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바이스-55화 (55/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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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형수님 기분이 엄청 좋으신가 보네.”

“씨발년.”

젓가락까지 씹어 먹을 기세로 반찬을 아득아득 씹으며 작은놈이 낮게 욕설을 뇌까렸다. 욕하는 수준은 부자나 가난뱅이나 다를 것이 없다.

“마치…… 큰형이 차기 병원장으로 정해진 것처럼 구네요. 솔직히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자기가 병원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청 거들먹거리네. 진짜 큰형이 병원장 되면 볼만하겠어요. ……그죠?”

내 말이 상상력을 자극했는지 작은형이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라도 밥맛이 없을 것 같긴 했어. 작은형 성격에 이 정도면 많이 참은 거지.

말도 없이 쌩하니 나가버리는 작은형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에 모른 척 고개를 기울였다.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누가 갖든 상관없잖아요. 재미있으면 되지.”

“재밌다니 다행이구나. 중간에서 불 지피며 노는 건 상관없다만, 너무 크게 키우지는 말렴.”

우리 아버지는 어쩜 저렇게 행동과 말투에서 교양이 넘치는지 모르겠다. 아마 쌍욕을 해도 교양 있게 들릴 거다.

형수와 작은형이 빠져나간 식사 자리는 평온했다. 침묵 속에서 우리 부자는 모처럼 여유롭게 식사를 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스터디 카페에서 나오는 나를 반기며 이경진이 재빠르게 차 문을 열었다. 어차피 건물에서 나와 춥지도 않은데 걱정이 과했다.

“집으로 선생님을 모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날도 추운데 매일 이렇게 나오시는 것도 번거롭고, 또 이런 곳에서…….”

“집에는 알리고 싶지 않거든요.”

“공부한다는데 혼이 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혼은 나지 않겠지만, 이미 능숙하게 익혔다는 영어를 기초부터 다시 배운다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하니까.

요즘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을 깨닫고, 미술 수업을 받는 김에 내게 필요한 공부도 해보기로 했다. 나는 원래 못 배웠고 머리도 나쁘고 등등의 이유만 대고 있으면, 차수경으로 살아도 결국 민재희의 인생처럼 되어버릴 것 같았다.

과외 선생님은 어찌어찌 구했는데 과외받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집에서 수업받는 게 곤란하다는 내 말에 선생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스터디 카페를 추천했다. 스터디 룸을 빌리면 조용히 공부하기에 나쁘지 않다고.

그렇게 나의 과외 장소는 스터디 카페가 되었고, 나는 매일 선생님에게 기초 영어를 배우고 있는 중이다.

왜 하필 영어인가를 따지면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누군가를 만나서 수학 문제를 풀거나 과학적 지식을 나누지는 않으니까. 그나마 일상에서 필요한 것을 꼽으라면 국어를 제외하고 영어가 남았다.

참 이상하지. 한국 역사를 배우지 않아도 일상생활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영어를 모르면 일상에 불편함이 있다. 한국 사람으로서 아이러니한 일이다.

“다른 일정 없으시면 집으로 가겠습니다.”

“음, 시간 좀 보내다 저녁 먹고 들어갈까요? 집 음식이 맛있기는 한데 분위기가 영 별로거든요.”

“그럼 어디로 모실까요.”

“그러게. 보통 사람들은 어디서 시간을 때우는지 모르겠네. 다른 사람들은 시간 남으면 뭐 해요?”

내가 아는 시간 때우는 방법은 돈 안 드는 공원에 가서 앉아있거나, 지하철을 타고 돌거나, 길거리에서 사람을 구경하는 거였다. 그러면서도 항상 저 사람 주머니에는 얼마 정도 있겠구나, 하는 감을 갈고 닦았다.

“집에서 쉬는 건 제외합니까?”

“당연하죠. 집에서 밥 먹기 싫어서 이러고 있는 건데요.”

“제가 모셨던 분들은 호텔 라운지나 백화점 라운지, 골프장이나 쇼핑을 주로 하셨습니다.”

“그것도 말고. 그냥 부담 없이 평범하게 시간 보내는 방법은 없어요? 이 기사님은 시간 죽일 때 뭐 하는데요?”

“보통은 카페에 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합니다. 앞에 두 개는 데이트할 때 주로 쓰는 방법이고, 혼자 있을 때는 뒤의 두 개를 합니다.”

“오, 이 기사님 애인도 있으신가 봐. 얼마나 만났어요? 몇 살인데요? 사진 있어요?”

“일단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내 질문에 헛기침을 하며 이경진이 차를 출발시켰다. 목표를 정해두지 않고 도로로 나온 차는 하염없이 달리기만 했다.

“커피는 이미 마시고 와서 별로고, 날 추우니까 운동이나 산책도 별로고. 계속 운전하려면 이 기사님 힘드니까, 어디 차 대놓고 멍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 좋겠는데.”

“그럼 만만한 한강으로 가보겠습니다.”

“좋죠, 겸사겸사 오랜만에 사람 구경도 하고.”

흘러가는 강물 보면서 멍 때리기도 좋을 성싶다. 운전하는 이경진을 두고 휴대폰을 꺼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좀처럼 먼저 전화 거는 일이 없는 권이강에게 나는 오늘도 별 용건 없이 전화를 걸었다. 그나마 특별한 용건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주는 게 다행이다.

―여보세요.

“나. 뭐 하고 있어?”

―몇 시인지 시간 확인하고 물어야지.

“회사인 건 알지. 근데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지, 회의하고 있는지, 커피 마시고 있는지, 농땡이 피우고 있는지는 모르니까 묻는 거지.”

내 핀잔에 유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사에서 통화하면서 이렇게 크게 웃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일하고 있지만, 통화하며 농땡이 피울 여유는 만들 수 있지.

“다행이네. 쉬는 시간에도 먼저 전화하는 일이 없으니, 내가 그냥 막 걸어서 방해라도 해야지.”

―딱히 쉬는 시간이 없어서 그래. 대신 전화 오면 꼬박꼬박 받잖아?

“참 착하다, 착해. 그것도 자랑이라고.”

오늘따라 차가 많은지 길이 막혀 서 있는 도로 너머를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톡톡 창문을 두드렸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눈 내린 날이 적었다. 해가 갈수록 날씨만 추워지지 눈이 내리는 낭만을 느끼기 어려워진다. 이제 곧 삼월이니 슬슬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겠지.

―뭐 하고 있어? 조용한데.

“차 타고 이동 중이야. 수업 끝났는데 집에 가기 싫어서, 시간 좀 때우다가 밥 먹고 들어가려고.”

―뭐 하면서 시간 때울 거지?

“이 기사님이 한강 데려다준대. 거기 가서 멍 때리면서 사람 구경 좀 하다가 적당한 곳으로 밥 먹으러 갈 거야.”

적당한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난 김에 “우리 저녁 뭐 먹을까요?” 하고 이경진에게 슬쩍 말하자, 휴대폰 너머에게 권이강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밥도 같이 먹나?

“응? 그럼 뭐 나 혼자 먹어? 넌 가끔 이상한 질문을 하더라.”

―한강도 같이 가고?

“그럼 나 혼자 택시 타고 가겠어?”

이상한 질문을 한다고 했더니 더 이상한 질문을 하고 있다. 방금 한강에 가는 중이라고 말을 했는데, 확인하듯 다시 묻는 것도 이상했다.

―오늘 저녁 같이 먹을까?

“갑자기?”

―일찍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침 잘되었지. 안 그래?

“그렇긴 한데…….”

뭔가 미심쩍은 미묘한 기분이 드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뺨을 긁적이며 말끝을 흐리자 “싫어?” 하고 질문이 날아왔다.

“아니, 싫은 건 아니고. 퇴근 얼마나 빨리할 건데?”

―왜? 배고픈가? 지금 먹으러 갈까?

“지금 겨우 네 시인데?”

과하게 빠른 퇴근 같은데. 저게 가능한 건 권이강 아버지의 회사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권이강이 다니는 회사가 출퇴근이 자유로운 회사인 건가.

“어차피 시간 좀 때우려고 했어. 평소처럼 퇴근해도 될 것 같은데. 여섯 시에 봐. 아니다, 퇴근 시간이 여섯 시일 거니까 여섯 시 반 정도?”

―급한 일만 마무리하면 되니까, 얼마 걸리지 않을 거다. 한 시간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급한 일이 있는데 빨리 퇴근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돼? 여러모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회사를 다녀보지 못한 탓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래?”

―저번에 말했던 한정식집 어때? 구첩반상은 모르겠지만, 꽤 정갈하게 나오거든.

“난 가리는 거 없어. 괜찮아.”

―그럼 회사 나갈 때 연락하지. 기사랑 너무 딱 붙어있지 말고. 조수석으로 옮겨 앉거나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있지도 말고.

“뭐야, 그게.”

―넌 수행원과 너무 격의 없게 지내거든.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도 서로에게 예의다.

“그런 예의는 또 처음 듣네. 알았으니까 끝나면 연락해.”

―그래.

전화를 끊고 웃음을 터뜨리자 이경진이 힐끗 뒤를 쳐다보았다.

“저녁 약속 생겼어요.”

“다행입니다.”

“왜요? 이 기사님 나랑 같이 밥 먹기 싫었어요?”

“아닙니다. 그저 도련님처럼 대해주시는 분은 처음이라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사모님이나 병원장님이 아시면 좋아하지 않으실 거고요.”

“혼자서 밥 먹기 싫잖아요. 어차피 이 기사님도 밥 먹어야 하니까 같이 먹으면 좋지. 그렇지 않아도 내가 이 기사님이랑 너무 격의 없게 지낸다고 지금 한 소리 듣긴 했어요. 거리를 좀 둬야 예의래.”

진짜 그래요? 하고 묻자 이경진이 웃는지 작게 어깨가 흔들렸다.

“애인분이 걱정이 많으신가 봅니다.”

“무슨 걱정이요?”

“혹시라도 대화하실 때 제 이야기가 나온다면, 칠 년 사귄 여자 친구와 곧 결혼할 예정이라고 말씀드려주십시오.”

네, 하고 답했지만 여전히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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