읽듯이 차분하게 할 수도 있구나. 새삼스럽게 오메가 아버지가 대단해 보였다.

“차씨 집안 핏줄들이 그러하듯, 몰염치하고 졸렬하지.”

언젠가 이런 때를 기다려왔다는 양 아버지는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잠자리에 든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부모와도 비슷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를 능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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