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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배를 감싸며 울상을 짓자, 권이강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순간 패닉이 온 얼굴이라, 싱겁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배가 고파. 금방 집에 들어갈 줄 알고, 나올 때 우유 한 잔 마시고 나와서 꼬르륵거려.”
“끼니 잘 챙겨 먹어야지. 이제 아이도 생겼으니까 더 잘 챙겨 먹어야 된다. 알았지?”
제 부친에겐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권이강이 자연스럽게 나를 끌어당겨 현관으로 향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나도, 권이강의 아버지도 그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거기 서지 못하겠냐!”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죠. 아버지 때문에 놀라기도 했을 테고, 병원 갔다 오랴 여기 끌려오랴 수경이 피곤할 겁니다.”
“너는…… 네 아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게지. 내가 끝까지 저놈 들이는 걸 반대한다면 어쩔 거냐. 배 속에 있는 놈도 인정 못 하겠다면!”
“아버지도 제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정말 제 생각을 하셨더라면 이런 식으로 수경이를 부르지도 않으셨겠죠. 불러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너랑 헤어지고 아이도 지우래. 아니면 내일 해도 못 보게 만들어주겠다고.”
기회는 이때라며 냉큼 말을 내뱉자 권이강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간에 힘을 주고 날카로운 눈매로 제 아버지를 노려보던 권이강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지금 당장 수술실 준비해서 나 끌고 가라고 했어. 아이 지우라고. 나 녹음도 해뒀어. 집에 가서 들려줄게.”
“저, 저 육시랄 놈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말하자 권이강의 아버지가 나를 손가락질하며 뒷목을 잡았다.
“이강아. 너는 이 아비 마음을 그리도 모르겠냐. 이제까지 이 아비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곁에서 충분히 지켜보았지 않아. 너는 또 어떻고. 이 아비의 고통, 네 고통, 그 모든 게 다 저 집안 때문에 생겨난 거다. 그런데도 저놈이 그리 좋아? 포기가 안 되더냐.”
“저는…….”
나를 품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권이강이 잠시의 침묵 뒤에 말을 이었다.
“대학 졸업한 뒤에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귀국했습니다. 내 꿈, 내 미래 다 버리고. 그런 각오로 들어왔는데, 아버지는 멀쩡하셨죠. 단순히 절 끌어들이려고 내뱉은 거짓말에 귀국해서 눌러앉으면서도 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원망스럽네요.”
커다란 손으로 단단하게 내 등을 받쳐 안고, 강하게 품으로 끌어당기고, 조금의 틈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처럼 밀착하고서도 권이강은 부족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원하던 내 오메가, 내 아이, 내 가족. 이제야 겨우 손에 넣었는데, 무엇을 위해 그것들을 찢어놓으려고 하는 겁니까. 절 위한다며 어째서 제 행복을 찢어놓으려고 하세요.”
“피가 섞였어. 그놈과 너는! 빌어먹을 호산 핏줄이!”
“제 오메가라는 건 변함없습니다. 친척이요? 같은 배에서 태어났어도 제 오메가였을 거고, 제가 가졌을 겁니다.”
거 봐, 권이강은 절대 나 포기 안 한다고 했잖아. 누가 뭐라고 하든 권이강은 나 안 버려. 아이까지 생겼는데, 자기가 겪은 일이 있는데, 그걸 자기 자식까지 겪게 만들지도 않을 놈이고.
나는 뻔뻔하게 웃었다. 내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권이강의 모습에 얄팍한 믿음이 다시 차올랐고, 그건 무엇보다도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집에 가자. 피곤해.”
“그래. 가자.”
“못 간다. 네 두 놈이 얽히는 꼴은 절대 못 봐!”
사이좋게 퇴장하기는 그른 모양이다. 저 영감님이 끝까지 고집을 부릴 모양이야.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권이강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피 보실 생각이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오늘 이 자리 이후로 더는 아버지 아들 아닙니다. 황성과도 인연 끊겠습니다.”
“너, 너 어떻게 이 아비한테…….”
“선을 넘은 건 아버지입니다. 한 걸음 더 넘어가시면, 이제 정말 남이고요.”
잘 생각하세요. 경고조로 내뱉은 말에 영감님 얼굴이 시꺼멓게 죽었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반쯤 들어 올렸던 몸뚱이가 힘없이 소파로 주저앉는 것을 보다 시선을 돌렸다.
가족들이 찬성하고 축하하는 결혼 필요 없다고 했지만, 실제로 찬성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조금 씁쓸해졌다.
자식이 행복하게 살기 바라는 마음에 결혼하고 애 낳기를 기다리는 거 아닌가.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하겠다는 자식 의견에 왜 이렇게 반대를 하는지.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해도 자식 위해서라면 허락해주는 게 부모여야 하는데, 현실은 다른 모양이다. 부모 자식 관계도 어렵기 그지없다.
“몸 아픈 곳은 없지?”
“어, 괜찮아.”
“병원 가서 검사 다시 받아볼까? 자세한 검사는 안 받았다며.”
“그냥 집에 가.”
얼마나 급했는지 건물 앞에 삐뚜름하게 주차된 차의 앞뒤로 시커먼 차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다. 정말 무력을 쓸 생각까지 했는지 권이강이 데려온 것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집을 지키는 경호 인력과 마주 서서 팽팽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엄청 데리고 왔네. 졸병 몰고 오느라 늦었구나?”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항시 대기 상태로 둬야겠어.”
나는 남이라지만 권이강에게는 아버지인데 잘도 사람들을 끌고 왔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예상이야 할 수 있지만, 권이강 아버지가 힘으로 짓누르려 한다는 것까지 예상하고 같은 힘으로 받아치려고 준비한 권이강도 좀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완전 든든하네.”
“이 정도는 되어야 네가 팔랑팔랑 돌아다녀도 걱정이 덜 하지. 다음부터는 외출 전에 꼭 연락하고, 사람 대동하고 움직여.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네.”
“대답만 잘하지.”
차에 오르려는 나를 붙잡아 뒷좌석으로 밀어 넣은 권이강이 내 옆에 앉았다. 눈치 빠르게 사내 하나가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자기 차에 남의 손 타는 거 싫다는 사람이 웬일이래.
안 하던 짓을 한다며 돌아보자 뭔가 반짝반짝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진짜 8주라는 거지?”
아, 그 얘기였구나. 그거 들으려고 안 하던 짓까지 하면서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나 보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도 힘든지, 평소와 다르게 조급함이 묻어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며 쥐고 있던 사진을 내밀었다. 정신없는 상황에서 권이강 아버지 손에 있던 것을 낚아채듯이 가져온 터라 조금 구겨지긴 했지만, 어차피 멀쩡했어도 땅콩이 아이처럼 보일 일은 없었을 거다.
“아이 심장 소리도 이제 들을 수 있대. 그건 다음에 너랑 같이 가서 들으려고 안 듣고 왔어.”
구겨진 부분을 손으로 쫙쫙 편 권이강이 뚫어질 것처럼 무서운 집중력으로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미간에 인상을 쓰고 봐도 그게 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텐데. 어쩌면 나처럼 뭐가 태아인지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여기 이게 아기집이고, 이게 태아래. 손발 다 있다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땅콩 같아. 좀 좋게 봐주면 곰 인형.”
내 말에 권이강의 입술 위로 웃음이 떠올랐다.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 끝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입술 근처에 꾹 입을 가져다 댔다.
“좋아?”
“좋다.”
어떤 미사여구도 없었지만, 그만큼 권이강이 느끼는 감정을 진실 되게 표현하는 말이기도 했다.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그저 좋기만 한 기분. 말로 내뱉지 않아도 그 감정이 전해져왔다.
“우리 이제 큰일 났어. 임신 중에 뭐 조심해야 하는지, 아이는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는데. 공부할 것도 많고, 더 문제인 건 나는 백수고 너는 백수 예정자야.”
권이강 아버지까지 알게 되었는데 권이강이 멀쩡히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조만간 쫓겨날지도 모르겠다. 권고사직. 퇴직금이라도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
권이강이 모아둔 돈도 있을 거고, 내 골드바도 있으니까 그거 팔아서 당분간 생활하고. 아이 낳아서 서너 살 될 때까지는 어찌어찌 버텨보다가, 돈 떨어질 때 즈음 슬슬 일하러 나가야겠다.
권이강이 남의 비위 맞추며 누구 밑에서 일한다는 건 상상이 안 가는데. 고개 숙여가며 세상 쓴맛 보면서 돈 벌어오는 거 보느니, 그냥 빡세게 육아를 시켜놓고 내가 일하러 나가는 쪽이 마음 편하겠다.
“뭐 좀 빼돌린 거 있어?”
“뭐?”
“아냐.”
권이강 성격에 뒤로 뭘 빼돌렸을 성싶진 않고, 그러기엔 시간도 부족했고. 영감님이 가진 집이라도 한 채 명의라도 바꿔놨으면 그나마 숨통이 좀 트였을 텐데, 권이강에게 그런 수작을 부릴 주변머리도 없을 테고.
얘는 왜 이렇게 쓸데없이 착하기만 할까. 내가 못돼먹어서 그거 상쇄하려고 이놈이 이렇게 착할까. 그래, 이제 아이도 생겼는데 부모 중의 한쪽은 멀쩡해야지. 멀쩡한 부모가 되기엔 내가 너무 글러 먹었고, 여러모로 육아는 권이강에게 맡겨야겠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아이나 키워. 어떻게든 너랑 아이는 안 굶길 거니까.”
한숨처럼 쏟아낸 말에 권이강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육아 잘할 수 있지? 애 엇나가지 않게 잘 키워야 해. 그렇다고 아이한테 너무 집착하지는 말고.”
그렇게 집착했다가 아이 인생 망치고, 본인도 망가지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다. 할아버지가 그랬고, 권이강 아버지도 지금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고 있다.
너무 관심 안 가졌다가 애들 쓰레기 되는 경우도 봤고. 이건 알파 아버지가 해당되지.
역시 적당한 관심과 적당한 사랑이 중요한 거다. 나머지 관심과 사랑은 다 나한테 줬으면 좋겠다. 나는 너무 부족해서 권이강이 관심이며 사랑이며 다 쏟아부어도 좋을 것 같아. 집착까지 해주면 더 좋고.
“아이 태어나도 넌 내 거야. 알지?”
“당연한 소리를 한다. 네가 낳을 아이니까 좋은 거지, 아니었으면 좋지도 않아.”
“그런 자세 아주 좋아.”
흡족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권이강이 예쁜 소리 하는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이렇게 한결같이 예쁜 소리만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권이강은 타고난 게 틀림없다. 사랑받기 위해서 타고났어. 얘를 안 좋아하는 건 진짜 불가능한 일이야.
여전히 초음파 사진을 소중하게 쥐고 빤히 쳐다보는 권이강의 얼굴을 붙잡아 콱, 입술을 눌러 문질렀다. 잠시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권이강이 이내 미소를 지으며 내 입맞춤에 답하듯 입술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