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바이스-84화 (84/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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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만 도련님을 모시고 돌아가주시지 않겠습니까.”

“네가 모시는 놈이 저 꼴이 되었으니 꽤 곤란해지겠어.”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사람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제 책임이고요. 아, 여기 도련님 휴대폰입니다.”

최재경에게서 내 휴대폰을 받아 든 권이강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최재경에게 내밀었다.

“그 브로커 놈 이름하고 연락처. 그리고 네 연락처도 남겨둬. 지금은 좀 그렇고, 한 달 정도 뒤에 연락하지.”

“무슨 생각이십니까.”

“나는 후환을 남겨두는 성격이 아니라서. 내 애인의 흔적이 여기서 발견되는 일은 없어야 할 거다. 오늘 일에 수경이 이름이 함께 거론될 일도 없어야 할 거고. 여긴 네게 맡길 테니, 브로커 놈은 내가 처리하지.”

권이강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최재경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권이강이 넘겨준 휴대폰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고 돌려준 휴대폰을 권이강이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에 보지.”

“모쪼록…… 도련님을 부탁드립니다.”

최재경의 인사에 권이강은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몸을 돌려 걷는 권이강의 품에서 나는 최재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걱정하지 말하는 듯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 ∞ ∞

권이강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나 역시도 입을 열지 않고 어두운 창밖으로 멍한 시선을 고정했다.

주차장 한쪽에 차를 대고 내린 권이강이 내 몸뚱이를 끌어 내려 다시 품에 안았다. 내 발로 걸을 수 있음에도 그는 깨지기 쉬운 유리 공예품을 옮기듯 한없이 조심스러워했다.

떨리는 팔로 권이강의 목을 끌어안고, 목에 얼굴을 묻어 그의 체향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어리광을 부리듯 목덜미에 뺨을 문지르자, 등을 감싸고 있는 손이 작게 토닥거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집에 들어선 그는 조용히 침실 침대에 나를 내려놓았다. 축 늘어진 어깨를 감싸고 시선을 마주하여 빤히 내 얼굴을 살피던 권이강이 입술을 내려 눈가에 입을 맞췄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부었군.”

“……슬펐어.”

“놀라기도 했겠지. 씻고 나와서 한숨 자자. 피곤할 테지만 그래야 몸이 풀려. 알겠지?”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방 온도를 올린 권이강은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았다.

“몸은 좀 따뜻해졌나.”

내 손끝에 입술을 대고 체온을 재보며 그가 흐음, 하고 신음을 흘렸다. 방 안의 공기가 빠르게 따스해진 것에 비해 식은 손끝에는 체온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동상이라도 걸린 것처럼 차가운 손과 발을 더듬어 확인하는 그의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졌다.

옷을 벗겨낸 몸을 안아 들어 욕실로 들어간 그가 나를 욕조 가에 앉혔다. 손을 살짝 담가 물 온도를 확인하고, 적당하다는 판단이 섰는지 나를 발끝부터 천천히 욕조에 밀어 넣었다.

내 등 뒤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가 나를 끌어당겨 가슴에 기대도록 했다. 입욕제를 풀었는지 몽글몽글한 거품이 둥둥 떠 있는 수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권이강이 손으로 내 몸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수경아, 몸에 힘 빼고 기대야지.”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둥글게 눌러 문지르고, 등골을 타고 내려온 손이 허리에 감겼다. 장난을 치듯 위아래로 더듬어 쓸어 올리다 앞으로 이동하여 배를 감싼다. 커다란 손이 보호하듯 배 위를 덮고 천천히 쓸어주었다.

안정감 있는 품에 몸을 기대어 늘어뜨리고, 맞닿은 피부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나직한 신음을 흘려보냈다. 뒤통수를 권이강의 어깨에 문지르며 나는 힘없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꿈같아.”

오늘 하루의 일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그게 현실이었다고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죽은 자를 눈앞에서 보는 건 현실적이지 못하지.”

젖은 뺨에 입술을 문지르며 권이강이 달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 죽은 자를 보는 것은 익숙하다. 뒷골목에 있을 때는 여러 이유로 많은 사람이 죽곤 했으니까. 일주일에도 두세 명씩은 시체가 되어 나갔다.

굶어 죽는 놈도 있었고, 맞아 죽는 놈도 있었고, 약을 하다 죽는 놈, 칼에 맞아 죽는 놈, 제 손으로 죽는 놈, 심지어 떡을 치다 죽는 놈들도 있었다. 별의별 시답잖은 이유로 죽어 나갔다. 그곳에서의 죽음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시체를 눈앞에 두고도 슬픔이나 안쓰러운 감정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나는 죽음에 익숙했다. 내 죽음의 앞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차수경의 몸이 되었다 한들 새삼스럽게 충격받을 이유는 없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혼란스럽고 맥이 풀린 이유는 내 눈앞에서 죽어버린 사람이 차동후이기 때문이었다.

“형들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죽음 앞에서는 또 다른 마음인가 보군.”

“최 기사님도 그렇게 생각하더라. 내가 놀라고 슬퍼서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얼굴이었어.”

딱 너와 같은 오해를 했어. 형이라서, 형의 죽음에 내가 마치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고 나를 걱정했다.

“내 애인을 남이 걱정해주는 건 좀 싫은데.”

애써 분위기를 띄우려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대꾸를 하면서도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다정함을 담고 있었다. 한없이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에 나는 눈을 내리떴다.

“죽이고 싶었어. ……내 손으로.”

“…….”

“내가 죽여야 할 사람이었어.”

내 말에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것을 알아차리고도 나는 말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억울하고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왜 하필 오늘이었을까.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그 생각을 하니까 너무 억울해서, 기회만 보던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울었어. 그 새끼가 죽은 게 너무 슬픈데, 그게 가족애 때문이 아니라 내 손으로 못 죽인 게 억울해서.”

침울한 목소리에 멈춰있던 손이 다시 움직여 내 머리를 토닥거렸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손이 뺨과 턱을 어루만지고, 목덜미를 거쳐 내려가 가슴을 포옥 끌어안았다.

“그 새끼 얼굴을 봤어. 너무 평온하더라. 그 새끼의 마지막을 상상할 때면, 언제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떠올렸는데. 현실은 너무 평온했어. 그렇게 죽을 자격이 없는 놈인데.”

“수경아.”

“차동후가 내 인생을 망가뜨렸어.”

몸을 돌려 권이강과 마주하며 나는 원망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 자식이 나를 망가뜨렸어. 그런데 잘못했다는 생각도 없이, 후회도 하지 않고, 저 좋은 것만 누리다 아무 고통도 없이 죽어버리는 건 너무한 거 아냐? 그럼 나는?”

그럼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죽은 부모님의 원수니 어쩌니 하는 거 나 몰라. 죽은 사람은 그냥 죽었을 뿐인데 뭘 알겠어. 뭐가 억울하고 뭐가 슬프겠냐고. 다른 건 다 모르겠고, 그냥 부모를 잃고 십몇 년을 쓰레기처럼 살아온 내 인생이 너무 억울했다.

“나는……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난 이유가 그 자식 죗값 받아내라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런데 내가 뭘 하기도 전에 죽어버렸어. 그 자식이 잘 먹고 잘 살다 잘 죽는 거나 구경하라고 살려줬나? 나 같은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거 알려주려고? 나 비참하라고?”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훌쩍거리자 권이강이 내 뒷목을 부드럽게 감싸 끌어당겼다. 눈가에 닿았던 입술이 뺨 위에, 코끝에, 입술 위에 꽃잎처럼 떨어졌다.

“그래서, 억울해서 울었군. 이렇게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내가 너무 바보 같아.”

“미안하다.”

얼굴에 수차례 입을 맞춘 권이강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뜬금없는 사과에 눈물을 매달고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 살려내는 재주가 없어서 미안해. 할 수만 있었으면 몇 번이고 살려서 분이 풀릴 때까지 죽이게 해줬을 텐데.”

“…….”

눈썹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톡, 하고 떨어졌다. 애인이 해주는 위로치고는 조금 색달라서 멍하게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애인에게 하는 투정치고는 꽤나 살벌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시체라도 빼돌려서 분풀이를 하게 해줄까. 난도질을 해서 늘어놓을래? 토막을 내서 개밥으로 주든, 돼지 밥으로 주든, 물고기 밥으로 주든 해도 괜찮고. 뭘 해야 우리 수경이 서러움이 조금이라도 풀릴까.”

당당하게 살인 예고를 하고 살인을 하지 못해 속상하다고 우는 주제에 사체 훼손을 약속하는 애인을 조금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그것으론 부족하지?”

“것보다…… 별로 의미 없잖아.”

“왜, 화풀이 정도는 될 것 같은데.”

고여 있던 눈물이 쏘옥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뜨거운 눈가를 권이강의 어깨에 문지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기분이야.”

“넌 뭐든지 할 수 있을걸.”

“아냐.”

결국 나는 가진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민재희였다. 차수경의 몸을 하고 있어도 민재희일 때와 비슷했다. 좋은 밥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침대에서 자도, 정말로 내가 원하는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살아있는 걸까.”

“나.”

“응?”

“나 만나려고. 나 때문에.”

짧은 대답은 마치 신음과도 비슷해서 응? 하고 묻자 뻔뻔한 대꾸가 돌아왔다.

“죽은 사람 살려내는 재주는 없지만. 그것 말고는 다 해줄 테니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해줄 테니까.”

살며시 턱을 눌러 벌어진 입술을 삼키며 권이강이 달콤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울지 마. 응? 수경아, 울지 마. 귓가에 번지는 목소리는 부드러운 온기를 담고 있어서, 나는 붙잡고 있던 그의 등을 바짝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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