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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아직도 힘이 없어.”
자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몸 상태가 별로였다. 다행스럽게도 구멍은 무사히 오므라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구멍 안쪽의 내벽이 멍든 것처럼 욱신거렸다.
“집에 가지도 못하겠어. 오늘 수업도 죄다 빠졌고, 내일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 같아. 내 몸은 이제 못 쓰는 몸이야.”
“나한테 버려.”
“싫거든?”
앉으면 내벽이 눌려 통증이 느껴졌다. 반쯤 울면서 침대에 누워 투덜거리는 내 시중을 들어주면서도 권이강은 왠지 즐거운 얼굴이었다.
“집에 가야 하는데. 나 이러다 언제 한번 크게 걸려서 쫓겨날 것 같아.”
“다 큰 자식이 외박한다고 쫓아내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언제는 오메가 주제에 막 돌아다니다 험한 꼴 당하지나 말라고 엄포를 놓았던 것 같은데?”
“그건 페로몬 관리를 못 하니 했던 말이고.”
기억력도 좋은 새끼. 씨근거리며 내뱉은 말을 못 들은 척 그가 빈 물컵을 받아 들었다.
“집에 갈래. 여기서 하루 더 자기 전에 가야겠어.”
“저녁 먹고 가.”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야?”
그러고 보니 커튼을 치지도 않았는데 창문 쪽이 깜깜했다. 이렇게나 어두워졌는데도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에 절망했다.
“집에 가서 먹을 거야. 체할 것 같은 분위기라도 일단 나한테는 영양 보충이 필요해. 집밥 먹을 거야.”
“여기서 먹어, 집밥.”
“집밥 뭐? 난 지금 보양식이 필요하거든? 연달아 수프만 먹으면 나 쓰러져. 지금 내 영혼까지 몽땅 뽑힌 느낌이라고. 너 때문에.”
“먼저 시작한 건 너였지. 그건 확실히 해두자고.”
그건 분명 이유가 있는 시도였다. 다만 그 이유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알맹이만 홀랑 빼 먹은 권이강이 문제이지.
죄책감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권이강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충 인사를 건네고 보양식이 필요하다는 말 한마디로 용건을 다 한 그가 통화를 끝냈다.
“시켜 먹는 거 싫어. 집에 가서 먹을 거야.”
“만들어서 가져다 달라고 했어. 집밥 맞다.”
“어디서?”
“본가에서.”
“야, 거기서 여기까지 가지고 오는 데 한나절이겠다.”
“이제 겨우 여섯 시다. 당장 배고픈 것도 아니니 기다릴 수 있잖아. 어차피 씻고 옷 입고 기사 불러 집에 가는 시간에 집에서 식사 준비할 시간까지 더하면 비슷하지.”
“억지 부리지 마.”
“고집 피우지 말고. 우리 수경이, 왜 이렇게 짜증을 내지? 아직도 아파서 그래?”
고집을 부리는 건 본인이면서.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 권이강이 내 몸을 엎드려 눕히고 손바닥으로 슬슬 목덜미부터 등을 거쳐 허리까지 누르며 안마를 시작했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힘을 가해 누르는 손길에 끄응, 하고 절로 신음이 나왔다.
“착한 짓 해봤자, 이미 늦었어. 오늘 네가 잘못한 일이 수십 가지야.”
“수십 가지씩이나?”
놀라는 척 물었지만 힐끔 돌아본 권이강의 입매가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한테 화내고 강압적으로 말하고 다른 알파랑 붙어먹지는 않았나 의심하고, 내 구멍을 혹사시키고, ……헤어지자고 했는데 무시했잖아.”
“날 좋아하잖아. 진심도 아니었고.”
“진심이었거든.”
엄청나게 진심이었는데 그걸 네가 무시했을 뿐이다. 강하게 반박했지만, 그는 내 목덜미를 양쪽 엄지로 눌러 원을 그리듯 뭉근하게 문지르기만 했다.
“아, 네게 줄 게 있었는데.”
“이미 많이 줬으니까 그만 줘도 돼. 오늘 네가 나한테 준 엿만 해도 이미 한 박스야.”
“그럼 몇 박스를 더 줘도 상관없겠군.”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을 나간 권이강이 정말로 박스 몇 개를 들고 왔다. 크기가 다른 세 개의 박스는 박스라고 말을 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벨벳 케이스였다.
“자.”
“……뭔데, 이게?”
“선물. 큰 것부터 열어봐.”
새삼스럽게 무슨 선물. 필요한 것은 내가 다 살 수 있는데. 한 번도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왠지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주섬주섬 침대에 기대어 앉자, 내 허벅지 위에 가장 큰 케이스를 올려준 권이강이 어서 열어보라며 손짓했다. 케이스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다 조심스럽게 열어보자 누런 덩어리가 보였다.
“……이게 뭐야?”
“골드바 좋아한다며. 그렇다고 그냥 골드바를 주기에는 너무 밋밋하니까.”
음, 그래서 뭔가 모양을 만들었구나. 이건 개구리일까, 두꺼비일까. 못생긴 걸 보면 두꺼비인가.
“이게 그러니까…….”
“두꺼비. 복을 가져온다고 하더군.”
그렇구나. 역시 두꺼비였구나. 주먹만 한 크기의 두꺼비 세 마리가 나란히 엎드려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묵직한 놈을 한 마리 집어 들자 디테일하게 앞발까지 있었다. 금이라는 것만 아니면 좋아할 생김새는 아니었다.
나름 애인이라는 사람에게 받은 기념비적인 첫 선물이 금 두꺼비라. 으음, 하고 목을 울리며 신음을 흘렸다.
“이것도 금이야?”
“99.9% 순금이지.”
“……완전 ……멋있어. 두꺼비가 이렇게 잘생긴 거였어? 발도 달려 있는 거 너무 귀엽다.”
무게가 일 킬로짜리 골드바와 비슷한 것 같다. 세공이 들어갔다고 나중에 팔 때 가격 떨어지지는 않겠지. 금이니까 순도만 낮아지지 않으면 두꺼비든 개구리든 올챙이든 모양은 상관없을 거다.
한 마리씩 들어 올려 이리저리 뒤집어보고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상자가 이렇게 크고 무거웠구나. 만족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는 권이강의 얼굴에 뿌듯함이 스몄다.
“이렇게 좋아해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나 선물 처음 받아봐. 와, 이런 게 선물 받는 기쁨이구나. 내가 살 수도 있지만 내가 사는 거랑 느낌이 좀 다른 것 같아.”
확실히 내가 카드를 긁어 골드바를 살 때와 느껴지는 감정이 미묘하게 달랐다. 뭔가 공으로 얻은 기분. 길 가다 만 원짜리 지폐를 주웠을 때의 기분. 그것과도 좀 다른 것 같지만, 여하튼 그만큼 기분이 좋긴 했다.
게다가 내 취향에 딱 부합하는 선물이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억해뒀다가,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세공까지 집어넣는 센스를 보이다니.
“선물 많이 줘봤나 봐? 어떻게 이렇게 딱 마음에 드는 걸 줄 수 있어?”
“그런 건 아니지만……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사실 다들 말려서 걱정을 좀 하긴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센스가 없었네. 너무 마음에 들어. 완전 좋아.”
뚜껑을 닫아 옆으로 내려놓고, 어서 다음 것을 달라고 얌전히 손을 모아 내밀었다. 권이강이 웃으며 중간 크기의 케이스를 곱게 모은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
선물을 받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느껴지는 기대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건 그렇게 무겁지도 않고, 크지도 않다. 안에 들어있는 게 뭘까. 두근두근하며 케이스를 열어보았다.
“이건 뭐야?”
이번에는 정말 알지 못해서 묻는 거였다. 둥근 물체는 손에 잡히는 크기였는데, 확실한 용도는 알 수 없었다.
“이거 혹시 차 키야?”
몇 번 본 것 같기도 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어서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나 타고 다니는 차 있는데.”
“그건 그저 타고 다니는 거고, 이건 네가 운전해도 된다. 이 인승이야. 데이트할 때 타도 괜찮을 것 같지?”
내 미적지근한 반응에 권이강이 몇 마디를 덧붙였지만, 그럼에도 흥미는 일지 않았다.
“나 면허도 없는데?”
집도 없는 주제에 차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내 인생에서 차는 관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번쩍번쩍한 차를 보면 감탄을 하고 겨우 엠블럼으로 브랜드를 맞추는 정도이지, 남들처럼 몇 년도에 출시가 되었고, 연비는 얼마고, 가격은 얼마고 하는 것들을 줄줄 내뱉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이 차는 똥차네, 이 차는 수입차네. 이 차주 정도면 지갑이 빵빵하겠지. 이런 식으로 사고가 흘러갔었다.
“벤츠네?”
벤츠면 억 소리가 나오는 가격대다. 그 돈으로 그냥 마음 편하게 택시를 타면 되는데, 왜 비싼 차를 사는지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론 사고가 나면 목숨 한 번 살려줄 정도로 강력한 에어백이나 강화 유리나 강화 차체로 제작되었다면 비싼 것을 이해하지만, 그래도 억이 넘어가는 자동차는 좀.
“차는 별로인 모양이군. 그래서 면허도 안 땄나?”
아니, 돈이 없어서. 언젠가는 따야지 했는데, 그 언제가 오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차수경이 되어서는 수행기사가 붙어 다니니 운전할 일이 없어서 따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아니, 그냥. 면허가 없으니까 운전할 일이 없고, 그러다 보니 차에 관심도 안 생기고 그런 거야. 이건 그냥 네가 타면서 가끔 한 번씩 나 태워줘.”
“면허부터 따야겠군. 시간 내서 운전 좀 가르쳐야겠는데?”
“딱 좋네. 내가 애쓰지 않아도 네 입에서 먼저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겠어.”
가족끼리 운전 가르치고 배우는 거 아니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돈을 받아야 이게 일이구나 하면서 참고 가르치고, 돈을 냈으니 열심히 배우는 거지.
돈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가짐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분명했다.
“그럴 리가. 나는 배우는 것만큼 가르치는 것도 잘할 자신이 있거든.”
“잘 배우는 거랑 잘 가르치는 거랑은 다르지.”
“걱정 마. 내가 못 하는 건 없으니까.”
권이강에게는 항상 묘한 자신감이 있었다. 가진 자의 여유인지 그의 말처럼 정말 못 하는 게 없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생각해보면 그가 특별하게 무언가를 못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뭐든 잘하는 유전자를 타고나기라도 했나 보다.
“나머지는 뭐야?”
“맞춰봐.”
작은 케이스 안에 든 것은 열쇠였다. 이게 어디에 맞는 열쇠인지가 문제인데. 자물쇠 열쇠는 아닌 것 같고, 어디 문 열쇠 같은데. 미간을 찌푸리며 열쇠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권이강이 둥글게 말린 종이를 가져와 내 앞에 펼쳐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