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누운 나를 내려다보며 권이강이 손을 뻗어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커다란 손이 전하는 온기와 안정감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한숨 자고 일어나자.”
“……미안해.”
“뭐가 미안해. 아무 일도 아니야. 자고 일어나면 기분도 더 괜찮아질 거다.”
“미안해.”
“괜찮아. 다 괜찮아. ……사랑해.”
흐트러진 앞머리를 넘겨주며 드러난 이마에 권이강이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사랑해. 널 사랑해.”
확인시켜주듯 내뱉는 고백에 조금은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사람 죽이고 감옥 가면 얼마나 있어야 할까. 삼 년? 오 년? 그나마도 돈이 있어야 그 정도겠지. 그럼 나는 한 십 년 있어야 하나.
차수경이 부잣집 자식이지만, 형을 죽였으니 친족 살해로 가중처벌을 받을까. 알파 아버지가 괘씸하다고 나 형량 더 때려달라고 하면 어쩌지. 오메가 아버지가 내 변호사 구해주려나. 인권 변호사라도 구해야 할까.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설마 무기징역은 아니겠지. 형기 다 채우고 나오면 우린 남이 되어있을까. 함께였던 시간보다 더 오래 이어질 헤어짐에 우리의 감정은 과연 지금과 같을까.
그때가 되면 네 사랑의 속삭임은 누구를 향해 울리고 있을까. 내게 보이던 다정함이 다른 누군가를 향해 있을까.
나를 채우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한순간 빠져나간 것처럼 아득해졌다.
∞ ∞ ∞
침대 옆은 비어있었다. 굳건히 붙잡고 있던 손아귀도 빈 상태였다. 가물거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릴 때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권이강을 찾았고, 어두워진 침실 너머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안심하고 다시 잠들었다.
가끔은 머리맡에서 목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가끔은 적막하기도 했고, 또 가끔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혼자였다 둘이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싶다가 오감이 마비된 것처럼 혼란스러움이 반복되던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어두운 침실에서 내가 내뱉는 숨소리가 아닌 또 다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잠시 안도한 것 같다.
“왜 일어났어. 조금 더 자.”
머리 위에서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파묻고 있던 얼굴을 떼어내 고개를 들었지만, 침실을 가득 채운 어둠에 바로 앞에 있는 얼굴조차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왜? 목말라?”
“몇 시야.”
그도 자다 일어났을 텐데, 내 물음에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은 권이강이 새벽 네 시를 조금 넘었다고 말해주었다.
“조금 더 자자.”
일찍 잠든 탓인지 일찍 눈이 떠졌다. 붙잡는 손길에 가만히 몸을 맡겼지만, 차츰 정신이 또렷해졌다.
순간 눈앞에 떠오른 것은 허공을 날던 차백주의 얼굴이었다. 흠칫, 하고 몸을 굳히자 보듬어 안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왜. 잠이 안 오나?”
“아니, 자.”
꽤 피곤한 목소리라서 짐짓 잠든 척을 해보았지만, 어디에서 표가 났는지 권이강이 등을 켰다. 작은 불빛이 팟, 하고 켜지며 잠시 시야를 교란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데.”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은 부드러웠고 조심스러웠다. 그의 손끝이 두피에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작게 소름이 돋았다.
“왜 이렇게 떨지. 어디 아픈가.”
“아냐. 안 아파.”
“긴장 풀고. 그러다 몸살 난다. 배 뭉치기라도 하면 큰일이고.”
정수리에서 목덜미로, 어깨로 내려온 손이 팔뚝을 위아래로 문질렀다. 손끝까지 내려갔다가 골반을 타고 올라온 손은 긴장으로 단단해진 배 위를 느리게 문지르며 평온한 온기를 전했다.
“경찰…… 안 왔어?”
“오후에 호산 쪽에서 연락이 왔다. 내일 만나보고 해결하기로 했어. 너 충격으로 쓰러지듯이 겨우 잠들었다고, 내가 대충 설명하고 미뤘다.”
“……그럼 나는…… 이제 감옥 가나. 아니, 재판부터 받아야 되나.”
“네가 감옥에 왜 가. 자라고 했더니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어. 아무 데도 안 가니까 편하게 자.”
“내가 죽였잖아. 그러니까 벌 받아야지.”
그동안 나쁜 짓 하면서 벌을 안 받기는 했다. 잡혀서 소년원에 다녀온 적이 있긴 하지만, 이제까지 훔친 지갑을 생각하면 새 발의 피였다.
이번 나쁜 짓은 꽤 컸어. 살인이잖아. 이건 벌 받아야 해. 소매치기하면서 안 잡히려고 도망 다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죄의 무게를 내가 평생 짊어질 수 있을까.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한숨을 내쉰 권이강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몸을 웅크리고 누워있는 나를 끌어당겨 마주 앉힌 그의 얼굴은 옅은 조명등에 음영이 져 짙은 윤곽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후회하나? 죽이지 말걸, 그냥 참을걸. 후회해? 시간을 되돌린다면 안 죽일 거야?”
“……아니.”
“후회하지도 않고 반성하지도 않는데, 뭐 어떻게 교화되고 갱생할 건데.”
“그러니까 벌이라도 받아야…….”
“사고 냈다며. 사람 죽였다며. 사람 죽인 그놈은 벌 받았어?”
“아니.”
“그래서 네가 죽인 거지. 사람 죽이고 도망친 놈도 멀쩡하게 살았는데, 남들보다 더 잘 먹고 잘 살았는데, 왜 너는 굳이 벌을 받겠다는 거야.”
“그게 당연한 거니까. 아니면…… 나도 똑같은 놈이 되잖아.”
“네가 안 죽였으면 그놈은 평생 잘 먹고 잘 살았을 거다. 또 다른 사고를 내도 똑같이 덮었을 거고. 그거 예방했다고 생각하자. 아니면 법 대신 네가 벌줬다고 생각해.”
그건 말이 안 되잖아. 복수와 처벌은 엄연히 다른 건데.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부드럽게 나를 달래는 권이강의 목소리에 얄팍한 마음이 흔들렸다.
“그놈이 살인자라고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어? 아니면 사람 죽인 그놈을 처벌하고 싶었어. 법대로 처벌하기를 원했어? 아니면 네 개인적으로 처리하고 싶었어. 이것부터 확실히 하자. 말해봐. 어느 쪽이었어.”
법이 얼마나 허술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십사 년이 지났는데도 경찰은 내 부모를 죽인 범인을 잡지 못했고, 그 범인은 당당하게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었다. 조만간 병원까지 물려받아서 더욱 잘 나갔을 거다.
그놈이 살인자라는 걸 알리고 싶었냐고? 당연히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무슨 근거로. 무슨 증거로. 이미 배 실장이 청소를 끝내고 덮어버린 사건이다. 십사 년이나 지나서 찾을 수 있는 증거 따위는 없었다. 차백주의 살인을 증명할 무언가는 아무것도 없다.
차백주의 살인을 주장할 수 있는 단서는 없고, 결국 법이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다. 그것을 깨닫고 얄팍한 기대조차 버려야 했다.
“내 손으로…… 죽이고 싶었어.”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렇지?”
나직한 목소리는 나를 책망하기보다 부드럽게 어르는 것에 더 가까웠다. 푹 수그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넌 네가 하고자 하는 걸 했어. 이제 그건 비밀로 묻을 때다. 지금 이 순간부터 차백주는 저 혼자 취해서 중심을 잃고 추락사한 거야. 다른 누구에게 이야기할 때도, 우리 둘이 있을 때도 차백주는 사고로 떨어져 죽은 거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이제부터 절대 입에 내지 마.”
“하지만…….”
“괜찮아. 그 정도는 너 혼자만의 즐거운 비밀로 남겨둬도 괜찮다. 대신 오늘 이후로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돼. 혼자서만 간직하는 거다. 꼭 혼자서만.”
마법을 거는 것처럼 권이강은 재차 “혼자서만.” 하고 확인시켰다.
“죄책감 느끼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고. 네가 원하는 거였으니까 그냥 즐거워해. 잊을 수 없으면 편하게 좋아해도 괜찮다. 아무도 모를 거고, 아무도 너를 탓하지 않을 거야.”
“……좋아해도 괜찮아?”
정말 괜찮아? 사람 죽여놓고 기뻐해도 되는 거야? 확인하듯 묻는 말에 권이강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나쁜 놈이었다며. 억울하게 죽은 사람 한 풀어줬으니 어찌 보면 착한 일을 한 거지.”
“억울하게 죽은 사람 한 풀어주려고 한 거 아니야. ……나 때문이야.”
무릎을 세워 끌어안으며 나는 조심스럽게 내 이기적인 이유를 풀어냈다.
“내가 억울해서. 내 과거를 보상받고 싶어서. 그래서 죽였어. 죽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잖아. 그냥 그 새끼 때문에 내 삶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려서…… 그래서 죽이고 싶었어.”
“그런 거라면 더더욱 기뻐하고 즐거워해. 후회도 하지 말고 죄책감도 갖지 말고. 그리고 너를 위해서였다면 나는 더욱더 네 편이다. 네가 원하는 거, 네가 바라는 건 뭐든 하게 해줄 거니까. 필요하다면 나는 더한 짓도 해. 몇 명을 더 죽여달라고 해도 해줄 거다.”
“이제 안 죽여. 이제 없어.”
대체 누굴 얼마나 죽일 생각인 거야. 질겁하며 고개를 내젓자 권이강이 작게 웃으며 내 뺨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래. 이제 슬슬 태교에도 신경 써야지.”
“아이 없어.”
“조만간 병원도 가보자. 임신부라는 거 확인받으면 쓸데없는 생각도 덜 하겠지.”
이제 그만 눕자며 나를 침대로 밀어 눕힌 권이강이 모로 누워 팔로 머리를 괴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잠들 때까지 지켜주겠다는 것처럼 단단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한쪽 손으로 가슴을 도닥도닥 두드려주었다.
“아무도 몰라. 영원히 모를 거다. 그러니 당당하게 행동해. 누가 네 앞에서 네가 죽였냐고 물어도 모르는 일이라고, 되레 그 새끼를 정신병자 취급할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하게.”
“……그건 좀.”
“너 감옥 가면 우리 애도 너 따라서 덩달아 감옥 구경 가는 거고, 나도 같이 들어갈 거다. 못 가게 하면 사람 하나 죽여서라도 너 따라갈 거야. 그러니까 나 하나, 내 손에 죽을 놈 하나, 태어날 애 하나 합쳐서 세 사람 구제하는 셈 치고 당당하게 굴어. 얼굴에 철판 깔고. 죽어 마땅한 놈이었다고 속으로 욕도 해주면서.”
불법을 저지르라고 종용하면서도 어쩜 이렇게 당당한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권이강의 언변에 흔들려 어느 순간 ‘그래, 그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었지. 내 부모를 뺑소니로 죽이고, 내 인생도 망가뜨린 놈이잖아. 죽는 게 당연한 놈이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