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바이스-94화 (94/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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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었던 손이 다시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리고 뺨 위를 빨던 입술이 귓가로 옮겨와 달콤하게 속삭였다.

“누구랑 선을 보지?”

“몰라. 누군지 알 게 뭐야. 난 안 나갈 건데.”

칭얼거리며 가슴에 얼굴을 묻자 권이강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정수리에 턱을 기대고 흐음, 하는 소리를 흘려보낸 권이강이 내 등을 쓰윽쓱 쓸어내렸다.

“결혼하기 싫어?”

“모르는 사람이랑 무슨 결혼이야. 게다가 난 이제 겨우 스물이고. 내 인생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는데.”

“나이가 문제야, 상대가 문제야?”

그걸 질문이라고 하고 있나. 모르는 사람과 만나서 자기소개하고 결혼식장으로 직행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스물이라는 나이에 결혼할 상대 구한다고 선을 보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둘 다. 아버지는 하루빨리 나를 팔아먹고 싶겠지만, 난 팔려 갈 마음 절대 없어. 여차하면 골드바 들고 튈 거야.”

“그럼 나는?”

“너가 뭐?”

“너 도망치면 나는 어떻게 살아.”

어떻게 살기는, 그냥 살면 되지.

그런데 권이강 놓고 도망갈 생각을 하니 조금 마음에 걸렸다. 도망가게 되면 권이강도 데리고 같이 도망갈까. 그런데 권이강은 도망갈 이유가 없잖아. 일단 나만 도망가고 가끔 몰래 만나러 올까.

“우리 결혼할까.”

가슴 위의 젖꼭지를 꼬집고 문지르고 비비며 장난을 치던 손가락이 권이강의 질문에 뚝,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아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권이강이 “응?” 하고 물었다.

“결혼하자, 수경아.”

“……어, 음…….”

이런 장소에서, 이런 상황에, 이런 타이밍으로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들을 줄 몰라서, 누군가에게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들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눈만 끔뻑거리고 있자 껴안고 있던 내 몸을 놓고 팔을 뻗은 권이강이 협탁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선물로 주려고 사둔 건데, 이걸 청혼할 때 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군. 나쁘지는 않지만. 커플링도 하려고 했는데 예물을 먼저 하게 되겠어.”

케이스를 열어 내 앞으로 내보이며 권이강이 재차 결혼하자, 하고 말했다. 케이스 안에 보이는 왕방울만 한 보석이 시선을 강탈했다. 보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돌덩이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손 이리 줘봐.”

눈앞의 거대한 보석과 결혼하자는 말에 연달아 충격을 받아 멍해져 있는 틈을 타서 권이강이 내 손을 붙잡아 보석 반지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손가락이 무거웠다. 청혼 반지라는 의미로 무거운 게 아니라, 실제 반지의 무게가 무거웠다. 힘을 빼면 손가락이 축 처질 것 같았다.

“뭐야, 이거?”

큐빅이야? 미심쩍은 시선으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의 보석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피자 귓가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이아다. 청혼 반지로 나쁘지 않지?”

“웬 다이아? 쓸데없이 무겁기만…….”

“수경아.”

이렇게 부피만 크고 무겁기만 한 돌덩이를 대체 왜. 주절거리는 내 말을 막으며 권이강이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금보다 비싸. 나중에 팔 때도 비싸게 받을 수 있어.”

“……이렇게 보니까 또 예쁘네.”

깔끔하게 커팅 된 보석은 빛을 받을 때마다 화려하게 반짝였다.

사실 얼마나 비싼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엄지손톱보다 더 큰 걸 보면 어지간히 비싸기는 할 터였다. 작은 크기야 백만 원도 안 한다지만, 이 정도 크기면 꽤 나가지 않을까.

“물론 파는 순간 넌 오늘보다 더 혼날 각오를 해야겠지만.”

씨발, 계륵이네.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손가락에 끼워진 돈 덩어리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골드바보다 비싸?”

“훨씬.”

“두꺼비 세 마리보다?”

“그것보다 더.”

금두꺼비 세 마리면 골드바 세 개와 비슷할 텐데, 그것보다 더 비싸다니 엄청 비싼 모양이다. 손가락을 누르는 무게가 더욱 실감이 되었다.

“나랑 결혼할 거지?”

“……이런 상황에서 청혼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왜?”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서 받기에는 너무…… 분위기가 없잖아.”

“가장 좋은 분위기 같은데. 레스토랑에 악단 불러놓고 피아노 치고 노래하고 꽃다발 주면서 청혼할 걸 그랬나. 그런 걸 기대했어?”

티브이에서 그런 장면을 많이 보긴 했지만, 그것도 영 면 팔리는 짓이다. 생각해보니 지금 상황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도 힘없이 벌어져 있는 다리를 보면 분위기가 없긴 했다.

“남자한테 청혼받을 거라고도 생각 못 했고.”

“남자랑 섹스도 하고, 남자랑 연애도 하는데. 이제 남자한테 청혼도 받고, 남자랑 결혼도 해봐야지.”

왜 죄다 남자가 대상이어야 할까. 왜 권이강은 하필이면 남자로 태어났을까. 뒤늦게 후회하고 안타까워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혼해줄 거지?”

“날…… 그만큼 좋아해? 결혼할 만큼?”

“사랑해. 널 평생 내 옆에 두고 싶을 만큼. 네 마지막 순간까지도 난 네 곁에 있을 거다.”

늙어 죽을 때까지 같이 있자는 소리인가. 어떻게 그런 쪽팔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거지. 간지러운 속삭임에 왠지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 곁에서 못 떠나. 네 인생에 나 외의 다른 알파는 없어. 그렇게 되기 전에 내 손으로 죽일 거다. 넌 죽기 전까지 쭉 나와 함께야.”

……미친놈이네. 감동적이고 간질거리고 콩닥거리고 두근거리던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권이강을 흘겨보았다.

“감동파괴자.”

“결혼하기 전에 이 정도는 솔직해져야지.”

“솔직한 게 아니라 협박하는 거지. 나쁜 새끼야. 나 아직 대답 안 했거든? 너 같은 거 차버린다?”

“나와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중요하지 않아. 다른 놈이랑 결혼해봐. 식장에 들어갈 수나 있는지. 너나 결혼할 놈이나 둘 중 하나는 세상에서 사라질 거다. 이거 하나는 장담하지.”

이젠 대놓고 당당하게 협박을 했다. 이게 과연 손가락에 청혼 반지 끼워준 놈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고민해보았지만, 절대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다 어렵사리 입을 떼어냈다.

“……나는 안 사라지고 싶은데. 결혼할 놈을 사라지게 하자.”

“그래. 넌 계속 내 곁에 있기만 해.”

“응.”

그래, 뭐 어렵게 생각할 거 있나. 나만 잘 살면 되는 거지. 언제부터 남의 사정 봐줬다고. 혹시나 생길지 모를 결혼 상대자까지 챙기면서 이 각박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어.

“근데, 나는 잘 모르겠는데.”

“뭘?”

“그…… 사랑 같은 거. 너랑 섹스하는 것도 좋고, 너랑 같이 있는 것도 좋고, 너랑 같이 사는 것도 좋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결혼은 좀 특별하지 않나. 이렇게 단순히 나쁘지 않다, 좋다의 개념이 아니라 뭔가 특별한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특별한 거 뭐? 예언이라도 내려와야 하나? 아니면 예지몽이라도 꿔야 해? 궁합이라도 볼까?”

그렇게 따지면 할 말은 없지만. 단순히 좋아서, 같이 있고 싶어서 결혼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남들은 왜 결혼을 결심할까. 뭔가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을까.

“나는 너 아니면 안 돼. 그리고 너한테도 내가 아닌 다른 놈이 붙어있는 건 용납할 수 없고.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내가 소유하고 싶다. 다른 놈에게는 조금도 보여주고 싶지도 않고 나누고 싶지도 않아.”

“네가 날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건 알겠어.”

이렇게까지 열렬하게 고백을 하는데 모르면 등신이지. 키득거리며 권이강의 머리를 끌어당겨 쪽쪽 입을 맞추며 반대의 상황을 떠올려봤다.

권이강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사람과 몸을 겹치고,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고 말하는 상황이란……. 음, 확실히 좋지는 않네. 아니, 엄청나게 기분이 나쁘다. 매우 심각하게 짜증이 났다.

빨고 있던 입술을 까득, 깨물자 권이강이 얕은 신음을 흘렸다. 심통을 부리듯 잘근잘근 깨물던 입술을 뱉어내고, 양손으로 꽉 잡은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결혼하자.”

“…….”

“결혼해. 나랑 당장. 선 같은 거 말 안 나오게 인사도 하고, 결혼하기로 했다고 통보도 하고. 너희 아버지한테도 얘기하러 다시 가고.

“마음에 드는 대답이군.”

흡족한지 웃고 있는 입매가 짙어졌다. 휘어진 눈썹을 엄지로 더듬으며 깨물어 부푼 입술을 쪽쪽 빨았다.

“아버지가 우리 이렇게 어울리는 건 단순히 노는 거랬는데. 그러니까 얼른 정리하고 선이나 보라고. 결혼하겠다고 너 데려가면 기절하시겠어.”

“언제 인사드리러 갈지 날짜 정할까.”

“일단 가출한다고 나온 거니까 좀 더 버티고. 마음대로 선 자리 잡아놨으니 그때까지는 버텨야지. 그거 알아서 수습하시라고. 애타기 시작할 때쯤 가자.”

가족들이 뒤로 넘어가는 꼴을 상상하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이십 년 동안 키우면서 언제쯤 팔아먹을까 고민했을 텐데, 내가 홀랑 튄다고 하면 얼마나 속이 쓰릴까. 그래봤자 나는 두어 달 득 본 것뿐이라 낳아주고 키워준 은혜 갚을 마음도 없는데. 바랄 걸 바라야지.

“나 졸려.”

“씻고 잘까?”

“씻는 거 귀찮아. 힘이 하나도 없어.”

조금 누워서 쉬긴 했다만, 입으로는 조잘조잘 잘도 나불거렸지만 여전히 떨어진 체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축 늘어져 내 것 같지 않은 다리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자 권이강이 내 몸을 번쩍 안아 올렸다.

“양치하고 있어. 시트 갈아두고 금방 올 테니까. 와서 씻겨줄게.”

들어 올린 몸을 지탱하느라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손이 흘러나온 정액으로 조금씩 젖었다. 엉덩이가 축축해지는 것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어깨에 기대고 있던 이마를 힘주어 눌렀다. 싸놓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내가 부끄러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원인 제공자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욕조 가에 앉히고 손수 칫솔에 치약까지 짜서 내 입에 물려주었다. 젖은 손바닥이 욕실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나가. 얼른 시트나 갈아.”

권이강이 나가면 구멍 안에 고여 있는 정액부터 처리해야겠다. 눈꺼풀을 내려 시선을 돌리며 말하자 그가 낮게 웃었다.

“내가 처리해줄 테니까 무리해서 움직이지 말고. 양치만 해.”

“알았다니까.”

그가 무엇을 어떻게 처리해주려는지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짐작이 되었다. 그렇게 놔둘까 보냐. 욕실을 나서는 권이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전투적으로 칫솔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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