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바이스-80화 (80/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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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실장님 기다렸죠.”

“저를 말입니까.”

“배 실장님에게 뭐 물어볼 게 있었거든요. 이 기사님, 나 코코아 한 잔만 더.”

이경진에게 잠시 떨어져 있으라는 눈짓을 보내자, 내 시선을 알아차린 그가 빈 머그를 들고 조용히 건물로 들어갔다.

“우리 집에서 가족들 빼고 우리 집안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는 건 배 실장님이잖아요. 어쩌면 형들이나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무슨 말씀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안 좋은 일 생기면 배 실장님이 가장 먼저 알고, 뭐 수습할 때도 배 실장님이 쓱싹해주고 그러잖아요. 우리 집 해결사 같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에 서늘함이 섞였다.

“아버지 곁에 있기 전에 형들 따라다녔다면서요. 십삼 년? 십사 년 전쯤까지?”

“……네, 그렇습니다.”

“십사 년 전에 작은형이 사람 죽였죠? 교통사고로.”

표정 없는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그것도 배 실장님이 청소해준 거예요? 얼마나 깔끔하게 뒤처리를 해줬는데 아버지가 그 뒤로 배 실장님을 곁에 둬요? 입막음 겸 승진인가. 치부 한번 들켰으니 앞으로 쭉 더러운 일 좀 처리해달라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내가 어려운 말을 한 것도 아닌데.”

“헛된 소문이 날까 걱정되는군요.”

“응? 이거 작은형이 말해준 건데요? 자기가 사람 죽였다고. 차로 쾅! 치어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던데?”

내 말에 배 실장이 낮게 한숨을 흘리며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로 미간을 문질렀다.

“도련님. 언행에 조심하십시오. 어디 가서 그런 농담을 하시면, 농담을 진실처럼 믿는 놈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날 조심시키기 전에 작은형 주둥이부터 조심시켜야 할 것 같지 않아요? 작은형이 다 말하고 다니는데 내가 조심할 게 뭐 있어. 그 인간을 조져야지.”

나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라며 방싯방싯 웃기만 했다.

“말해봐요, 배 실장님. 내가 나쁜 짓을 해도 배 실장님이 깨끗하게 해결해줘요?”

“도련님.”

“왜? 나는 후처 자식이라 신경 안 써요? 누구는 사람 죽여도 묻어주고, 나는 그냥 감옥 보낼 거야?”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리자 배 실장이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겨 단정하게 앉으며 물었다.

“들은 이야기가 없어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 이 사람 오해했나 보다. 내가 무슨 짓을 벌이고 수습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려는 거라고 생각하나.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어디까지 허용되는데요? 나도 작은형처럼 사람 죽여도 덮어줄 거예요? 나 감옥 안 가?”

“도련님.”

“무면허 운전에 교통사고 같은 건 쉽게 덮어주겠지? 생각해보니까 나도 면허가 없더라고.”

“언제입니까.”

손끝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던 배 실장이 휴대폰을 꺼내며 물었다. 어딘가로 전화를 하려는 건지, 아니면 중요한 것을 받아 적으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폼이 제법 익숙했다.

“아직은 아니고.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 배 실장님도 느끼잖아요? 나 성격 바뀌어서 조용히 못 있는 거. 사고 한번 거하게 칠 것 같지 않아요?”

흐흐, 하고 웃자 배 실장이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농담은 삼가십시오.”

“왜요, 나도 믿을 사람이 있어야 무슨 일이 벌어지든 든든하지.”

내가 작은놈을 죽이면 넌 어떻게 할 건데? 깨끗하게 청소해줄 거야? 아니면 내가 감옥에 잡혀 들어가는 것을 방관할 거야? 그거야말로 집안 망신인데. 이건 배 실장이 아니라 알파 아버지의 선택에 달려 있는 건가. 조금 궁금해졌다.

“난 너무 외로워. 내 편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아. 형들은 좋겠다. 무슨 짓을 해도 배 실장님이 든든하게 받쳐주니까.”

“저에겐 도련님도 똑같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제게 먼저 연락하십시오.”

그 말이 마치 배 실장에게는 나도 똑같은 차씨 집안의 망나니라고 들려왔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나는 더한 망나니가 되고 싶거든.

“배 실장님만 믿으면 돼요? 그러다 나중에 걸려서 일이 더 커지면? 무슨 짓을 저지르든 그냥 경찰한테 연락하는 게 낫지 않을까. 자수하면 조금 감형되지 않아요? 나는 새가슴이라서, 왠지 불안해. 완벽한 범죄는 없다잖아요.”

“도련님께 안 좋은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이제껏 집에 큰일 한번 없는 것을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도련님은 언제나 안전할 겁니다.”

“……작은형처럼?”

“……네.”

“작은형도 계속 안전한 거죠? 걸릴 일 없지? 작은형 이야기 듣고 너무 놀랐어. 그렇게 떠들고 다니다 혹시라도 잡혀가면 어떻게 해요. 너무, 너무 걱정이 되어서 배 실장님에게 확인하고 싶었어요.”

“네, 둘째 도련님도 안전하십니다. 둘째 도련님과 연관되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둘째 도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다니신다 해도, 그분의 말만으로는 재수사가 될 가능성조차 없습니다.”

응, 그래. 그 말을 듣고 싶었어. 그래서 내가 작은놈을 법의 처분에 맡긴다느니 하는 꿈을 꾸지 않았던 거야. 얼마나 썩어빠진 동네인지 뻔히 보이니까.

“그러니 도련님도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무슨 일이 생긴다면 꼭 제게 먼저 연락하셔야 합니다. 아셨습니까?”

확인을 받듯이 힘주어 말하며 배 실장이 내게 물었다. 나는 조용히 끄덕였고, 그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일어섰다.

“더 할 말이 남아있지 않다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이미 일어났으면서 무슨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말을 해. 그럼에도 나는 눈을 휘어 웃으며 네, 하고 답했다. 멀어지는 배 실장의 뒷모습을 보며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허리를 수그려 다리 사이에 머리를 묻고 한숨을 쏟아냈다.

“도련님.”

언제 나왔는지 이경진이 등 뒤에서 나를 불렀다.

“이 기사님.”

“네, 도련님.”

“나…… 드라이브해야겠어요. 나 좀 데리고 나가줘요. 이 집에서 좀…….”

어디로든 데려가줘. 이 집에서 나갈 수 있다면 어디든 괜찮으니까 제발 좀.

∞ ∞ ∞

“이 기사님.”

내 부름에 조용히 침묵을 고수하던 이경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몸을 틀어 뒤를 돌았다.

“네, 말씀하십시오.”

“히터 좀 내려줘요. 숨 막혀.”

“죄송합니다.”

내가 타기 전에 온열 시트를 켜놨는지, 앉아있다 보니 엉덩이도 뜨거워 죽을 것 같았다. 버튼을 눌러 온열 기능을 끄고 히터도 잠잠해지자 숨쉬기가 조금 나아졌다.

“이 기사님. 미안한데 나 커피 한 잔만 사다 줄래요? 이 기사님도 한 잔 마시고 천천히 다녀오면 좋겠는데. 나간 김에 담배도 한 대 피우고, 화장실도 갔다 오고. 암튼 이것저것하고 오는 길에 커피 한 잔만 사다 줘요.”

그냥 혼자 있을 시간 좀 달라고 하면 추운 밖에 나가 덜덜 떨고 있을 게 분명해서 심부름을 시켰다. 내 의도를 파악한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 멀어지는 이경진의 뒷모습을 보다 조금 더 멀리 시선을 던졌다.

생각을 정리하자 싶었지만 무슨 생각을 어떻게 정리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생각을 정리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막막하다. 그래, 그런 생각만 떠올랐다. 막막하기만 했다.

어린 날을 떠올려보았다. 이제는 희미해져 얼굴도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 그들과 무엇을 했는지, 함께 살 때 어땠는지도 흐릿하다.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렸고, 나는 정신이 없는 상태로 휩쓸리다 고아원에 떠맡겨졌다.

낯선 장소, 낯선 어른, 나와 같은 수많은 아이들. 그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울었다. 그럼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자고 일어나 눈을 뜨면 여전히 고아원이었고, 내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고아원에서 뒷골목 조직으로 팔려가 구걸을 했다. 여름엔 더웠고 겨울엔 추웠다. 땀띠로 짓물렀던 피부와 차가운 바람에 갈라져 피가 맺히던 손등이 아직도 떠오른다. 가뭄에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살이 짓눌려 찢어지면 빨간 피가 흘렀다.

그리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되어 소매치기를 배웠다. 굶기고, 때리고, 또 굶기고, 때리고. 그들은 결코 상냥한 사람들이 못 되었다. 그들이 가르치는 것도 분명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거부나 반항은 할 수 없었다.

죽기 전까지 민재희의 삶은 언제나 그랬다. 항상 나빠지기만 했다. 이 이상 나빠질 일이 있을까 싶은데, 그럴 때마다 나를 놀리는 것처럼 더 나쁜 일이 벌어졌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가끔 생각하곤 한다. 이 모든 일들은 과연 우연일 뿐인지. 내가 차수경 대신 이 몸을 차지해 살아남은 것도, 차수경의 가족이 내 부모님이 돌아가신 사고에 관련되어있는 것도, 단순히 ‘우연’이라는 단어에 의존하여 설명할 수 있는 일인지.

고개를 숙인 상태로 앞좌석에 이마를 기대고 있는데 조용히 뒷문이 열렸다. 이경진이 벌써 왔나 싶어 고개를 틀자 예상치 못한 사람이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어떻게 왔어?”

“지나가다 들렀지.”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었는데 웃음이 나왔다. 이런 거에 자꾸 웃어주면 버릇되는데. 그러면서도 뻗어오는 팔에 선선히 몸을 맡겼다.

“우리 애기, 왜 이렇게 우울해. 할아버지한테 또 혼났어?”

언제부턴가 권이강은 종종 나를 ‘우리 애기’라고 불렀다. 닭살이 올라오는 호칭에 치를 떨었지만, 그렇게 부를 때마다 권이강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한편으로 좋기도 했다.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우울해. 슬퍼. 울고 싶을 정도로.”

“울면 안 되는데.”

마주 보는 자세로 그의 무릎에 올라앉았다. 한 뼘 정도 높아진 시선에 그를 내려다보다 이마와 이마를 마주 댔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내 절망이 파헤쳐질 것 같아 두려워졌다.

“내가 널 많이 좋아한다고 말했었나.”

“말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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