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바이스-134화 (134/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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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드리러 갔던 으리으리한 한옥 집으로 가나 했는데 의외로 서울을 벗어나지 않았다.

한국에 집이 이렇게나 많고 아파트도 많은데, 집값이 떨어지기는커녕 오르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라니까.

부자들이 집을 수십 채씩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남은 사람들에게 돌아올 집이 부족한 거 아닌가. 게다가 비싸게 팔 생각에 집값을 올리고 또 올리니 가격이 안 맞아서 살 수가 있어야지. 집값이 올라가면서 전세도 올라가고 월세도 올라가고. 결국 집 없는 사람만 죽어나는 거다.

한때 그런 꿈을 꾸었다. 재력이나 미모, 집안 배경 다 필요 없고 그냥 나 좋다는 여자랑 결혼해서 넓지 않아도 좋으니 방 두 개짜리 집에서 아이 낳고 알콩달콩하게 사는 꿈. 실현 가능성이 없는 꿈으로 끝나버렸지만.

집을 사기는커녕 월세도 아닌 조직 창고에서 먹고 자고 했는데, 죽고 나니 꿈꾸었던 것과 엇비슷하게, 아니, 꿈보다 더 으리으리한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비록 여자는 아니지만 나 좋다는 완벽한 놈과 두 개보다 더 많은 방이 있는 아파트에 예상과 달리 내가 임신을 하긴 했지만 곧 태어날 아이도 있지. 음, 이 정도면 훌륭해. 꿈은 크게 가지라는 말과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이보다 더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을까.

잠시 사념에 빠졌던 정신을 일깨우며 눈앞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경기도 외곽에 있던 한옥과는 달리 완벽한 서양식 건물이었다.

“얌전히 잘 따라오니 이렇게 좋네. 들어가시죠?”

딴생각에 빠져있던 터라 오는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덩달아 조용히 있던 사내가 차에서 내리며 입을 뗐다.

사내의 안내를 받아 집으로 들어가며 주변을 무심히 훑어보았다. 대문에서부터 정원 중간중간, 그리고 건물 주변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룹 회장님 경호 수준이 이 정도인가. 아니면 전직 조폭 오야라는 배경 때문인가. 보여주기인지, 아니면 경계하는 무언가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회장님 기분 안 좋으니까, 너무 입 털지 말고 그냥 네, 네, 하고 넘어갑시다. 내가 특별히 도련님 좋게 봐서 해드리는 조언이야.”

“회장님 기분이 언제 좋은 적이 있긴 해요? 저번에 봤을 때도 혈압으로 넘어가실 것처럼 구시던데.”

“그야 그렇지. 우리 형님, 아니, 회장님이 나이를 먹어서도 성격은 여전히 불같으시다니까.”

“권이강이 안 닮은 게 다행이지. 얼굴은 좀 비슷하더만, 성격까지 닮았으면 어휴.”

말을 말자며 한숨을 내쉬자 옆에서 함께 걷던 사내가 낄낄 웃음을 흘렸다.

“회장님, 손님 모시고 왔습니다.”

거실 소파에는 한 번 본 적이 있는 권이강의 아버지가 무게를 잡고 앉아있었다. 사람 불러놓고 정작 오니까 아는 척을 안 한다. 앉으라는 말을 기다리기보다 그냥 앉는 것을 택했다.

나를 데려온 사내가 멀찍이 떨어져 자리를 지켰다. 대화가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눈으로 지켜볼 거리로는 충분했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위험한 건 나지 권이강 아버지는 아닐 텐데. 내가 뭐 칼이라도 가져와서 찌르기를 하겠어, 아니면 맨주먹으로 강냉이를 털겠어. 그 모든 일이 현실로 일어난다고 해도 당하는 건 내가 되지 않을까.

“저는 커피는 별로고, 물이나 한잔 주세요. 미지근하게.”

차도 내주지 않을 분위기라서 먼저 말을 꺼내자, 아버님이 손을 까닥거렸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내 앞에 물컵이 놓였다.

이런 분위기면 아무래도 권이강 아버지가 나와 호산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차렸다는 거겠지. 장례식장에서 대면을 피하기는 했지만, 애써 감춘 것도 아니라서 조금만 파보면 어떻게든 알 수 있는 관계였다. 호산을 파면 내가 나오고, 나를 파면 호산이 나오고.

“내가 왜 불렀는지 아는가.”

어렵사리 벌어진 입술 틈으로 무거운 질문이 떨어졌다.

“말씀하시기 전까지 확신은 못 하죠.”

“호산 막내아들이라고.”

“이제 유일한 핏줄이죠. 조만간 인사드리러 오려고 했는데, 어떻게 먼저 아셨네요.”

“헤어져. 이강이와 그만 만나게.”

음, 역시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다. 아니, 조금의 다름도 없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별다른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집안 이야기를 들었다고 생각해도 되겠나.”

“알게 된 건 좀 되었죠. 권이강 인사시키러 데려갔을 때 저희 집에서도 난리가 났었거든요. 그때 권이강이 말해줬어요.”

“그걸 알면서도 붙어있다고? 그걸 다 들었으면서도 결혼을 하겠다는 겐가!”

“사이 나쁜 거야 어른들 사정이고, 일이 꼬인 것도 어른들 문제고, 그래서 죽이느니 살리느니 하시겠다면야 어른들 일이니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지만요. 그걸 자식들에게까지 강요하는 건 안 될 일이죠. 권이강이야 피해자고, 저야 관계없는 사람인데요.”

이렇게 오고 가는 말이 똑같을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상견례 자리를 만들어서 한 번에 터뜨릴걸. 그랬다면 힘들게 들었던 말 또 듣고, 했던 말 또 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어른들의 레퍼토리는 어쩜 이렇게 비슷한지, 어디에 매뉴얼이라도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저희 부모님한테도 구구절절 드렸던 말이라서, 그냥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저희 결혼합니다. 아버님께서 허락해주시면 좋지만, 허락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아버님이라고 부르지도 말거라! 너와 내가 그딴 호칭으로 묶일 일은 절대 없으니까!”

치사하게 호칭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 그런 것에 하나하나 상처받으며 주눅 들 일도 없는데, 레퍼토리 참 구식이다.

이런 거 드라마에서 많이 봤지. 요즘 드라마도 트렌드가 점점 바뀌는 추세라, 고스란히 물벼락 뒤집어쓰는 드라마가 있는 반면 뿌리는 물 피하고 대신 입으로 물 뿜어주는 드라마도 나오는데. 하물며 이런 호칭 가지고 잡는 트집 정도는.

“예, 영감님. 아무튼 영감님 허락은 딱히 필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오늘 온 건,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권이강이랑 같이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먼저 부르셔서 따라온 거고요.”

“여, 영감?”

“아버님이라고 부르지는 말라 하시고, 그렇다고 그쪽이라고 하기엔 제가 너무 버릇없어 보이고. 제가 그 정도로 버르장머리가 없는 수준은 아니거든요.”

아무리 못 배웠다고는 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아무리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권이강 아버지이니까 어느 정도는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썩을 놈. 주둥아리 나불거릴 때부터 알아봤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 건 여전하구나. 네가 지금 이 자리에서 겁 없이 입을 놀릴 때인 줄 아느냐!”

탕탕, 거칠게 테이블을 내려치며 권이강 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빌어먹을 호산 핏줄이라는 것도 끔찍하고, 그 끔찍한 핏줄이 내 자식과 얽혔다는 것도 끔찍하다. 하물며 결혼? 이강이 모친이 누구인 줄 알면서도 그딴 소리를 지껄여!”

“빌어먹을 호산 핏줄이죠. 권이강 어머니도.”

“네가 입에 담을 사람이 아니다. 넌 이대로 이강이 놈하고 떨어져 남인 것처럼 살아.”

“극비도 아닌데 입에 못 담을 건 또 뭐예요? 우리 고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집에서 쉬쉬하며 가둬둔 것도 이해 안 가지만, 영감님까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영감님은 오히려 당당하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감추고 왜 숨겨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우리 집안이야 소문나는 걸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사람들이니 그렇다 쳐.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내내 그런 식으로 살아왔으니 비슷한 맥락이라고 쳐.

그런데 권이강 아버지까지 쉬쉬할 필요가 있나. 가지고 있는 회사가 어마어마한 그룹으로 커지고 나니 역시나 소문이 무섭다는 걸 실감이라도 하셨나. 그래서 우리 집안 사람들이랑 비슷하게 입 꾹 다물고 계시는 건가.

“네까짓 놈이 뭘 안다고 나불거리는 게냐.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하기야 그 집구석에서 배운 게 있긴 할까마는.”

“그러게요. 도통 모르겠더라고요. 뭐가 그렇게 무서우셨는지.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면 그냥 데리고 오지. 무력이든 뭐든 써서 데리고 오지. 조폭이셨다면서요. 힘으로 밀어붙이면 우리 집안이 뭐 얼마나 버틸 수 있었겠어. 그냥 밀고 들어가서 데리고 오면 되는데 왜 그걸 못 했어요?”

조폭이면서 뭐가 그렇게 무서웠어. 내가 본 조폭들은 무서울 거 없다는 듯 개깡으로 세상 살던데. 당장 내일 인생 쫑나는 것처럼, 앞뒤 안 보고 거칠 것 없이 살던데.

조폭 우두머리라는 양반이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몸 사리고 숨죽이고 빼앗긴 것을 가슴에만 품고 살았어.

나 같으면 더러워서 돌려줄 때까지 진상을 부렸을 텐데. 있는 소문 없는 소문 다 내고, 세상 사람들 이목 다 끌어서 억지로라도 내가 가졌을 텐데. 힘이 있었다면 무력으로라도 빼앗아왔을 텐데.

“우린 다를 거예요. 끌려가지도 않을 거고, 뺏기지도 않을 거고. 남들이 우리 인생 멋대로 휘두르게 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게 부모든, 핏줄이든, 가문이든. 내가 원한다는데 무슨 권리로 타인이 그걸 허락하니 반대하니 한단 말인가.

“자신만만하구나. 네가 지금 누구 앞인 줄 모르고 그렇게 건방지게 굴어! 내 말 한마디면 넌 오늘 당장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너 같은 놈 지우는 거야 일도 아니지.”

“일도 아니긴 하겠죠. 그런데 왜요? 왜 저를 권이강한테서 떼어내려고 하세요? 우리 집안 꼴 보기 싫어서? 이 핏줄이랑 얽히고 싶지 않아서? 영감님 아들은 내가 좋아 죽겠다는데, 아들보다 영감님 자존심이 그렇게나 중요해요?”

권이강은 내가 유일하다고 했는데. 날 사랑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놈인데. 나만 있으면 된다고, 다른 건 다 필요 없다는데. 그런 놈에게서 왜 나를 떼어놓으려고 해. 그건 권이강을 위한 일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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