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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오메가 아버지는 흔쾌히 나를 따라 이 층으로 올라왔다. 거실 소파에 앉으려는 아버지를 이끌어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얘기를 할지 긴장되는구나.”
“왜 다들 내가 뭐 좀 물어보려고 하면 긴장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걸 본인만 모르고 있다는 게 문제인 듯싶은데. 그런 생각은 안 들고?”
아니, 전혀. 나는 어깨를 으쓱였고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긴 다리를 매끄럽게 꼬아 앉으며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참 그림 같았다.
저 사람은 미술관장이 아니라 모델이나 연예인을 했어야 했어.
저런 화려한 얼굴로 애가 둘이나 달린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해 스무 살에 아이를 낳고 시부에게는 핍박을 받으며 살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얼굴이 아까웠다.
“그런 불손한 얼굴은 그만두고, 할 말이나 꺼내보렴.”
“나름 감탄하는 얼굴이었는데요.”
그 감탄 속에 약간의 동정이 들어있긴 했지만. 요즘 들어 내 표정이 너무 솔직하다는 말을 자주 들은 탓에, 이 속내도 아버지에게 전해진 것은 아닌가 잠시 흠칫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좀 옛날 일이에요.”
운을 띄우자 아버지가 계속 얘기해보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십사 년 전에요. 그때 집에 무슨 일이 있지 않았나요.”
“확실히 옛날 일이기는 하구나.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렴. 무엇이 궁금한 건지.”
“그러니까…… 작은형이요. 지금 작은형 따라다니는 최 기사님이 십삼 년 전부터 일했다고 들었어요. 그 전에는 배 실장이라는 분이 큰형과 작은형 통학을 시켜줬다고. 통학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외출할 때도 따라다녔겠죠.”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아버지가 으음, 하고 소리를 내며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를 떠올리듯 살짝 가늘어진 눈이 나를 훑었다.
“그때 즈음에 집에 무슨 소란이 있었다거나 사고가 일어났다거나 작은형이 좀 이상하지 않았냐고요.”
“글쎄,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없구나. 전처 자식들은 내 소관이 아니라서. 그땐 이미 그 애들도 다 커서, 내 손이 닿을 일이 없었단다. 사실 결혼할 때부터 그랬지. 네 아버지는 내게 그 아이들을 부탁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내가 무언가를 할 거라는 기대도 없었으니까.”
아예 부모 역할은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건가. 아니면 그런 책임을 지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걸까.
어쩌면 알파 아버지는 자식들의 빈 부모 자리를 채우기보다 자신의 옆자리를 채우는 것만을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오메가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이 낳은 자식이긴 하지만, 결혼을 했으니 내 자식처럼 생각하고 키울 마음이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물끄러미 아버지를 바라보고 내 생각을 정정했다. 자기 배로 낳은 자식에게도 이렇게 데면데면하게 구는데, 하물며 남의 자식에게 잘도 살갑게 대했겠네. 그거야말로 과한 기대다.
물론 지금의 상황을 보면 오메가 아버지만이 아니라 서로 거부했을 가능성도 컸다. 두 형제 놈들의 자존심과 싸가지가 대단해서, 후처로 들어온 오메가 아버지는 제 아버지의 부인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으니까. 지금 성격이 어렸을 때라고 달랐을까.
“그래서 아예 신경도 안 쓰고 있었어요? 그래도 집안 돌아가는 분위기 같은 건 알 텐데요.”
“애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아마 나 모르게 처리했을 거란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
“그래요?”
전혀 도움이 안 되네.
미간을 문지르며 끙, 앓는 소리를 내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가 아, 하고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때쯤 둘째가 이상하기는 했단다. 며칠 방에서 나오지 않았지. 학교에도 가지 않고. 지금과는 달리 그땐 나름 성실했거든. 그런데도 네 아버지가 별말 하지 않더구나.”
“그거 십사 년 전 확실해요? 내가 여섯 살 때. 작은형이 열여덟 살, 고2였겠네.”
“그래, 가을쯤으로 기억되는구나.”
십사 년 전, 가을. 시기가 비슷하긴 했다. 의심이 점차 확신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확실히, 그때부터 둘째가 난폭해졌지. 화를 내는 일도 많아지고. 사춘기라고 생각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다는 뜻이니?”
“……그야 저도 모르죠.”
매끄럽게 대꾸했지만 나를 보는 아버지의 표정에는 미심쩍음, 이라고 쓰여 있었다.
“혹시 그때…… 작은형이 운전했었어요?”
시기는 들어맞지만, 여전히 걸리는 게 있다면 차동후의 나이였다. 면허를 딸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배 실장이라는 사람이 붙어있는데 무면허로 운전을 하고 다녔을 리가 없지 않은가.
“가끔 큰애가 데리고 나가 운전 연습을 시키는 것 같긴 했었다. 그땐 그 둘도 사이가 꽤 좋았어. 둘째 성격이 바뀐 뒤로 투닥거리는 일이 많아졌지만.”
운전 연습을 시켰다면 아마도 운전을 제법 능숙하게 하는 수준이었을 거다. 믿는 백이 든든하니 연습에 그쳤을 리도 없고 몇 번 달려보기도 했겠지.
무면허가 걸리기는 하지만 그것을 제외한다면 여러모로 작은놈이 사고의 범인에 가까웠다.
만약 차동후가 정말 사고를 냈다면, 미성년자에 무면허, 교통사고로 인한 살인, 걸려 들어갈 것은 무수히 많았다. 든든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그것을 그냥 보고 있지만은 않았을 거다.
“차수경.”
꼬고 있는 다리를 한들한들 흔들던 아버지가 내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그리 오래전의 일이 기억난 건 아닐 텐데, 마치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묻는구나.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알려 하는 거지?”
“아버지에게 물어본 것이 제가 알고 있는 것이고, 무엇을 알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네요. 확실해지면 알 수 있겠죠. 그게 뭔지.”
“말장난까지 하는구나.”
안 하던 짓을 한다는 것처럼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솔직히 말해줄 수도 없는 문제였다.
내가 원래 민재희인데, 죽어서 차수경의 몸으로 들어왔다고. 그런데 내 진짜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만든 차 사고의 범인이 작은놈인 것 같다고. 그것을 말한들 쉽게 믿을 수 있을까.
“가만히 있으렴.”
“…….”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이 집안에 너무 관여하지 말고.”
“저도 나름 이 집안사람인데요.”
“아니길 바라지만, 그렇긴 하지. 그래도 가능하다면 멀찍이 떨어져 있으렴. 애쓰지 않아도 어차피 넌 다 가질 수 있을 거란다. 그건 네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거였어.”
왜 이렇게 내 주변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할까. 내가 문맥의 요지를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지나. 진지하게 고민해볼 문제였다.
“그냥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인생을 즐기렴. 차씨 가문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감사하게도 충분히 즐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차씨 집안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시려거든 선 자리 물어오는 것부터 포기하셨어야죠. 집안에 도움 되는 결혼 시키려고 하시면서, 얽매이지 말라니.”
“그건…… 네가 결혼을 해서라도 이 집에서 떨어져 있기를 바라서였단다. 이왕 하는 결혼, 조금 더 좋은 사람과 결혼했으면 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좋은 집안, 돈 많은 집안 자식이라고 그게 좋은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죠.”
내 지적에 가만히 눈을 내리깔며 생각에 잠긴 아버지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구나.”
“정말 저를 위하신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저를 생각하신다면 그냥 기다리세요. 제가 결혼할 타이밍이라고 생각되면 알아서 결혼할 마음이 드는 사람을 데리고 올 테니까.”
“지금 애인을 말하는 거니.”
“뭐, 걔도 나쁘지는 않죠.”
“연애결혼이라. 네 아버지가 반기지는 않으시겠구나.”
“어차피 아버지가 데리고 살 사람도 아닌데요.”
내가 데리고 살 놈인데 내 마음에 들면 되지, 알파 아버지가 반기든 안 반기든 무슨 상관이야.
이제껏 낳아서 먹여주고 키워주고 어쩌고 하는 공을 들이민다고 해도, 사실 내가 이 몸으로 들어온 건 두 달도 되지 않았는데. 그 공을 들이밀 차수경은 죽어버렸고, 나는 차수경 대신 그걸 갚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부채감? 웃긴다. 그걸 느껴야 할 사람은 이 집안사람들이었다. 이 집안사람들이 내게 느껴야 할 감정이 부채감이었다. 내 부모를 죽이고 유기하고 범인을 감추고 사건을 덮고, 그로 인해서 말아먹은 내 인생까지.
그래, 그들은 내게 빚이 있었다.
“궁금하긴 하구나. 네가 누굴 만나고 있는지.”
“저도 아직 파악 중이라서요. 일단 잘생겼고, 몸도 좋고, 성격도 나름 좋은 것 같고. 다정하고, 속궁합도 나쁘지 않고. 아니, 그건 꽤 좋은 편이고.”
주절주절 내뱉은 말에 아버지가 작게 한숨을 흘려보냈다. 이마를 감싸는 모양새가 나더러 보라고 하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다른 곳에 가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뭐가요? 애인 자랑이요?”
“속궁합 같은 말은 안 썼으면 좋겠구나. 자랑하듯 떠벌릴 이야기는 아니잖니.”
“내 애인 절륜하다는 건데, 뭐. 잠자리가 즐겁다는 게 자랑이지, 험담은 아니잖아요?”
“타인에게 이야기하기에는 저급한 화제구나.”
“남들은 섹스 안 하고 살아요? 다들 하면서 뭐 아닌 척. 내가 유부남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형제랑 붙어먹는 것도 아닌데. 으, 이건 상상도 하기 싫네요.”
남자는 NO에서 OK로 바뀌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 취향은 있었다. 큰놈이나 작은놈은 아니지. 내 취향이 아니야. 너무 아니다.
“아무튼 사생활에 관련된 이야기는 되도록 삼가려무나.”
“딱히 묻지 않으면 말할 일도 없어요.”
“애초에 나도 그걸 겨냥하고 물은 것이 아님에도 들어버렸잖니.”
타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아버지는 정말 뭔가를 ‘당한’ 얼굴로 침울하게 말했다. 내가 고결한 아버지의 귀를 더럽힌 기분이 들었다. 이거 좀 유쾌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