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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데려올 수 있으니 좋은 일이지.”
“돈 한 푼 없이 쫓겨나도? 내가 사실은 주워온 자식이라거나, 아니면 병원에서 실수로 애가 바뀌었다거나, 사실 몸은 차수경인데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영혼은 다른 사…….”
여기까지 해야겠다. 이러다 정신병이 있다고 오해를 받겠어. 주절거리던 입을 꾹 다물자, 권이강이 몸을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내가 한 달 동안 봐왔던 네 모습은 거짓이었나? 아니면 네가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해?”
“그건 아니지만.”
“네가 어느 집안 자식인지 나는 모르지.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고,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네 부모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네가 골드바를 몇 개나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하지 않아.”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두 개밖에 없어. 나는 울상을 지었다.
“넌 내 거야. 네가 내 손을 잡았을 때부터 넌 내 것이었어. 네가 그걸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바뀌지 않아.”
강압적인 말과 다르게 달아오른 뺨 위를 서성이는 입술의 움직임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내가 가진 것 없이 버려져도?”
“그래.”
“내가 망나니처럼 굴어도?”
“그래.”
내 목을 감싸고 엄지로 살며시 뺨을 눌러 벌어진 입술에 혀가 닿았다. 핥듯이 스치고 지나간 혀는 매끄러웠고, 한편으로 감질나기도 했다.
“내가…… 아주 나쁜 짓을 해도? 사람을 죽여도?”
“그래. 네가 나한테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다 괜찮아. 내가 아닌 다른 놈을 좋아하지 않고, 내게서 등 돌리지 않고, 지금처럼 내 손에 기대어 나만 바라보고 있으면…… 평생 예뻐하고 사랑할 거다. 그러니까 다른 놈에게 눈 돌리지 마. 다른 놈의 페로몬에 흔들리지도 말고, 눈에 담지도 마음에 담지도 마. ……널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목을 감싸고 있던 손에 지그시 힘을 주어 누르며 권이강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압박하듯 누르는 힘이 서서히 강해지고 호흡이 빠듯해지기 시작했을 때, 마치 타이밍을 재고 있던 것처럼 손아귀에서 힘이 사라졌다.
목 안쪽으로 느껴지는 통증에 작게 콜록거리자 덮치듯 포개진 입술이 숨을 불어넣었다. 그의 팔을 더듬어 올라간 손이 어깨를 끌어안았다. 흥분한 짐승처럼 단단하게 부푼 승모근이 손바닥 아래에서 박동했다.
∞ ∞ ∞
“이 기사님, 과일 먹어요.”
“감사합니다. 저…… 도련님.”
가져온 과일 한 접시를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이경진에게 내밀자, 그것을 받으며 이경진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왜요?”
“다음 주면 학교에 나가실 텐데, ……수강 신청은 하셨습니까? 아, 물론 알아서 잘하셨을 테지만, 혹시 몰라 여쭤봤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니야, 혼자 잘 못 해. 다음 주부터 대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도 망각하고 있었다. 왜 이걸 새까맣게 잊고 사방팔방 놀러만 다녔을까.
“그게 뭔데요? 수강 신청.”
“……안 하셨습니까? 지금쯤 수강 신청 기간일 텐데요.”
“뭐 신청해야 돼요?”
“수업 들으시려면 시간표를 짜서 수강 신청을 하셔야 하는데…… 설마 모르고 계셨, 아니, 잊고 계셨습니까?”
이경진과 나는 잠시 말없이 시선만 교환했다. 나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에 당황했고, 이경진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중요한 무엇을 내가 하지 않았다는 것에 당황했다.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될까요?”
“네. 제발 도와주세요.”
주변에 대학을 나온 사람이 있어야 대학 생활이 어땠는지, 뭘 어떻게 했는지 들어볼 기회가 있었을 텐데.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나처럼 못 배우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핍박받는 사람들도, 핍박하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요즘 대학생이 삼삼해서 따먹기 좋다는 농담을 일삼았지만, 정작 대학생들이 대학에 가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들이 말하는 대학생이란 부모 잘 만나 돈 걱정 없이 자라서, 낮에는 대학이라는 쓸모없는 곳에 돈을 뿌리고 밤에는 술 마시며 돈을 뿌리는 한량이었다.
“어느 대학교에 입학하시는지는…… 알고 계시죠?”
조심스럽게 물은 이경진은 내 답변에 그나마 안심이 된 얼굴이었다. 함께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대학교 홈페이지에서 학사일정으로 들어가 내게 달력을 보여주었다.
“학기 등록은 끝난 것 같은데, 등록금은 내셨습니까?”
“나 들은 말 없는데. 돈 내는 거면 아버지가 내지 않았을까요?”
“……도련님께 우편물이 전달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사모님이나 이사장님께서 처리하셨을 겁니다.”
이경진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뒤에 작게 아마도, 하고 덧붙였다.
“수강 신청은 그제부터였네요.”
“지금도 신청되는 거죠?”
“그렇기는 한데, 좋은 과목은 아마 자리가 없을 겁니다.”
“좋은 과목이 뭔데요?”
“적당한 시간에, 적당하게 학점을 받을 수 있는 적당한 과목이라고 할까요.”
뭐야, 그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설명이다. 눈썹을 모아 미간에 주름을 만들자, 이경진이 설명하기가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어떤 교수님이 점수를 잘 주는지, 과제는 많지 않은지, 시험이 까다롭지 않은지 이런 걸 다 파악해서 과목을 선택해야 하거든요. 물론 신입생이니 그건 기대할 수 없겠지만.”
그래서 어떻게 수강 신청을 해야 한다는 거야.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았다.
“그래도 과목 이름을 보면 아, 이건 조금 괜찮겠구나 싶은 것들이 있거든요. 그것들 위주로 시간표를 짜는 겁니다. 수강 신청도 나름 전략이라서요. 그래서 수강 신청 첫날에 피 터지죠.”
과거 기억이 떠오르는지 이경진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교 수업은 듣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돈을 내고 학교에 다니는 건데 필요한 걸 알아서 알려줘야지, 왜 선택을 하게 만들어요?”
“그게 학과에 맞는 전공과목이 있고 교양 과목이 있습니다. 졸업에 필요한 학점이 있기 때문에, 이걸 계산해서 각 학기마다 나눠 듣는 거죠.”
으아, 머리 아파. 원래도 모르겠고 설명을 들어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알게 된 건 대학교가 돈을 날로 먹고 있다는 거였다. 그 비싼 등록금을 받아 처먹으면서 서비스 정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처음엔 복잡해 보이는데, 한 학기만 지나도 적응이 되실 겁니다. 너무 막막해하지 않으셔도…….”
막막해. 이경진의 말에도 전혀 위로를 받지 못했다.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나를 대신하여 뭔가를 클릭해보던 이경진이 음, 하고 소리를 냈다.
“전공 넣고, 여기에 교양 필수 넣고. 나머지만 채우면 될 것 같은데, 혹시 듣고 싶은 수업이 있으십니까?”
“그런 거 없는데요. 꼭 필요한 것만 들으면 안 돼요?”
“되긴 하지만, 그러다 나중에 졸업 학점을 채우지 못하면 곤란하실 겁니다.”
그건 몇 년 뒤의 일이잖아. 나는 당장 내년의 일도 장담하지 못하는데, 그보다 더 뒤의 일까지는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적당한 거 한두 개 넣어주세요.”
나는 무책임하게 이경진에게 떠넘겼고, 그렇게 완성된 시간표는 미술에 관련된 과목을 제외하고서도 기초 영어, 중급 영어, 심리학의 이해와 같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과목으로 채워졌다.
“영어는 어릴 때부터 배우셔서 능숙하다고 들었습니다. 기초 영어는 필수였고, 중급 영어도 자리가 남아서 넣었는데 도련님이 수강하기엔 괜찮으실 겁니다.”
전혀 안 괜찮을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한글을 깨우친 것으로도 기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그나마 구역을 관리하던 사내들 중에 한 명이 고아들을 모아두고 글을 알려줬었다. 도둑질도 뭘 알아야 하는 거라고. 표지판 글씨라도 읽을 수 있어야 도망을 친다고. 하지만 영어는 배운 기억이 없었다.
“이 기사님.”
“네, 도련님.”
“이거 일단 이렇게 두고 외출해요. 급하게 갈 곳이 생각났어요.”
“이대로 수강 신청하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지는 않지만 그보다 나은 선택지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아요. 그렇게 해주세요. 그리고 전 외출 준비 좀 할게요.”
정말 진심으로 괜찮겠냐고 바라보는 이경진을 남겨두고 나는 욕실로 황급히 들어갔다.
∞ ∞ ∞
터덜터덜 건물에서 걸어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이경진이 문을 열어주었다.
“볼일은 잘 보셨습니까.”
“……네.”
“힘이 없으시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냥…… 알고 있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받은 내 능력의 한계 때문에 슬퍼서요.”
차에 올라타기 전, 내가 나온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건물의 상단에 아주 커다랗게 걸린 미술 학원 간판이 나를 조소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 미술관으로 가요. 미리 연락은 해뒀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는지 이경진은 음악도 틀지 않고 조용히 운전에 집중했다. 묻거나 말을 걸지 않는 배려에 감사하며 나는 조금 전 미술 학원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학생, 형 누나들이 야자 안 하고 슬렁슬렁 그림 그려서 대학 간다니까 편해 보이지? 걔들은 몇 년씩 그림만 그린 애들이야. 남들 공부할 때 걔들은 물감 냄새 맡으면서 그림 그렸어. 평범한 애들 책 파고 있을 때 걔들은 그림 팠다는 것만 다르지,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는 시간 똑같아. 애초에 기본도 없는 실력으로 뭘 그리고 무슨 대학을 가겠다는 거야.」
형 누나는 무슨. 내 나이가 스물인데. 하지만 그것보다 더 화가 났던 건, 선생님이라는 사람의 말에 한마디의 대꾸도 할 수 없었던 나였다.
차수경이 그림을 그렸으니 나도 대충 따라 하는 시늉을 하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대학도 합격했겠다, 눈에 띄지만 않으면 되지 않을까. 분명 그런 느슨한 마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