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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바이스-64화 (64/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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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가 화를 내니까 사과를 한 거지, 딱히 뭘 잘못했다는 생각은 없는가 보다. 이 자식의 어디부터 지적해야 하나 고민하다 머리가 아파져 끙, 하고 신음을 흘렸다.

“어디 아픈가? 몸 안 좋은 곳 있어?”

“머리 아파. 너 때문에. 완전 상쾌하게 일어났는데 지금 네가 내 기분을 완전히 잡치게 만들고 있어.”

“…….”

약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야. 약은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는 건 너지.

“물이나 좀 줘.”

수프는 이미 한 그릇을 비우고 두 그릇째라 더는 미련이 없었다.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그가 득달같이 물 한 컵을 대령했다.

“정말 아픈 곳은 없는 거지?”

“그런 질문은 내 얼굴 봤을 때 제일 먼저 했어야지. 넌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내가 다른 놈이랑 뒹굴었는지가 더 중요해?”

“……미안해.”

피곤한 얼굴을 손으로 문질러 비비며, 이번에는 진짜 미안함이 담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린다. 그나마 미안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라 다행이다. 이번에도 그냥 하는 말처럼 들렸으면 진짜 화날 뻔했는데.

“몸은 괜찮아. 목욕탕 가서 시원하게 때 밀고 바나나 우유 먹을 때랑 비슷해. 완전 개운하고 상쾌해. 그것 때문에 몸이 아프거나 하지도 않고.”

“중독성은 없다지만 그래도 한 번 두 번 손대다 보면 더 강한 걸 찾게 돼. 다음부터는 근처도 가지 말도록 해.”

“알아.”

숱하게 봐왔으니 나한테 약에 대한 위험성을 설파하지 않아도 돼. 어제 완전 뿅 가는 경험을 해봤고, 오늘 아무 이상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너 회사는?”

“오늘 못 나간다고 말해뒀다.”

“그래? 괜히 나 때문에 미안하네.”

“그래도…… 다음에 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한테 연락해.”

“그리고 잔소리 오지게 듣고? 네 오메가가 어쩌니 하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퉁명스러운 말에 권이강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왠지 조금 허탈하고, 조금 화가 난, 또 조금은 슬퍼 보이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나 좀 누워있다 가도 돼?”

“몸이 안 좋은가?”

“컨디션은 좋아. 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집에서는 생각이 안 될 것 같아서.”

작은놈과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아서. 어제 들은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볼 필요가 있었다.

“내일 가도 돼. 피곤하면 조금 더 자도록 하고.”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생각 정리가 필요해서. 양치 다시 해야겠다. 잘 먹었어.”

왠지 모르게 긴장한 얼굴의 권이강을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먹으면 이게 귀찮아. 양치를 다시 해야 하잖아. 터덜터덜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 ∞ ∞

“컨디션 아직 괜찮은 거지?”

모로 누워있는 내 뒤로 올라온 권이강이 허리에 손을 감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딱 좋아. 근데 떡 칠 기분은 아니야.”

“넌 나를 발정 난 개 취급하는군.”

“널 볼 때마다 내가 발정이 나서.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잖아.”

농담처럼 대답하자 할 말이 없어진 듯, 권이강은 내 뒷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부드러운 피부의 접촉과 따스한 온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개인적인 생각.”

“……나와 더 이상 만나기 싫다는 그런 개인적인 생각은 아니겠지?”

“그럼 내가 이 침대에 누워있겠어? 당장 여기부터 나갔겠지.”

“아까…… 화 많이 났어?”

“뒤늦게 수습하려고 해봤자 늦었어. 사과도 때가 있는 법이야.”

어차피 잘못했다는 생각도 없는 사람에게 사과를 받아봤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말뿐인 사과만큼 듣는 사람을 빡치게 하는 것도 없다. 말하는 사람은 진정성 없는 말 한마디로 면죄부를 얻는데, 정작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아프잖아.

“내가 너무 강압적으로 말해서 미안하다. 널 내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한 거지. 확신이 없으니까, 네가 언제라도 날 떠날 수 있다는 걸 아니까.”

욕의 매듭을 풀고 안으로 들어온 손이 맨가슴을 부드럽게 감싸 문질렀다. 애무하듯 느리게 움직이는 손길에 고개를 뒤로 젖혀 권이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네가 무엇을 보는지, 네가 무엇을 하는지, 네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고 불안하고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내 옆에 안전하게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안심이 돼.”

“스토커의 기본자세가 되어있는 것 같은데?”

“마음 같아서는 하고 싶군, 스토킹.”

“아냐, 하지 마. 그거 범죄야.”

너 지금 범죄 대상이 될지도 모르는 나에게 범죄를 저지르고 싶다고 말하고 있잖아. 그런 주제에 뭐 이렇게 당당한지 모르겠다.

“살면서 범죄 한번 안 저질러본 사람이 있을까. 크고 작음의 차이일 뿐이지, 다들 범죄는 저지르잖아.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고 무단횡단을 하거나, 폭력을 쓰거나 살인을 하거나. 약도 하고 말이야.”

“크고 작음의 차이가 너무 크잖아. 스토킹은 스케일이 크거든?”

“약이나 살인보다는 작지.”

“그렇긴 하네. 그럼 나…… 약도 한 김에 더 큰 범죄를 저질러볼까 하는데. 아까부터 고민하고 있었거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내가 어제 들은 말이 내 환청이 아니라 진짜였는지부터 시작해서 내가 그 자식을 어떻게 해야 할지까지.

「그 사람은 반성하지 않더라고요. 자랑거리라도 되는 양, 무슨 영웅담처럼 늘어놓고. 남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놓은 주제에 뻔뻔하게…….」

차수경이 자살하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가 더 분한 것처럼, 눈가를 붉히고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그런 얼굴을 한 주제에 끝내 범인은 가슴에 묻고 알 수 없는 말만을 내뱉으며 죽어버렸다.

그때는 차수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 녀석이 내 부모님 사고의 범인에 대해 알고 있는지, 왜 그렇게 분한 얼굴을 했는지, 그런데도 왜 내게 말하지 못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어제 작은놈의 모습은 차수경이 말한 그대로였으니까. 반성도 하지 않고,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의기양양해서 영웅담을 늘어놓듯 뻔뻔하게 말을 내뱉던 모습. 그러면서도 자신이 차로 친 사람들이 누구인지 기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신경 쓰지 않는 모습.

그들에게 어린 자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모가 절실히 필요한 어린아이가 혼자 남겨졌으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 있을까.

알지 못했겠지. 신경 쓰지도 않았을 거다. 그저 자신의 죄를 덮을 생각으로 가득했겠지. 그것을 무리 없이 이루어줄 부모도 있었으니 아무 걱정도 없었을 거다.

분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내가 겪었던 고통, 아픔, 외로움, 그 모든 것들이 누구로부터 파생되었는지를 깨닫자 그 새끼를 죽이고 싶어졌다.

이제 와 뺑소니 범인을 찾아서 뭐? 내 부모는 죽어 사라졌는데. 홀로 남겨졌던 민재희 또한 세상에 없는데. 증거도 이미 사라졌을 테고, 차동후의 죄를 덮어주었던 그의 부모는 여전히 살아서 아직까지 차동후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데.

무엇을 어떻게 밝혀? 밝혀서 뭘 어떻게 해? 그 새끼가 죗값이라도 치를 것 같아?

반성도 후회도 원하지 않는다. 사과도 필요 없다. 그 자식이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고 내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바라지도 않고, 그게 가능한 인간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내 부모를 길거리에 버려두고 도망치지도, 자랑스럽게 웃으며 떠벌리지도 않았을 거다.

후회하지 않기를 바란다. 반성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 아픔을 미뤄두고 억지로 용서하고 싶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정당한 처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일까 생각 중이야. 아니, 죽여야겠어.”

후회나 반성이라는 감정을 느낄 인간이 아니다. 그건 그냥 동물이었다.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지만, 동물을 죽이면 도축이지. 그래, 내가 하려는 건 살인이 아니라 도축이다.

“말해봐. 내가 나쁜 짓을 하면 실망할 거야? 내가 끔찍해지겠지?”

몸을 돌려 권이강을 마주하며 물었다. 널 속이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너도 알 자격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유는 알지 못하더라도, 무슨 짓을 저지른 상대인지는 알아야지. 그래야 너도 내 곁에 남을지 아닐지를 선택하지.

“지금이 선택의 기로인 거야. 이거 뭐라고 하던데…… 아, 터닝 포인트. 지금이 그거야. 나…… 아주 나쁜 짓을 해야 하거든.”

이건 비밀이니까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권이강의 턱 끝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가만히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던 그가 뺨 위에 입술을 눌러 붙였다.

“겉모습에 속지 마. 아무것도 못 할 것처럼 약하고 여리고 순하게 보이는 얼굴은 내 것이 아니야. 안에는 독하고 더럽고 추한 게 있어.”

독하고 더럽고 추하고 구질구질하고 쓰레기 같은 내 영혼. 그래서 난 가끔 권이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선한 차수경의 얼굴로 그를 속이는 기분이 들어서 죄책감을 느꼈다.

“네 얼굴에 홀린 적 없다.”

“그래, 내 페로몬에 홀렸지.”

그 페로몬도 내 것은 아니지만.

만약 내가 아닌 차수경과 권이강이 만났다면, 그는 지금처럼 차수경에게 끌렸을까. 평범한 베타인 나는 너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을까. 나는 가끔 원래 나와 차수경, 그리고 권이강의 미래를 생각해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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