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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을 움직여 말을 내뱉는 것조차 귀찮아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 이동되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내 정신이 깨어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차 문을 열어 나를 끌어낸 이경진이 늘어지는 내 몸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차수경.”
멀리서 권이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빠른 발소리와 함께 가까워진 그가 이경진에게 기대어 서 있는 내 몸을 끌어당겼다.
“놔.”
“부축을 해드린 것뿐입니다.”
이경진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변명처럼 대꾸했다.
나를 끌어안은 권이강이 손으로 엉덩이를 받쳐 내 몸을 들어 올렸다. 마치 아이처럼 나를 품에 안고, 천천히 등을 쓸어주며 그가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데려오느라 수고했습니다. 삼사일 정도 지나면 진정이 될 겁니다. 그때 연락드리라고 하죠.”
“네.”
“돌아가 보셔도 좋습니다.”
존대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묘하게 고압적이다. 말투 참 이상하네. 존대를 하는데 어째서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이 더 우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권이강의 목에 손을 둘러 껴안으며 짧게 웃었다.
바짝 붙어있는 권이강의 몸에서 그리웠던 달콤함이 전해졌다. 그 냄새는 난잡하게 뒤섞여있던 페로몬과 다르게 한결 몸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이경진을 보낸 권이강이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나는 아이처럼 안겨 이동되며 그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연신 숨을 들이마셨다.
“오느라 고생했어.”
“나 많이 아팠어. ……약 먹으면 괜찮아지는 줄 알았는데, 약 먹어도 아파. 뼈가 녹는 것 같아.”
“이제 괜찮아. 땀 흘려서 옷이 축축하다. 벗고 몸 좀 닦자.”
“아무것도 하기 싫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내가 할 거니까.”
침대에 나를 눕힌 그는 조심스럽게 젖은 옷가지를 벗겨내고, 따뜻한 물에 적셔 온 수건으로 천천히 내 몸을 문질러 닦았다. 목덜미와 가슴, 등, 팔, 손가락 하나까지 정성 들여 닦아주고 보송해진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안아줘.”
내 요구에 그는 선뜻 이불 안으로 들어와 내 몸을 끌어안았다. 콧속을 가득 채우는 향기가 만족스러웠다. 나를 끌어안은 단단한 가슴에 뺨을 문질렀다.
이제 조금 살 것 같다.
“약 먹으면 다 괜찮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하나도 안 괜찮아. 먹어도 아프고 안 먹어도 아프고. 먹는 의미가 없어. 아주 좆같은 약이야.”
“페로몬을 억눌러서 알파에게 노출되지 않게 하려는 예방책 같은 거니까. 강제로 페로몬을 누르니 안 아플 수가 있나.”
“저번에 먹었을 때는 이렇게 안 아팠던 것 같은데. 그냥 조금 피곤하고 잠만 왔었는데 이번에는 이상해.”
나는 권이강에게 내가 아프다는 것을 한껏 피력했다. 그가 나를 달래고 위로하고 안아주는 것이 좋아서, 한 번도 부리지 않았던 어리광을 그에게 하고 있었다.
“그때는 거의 끝나갈 때 즈음에 먹었고, 오늘은 가장 난리를 부리는 첫날이니까. 그나마 집이었으니 다행이지.”
“외출하던 길이었어. 급하게 차 돌려서 집에 간 거야.”
“진짜 다행이었군. 알파라도 마주쳤으면…….”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할까 봐?”
“그래, 그리고 그 알파에게도 안 좋은 일이 일어나겠지.”
뭐야, 그게. 나랑 얽히면 안 좋은 일을 당한다는 건가. 내가 뭐 재앙이야? 나랑 얽힌 장본인으로서 후회라도 한다는 건가.
“나랑 얽힌 게 싫어?”
“아니, 내가 그 알파에게 안 좋은 일을 만들어줬을 거란 얘기다.”
그의 속삭임에 희미하게 웃음을 흘렸다. 권이강이 저렇게 말하는 게 좋다. 나를 아끼고 내게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가 나를 원한다는 건 묘한 뿌듯함을 느끼게 했다.
“네가 날 걱정하는 게 좋아.”
“그렇다고 걱정할 일을 만들지는 말고. 네가 숨만 쉬어도 걱정해줄 테니까.”
깍지를 끼고 있는 손을 들어 내 손등과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며 그는 사랑을 고백하는 것처럼 속살거렸다. 귓바퀴를 애무하듯 미미한 울림을 남기며 들려오는 목소리가 달콤했다.
“섹스하자.”
“목소리는 금방 잠들 것같이 들리는데?”
맹한 내 목소리를 지적하며 그가 웃었다. 마주한 가슴이 미약하게 들썩거린다. 전해지는 움직임이, 귓가에 들리는 심장박동이,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너무나도 좋았다.
“안 자.”
“좀 자두는 게 좋을 거다.”
“섹스는?”
“어차피 약 먹어서 너 서지도 않아.”
서지도 않는다니 슬픈 말이다. 나는 불알도 사라지고, 좆도 작아졌는데, 심지어 발정기 때마다 약을 먹으면 세우지도 못하나 보다.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그럼 왜 오라고 했어?”
섹스할 것도 아니면서. 그냥 집에 두지, 굳이 이곳으로 왜 불렀어. 내 작은 항의에도 그는 등에 두른 손에 꽉 힘을 주어 껴안을 뿐, 어떤 성적인 시도도 하지 않았다.
“네가 힘들어하니까. 지금 조금이나마 편해졌지?”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완전히 좋아져서 하늘에 붕 떠 있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날뛰던 페로몬은 안정을 찾았고, 무기력하던 몸은 기분 좋은 나른함에 휩싸였다.
“신기해. 페로몬이라는 거. ……몸을 완전 병신같이 만들어.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몸이 아파도 입은 여전하군.”
“응, 다 죽어가는데 입만 살았어.”
귀여운 생물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애정이 흘러넘치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권이강이 살짝 입술을 마주해 눌렀다. 담백한 입맞춤에 혀를 내밀어 핥자, 그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부드럽게 혀를 얽어 빨아들이는 움직임이 조심스럽다. 열기가 느껴지는 살덩이를 문질러 비비자, 그가 혀를 거두고 입술을 떼어냈다.
“왜…….”
칭얼거리듯 그의 턱 끝에 입술을 부비며 묻자, 단호하게 그의 머리가 흔들렸다.
“고집부리지 말고 눈 좀 붙여.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네게 필요한 건 잠이야.”
“나한테 필요한 건 넌데?”
“옆에 있잖아.”
“자기 싫어. 몸이 축 늘어져서, 꼭 가위눌릴 때처럼 가만히 있으면 내가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버릴 것 같아. 무서워.”
손가락 하나 움직여지지 않고 그대로 몸이 침전하여 다시는 떠오르지 못할 것 같아. 어떻게든 힘을 주어 손가락을 움직이고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 의무감을 느껴.
“네가 거짓말쟁이거나 엄살쟁이라는 건데, 둘 중 어느 쪽이지?”
“아닌데, 진짜인데.”
“네 페로몬이 희미해. 엄마 품에 안겨 잠든 아이처럼 아주 평온하고, 미약하지만 안정되어있어.”
짐승처럼 예민하다. 다른 거짓말도 그라면 금방 알아차릴 것 같았다. 모든 알파들이 다 이럴까, 아니면 유독 그가 예민한 걸까. 한 번쯤은 내 거짓말에 넘어가주는 척을 해도 좋으련만, 매정하기 그지없었다.
“짜증나.”
“눈도 반쯤 감겨 있고.”
“아니거든.”
“목소리도 가물가물하고.”
“아니라니까.”
“고집 피우지 말고.”
달래듯이 내 뺨과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권이강이 슬슬 등을 쓸어내렸다. 반복적인 움직임에 가뜩이나 흐릿한 정신이 더욱 몽롱해졌다. 그는 내가 잠들 때까지 단단하게 끌어안은 손을 풀지 않았고, 나는 그의 품에 안겨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안온함을 느끼며 잠에 빠졌다.
∞ ∞ ∞
“씨발, 잘난 척 좀 하지 마!”
밥을 먹고 느지막이 집에 오는 길이었다. 어두워진 정원을 걸어 올라가는데 사내 몇 명이 대치하고 서 있었다.
우리 집 정원에서 패싸움이? 정원 등에 의지하여 서 있는 사내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작은형과 뒤에 수행원을 달고 서 있는 큰형이 마치 주먹다짐이라도 할 것처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아니, 큰형은 평소처럼 감정 없이 삭막한 얼굴이었고, 작은형 역시 평소와 다르지 않게 혼자 화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좋게 넘어가주실 때 적당히 해라. 저번 일도 무마시키는 데 꽤 골치 아팠어. 언제까지 하나하나 네 뒤처리를 해줘야 하지? 아버지께 잘하겠다고 울고불고 빌었던 게 얼마나 지났다고 또…….”
“얼씨구, 이제는 생색까지? 형이 뭐 얼마나 내 뒤처리를 해줬다고? 이 새끼 또 일 쳤네, 속으로 비웃기나 했겠지.”
“차동후.”
“사람들이 차기 병원장님이라고 떠받들어주니까 세상이 네 것 같냐? 씨발, 내가 먼저 태어났으면 넌 아무것도 아니었어. 형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새끼가.”
와, 오늘따라 작은형이 강하게 나온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일 차전을 벌이기라도 했나. 분위기가 화끈하게 달아올라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했다.
작은형의 욕설에 큰형이 주먹을 휘둘렀다. 뻑, 소리가 날 정도로 처맞은 작은형의 얼굴이 돌아갔다. 꽤 아팠는지 손으로 턱을 문지르던 작은형이 큰형의 멱살을 잡았고, 한 걸음 뒤에 떨어져 있던 수행원이 앞으로 나서 작은형을 막아섰다.
“안 비켜? 건방진 새끼가.”
“고정하시죠, 도련님.”
“비키라고 했다.”
“죄송합니다.”
“어쭈, 이것 봐라? 형 믿고 까분다 이거지? 너도 내가 만만하냐? 씨발, 내가 좆밥 같아?”
“그만해. 아랫사람 보기 민망하다. 이 이상 우스운 짓은 하지 마.”
멱살을 잡고 있는 손을 밀어내고, 구겨진 셔츠를 반듯하게 펴며 큰형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적했다. 비슷한 신장인데도 묘하게 사람을 내려다보는 시선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겠지. 대신 아버지 귀에만 들어가지 않게 해. 이 이상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마.”
“왜? 아버지 귀에 들어가는 게 형한테는 좋지 않아? 아니면,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쓴다는 거야?”
“삐뚤어진 놈.”
더 이상 말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 큰형은 작은형을 남겨두고 집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곁에 있던 수행원도 큰형의 뒤를 따랐고, 작은형만이 덩그러니 자리에 남았다.
“씨발, 씨발, 씨발!”
죄 없는 잔디에 화풀이를 하던 작은형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괜히 옆에 있다 불똥이 튈 수도 있겠는데. 어색한 표정을 감추며 작은형에게 다가갔다.
“큰형은 같은 말을 해도 꼭 사람 기분을 나쁘게 한다니까. 맞은 곳은 괜찮아요?”
“쥐새끼처럼 훔쳐보고 있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