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바이스-50화 (50/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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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동안 만나면서 받은 선물이나 돈 같은 거 하나도 없었고, 몇 끼 식사 얻어먹은 게 전부입니다.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버님 아들이 준 거 하나도 없고요, 다 내 부모 돈으로 처발랐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버님 아들 돈 욕심 낼 만큼 저희 집 가난하지도 않고,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고 있어요. 얼마나 어마어마한 집안에 어마어마한 돈을 쌓아두고 계시는지 모르겠는데, 남들이 다 아버님 재산 노리고 있다는 의심은 좀 버리세요. 그러고도 사회생활 가능하신지 모르겠네.”

“뭐가 어째?”

“솔직히 흔해 빠진 의사에 병원이라고 하면, 회사 다니는 사람은 더 흔해 빠졌는데요? 그 회사가 아버님 거라고 해도, 한국에 회사가 대체 몇 개예요? 병원보다 더 많은 게 회사인데. 그리고 집도 우리 집이 더 좋거든요? 우리 집은 서울에 있어요. 여기 땅값이 비싸다고 해도, 서울이 훨씬 더 비싸요. 여기 평수가 넓긴 하지만 우리 집도 층 올린 거 계산하면 이만한 면적 나올 거고.”

꿇릴 거 하나도 없는데, 왜 나한테 큰소리인지 모르겠다. 서로 까놓고 재산 비교하기 전까지는 무시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그게 뭐 다 권이강 것인가. 부모님 재산에 부모님 집이고 부모님 건물이지. 애인 인사시키는데 누가 더 많은 것을 가졌는지 뽐내는 것도 웃기다.

“내 너처럼 못 배워먹은 놈은 처음이다. 못 배운 주둥이도 뚫려있다고 말은 잘하는구나.”

“제 얼굴에 학벌이라도 적혀있어요? 잘 배우신 아버님은 대학을 한 열 번은 나오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무슨 박사 학위라도 가지셨어요? 엄청 잘 배우신 것 같은데.”

“하. 사사건건 말대꾸구나. 말 섞을 가치도 없다. 데리고 나가거라.”

꼭 이렇게 대화하다 밀리면 아예 자리를 엎어버리지. 권위를 내세우며 뻗대는 건 세 살 먹은 아이보다 못하다는 걸 모르시나 보다. 요즘은 애들도 얼마나 논리적인데.

“나름 좋게 인사드리려고 온 건데, 처음부터 너무 엇나갔네요. 아버님 아들은 저랑 만나고 있으니, 그동안은 선이니 뭐니 하는 거 안 들이미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자기도 별로 안 내켜 하고, 저도 기분이 좋지 않아서요. 그리고…… 나중에 제가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를 데리고 온다고 해도, 제발 사람처럼 대하세요. 요즘 왜 이렇게 사람을 사람 취급 안 하는 분들이 많은지 모르겠는데, 그거 상대한테는 상처예요. 남한테 상처 주고 좋은 소리 듣는 사람 못 봤어요.”

아버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무겁게 한숨을 내쉰 그가 권이강과 나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만 가거라. 더는 말 섞고 싶지 않구나.”

왠지 급격하게 피곤해진 얼굴이었다. 언성을 그리 높였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하지만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권이강은 내 등을 부드럽게 쓸며 속삭였다. 잔잔하게 웃고 있는 입술을 보니 마음이 누그러졌다.

“나가서 집 구경 좀 하지. 난 아버지와 할 이야기가 남은 것 같아서.”

“오래 걸려?”

“아니, 아주 잠깐.”

“꼴값을 한다, 꼴값을 해. 둘 다 보기 싫으니 썩 꺼지지 못해?”

얼굴을 마주하고 속닥거리자 맞은편에 앉아계신 아버님이 소리를 질렀다. 저 양반은 분위기 좋은 꼴을 못 보시네. 저러니 하나 있는 자식이 아직까지 장가를 못 갔지.

“밖에 누구 있습니까.”

“네, 도련님.”

“수경이 집 구경 좀 부탁합니다.”

권이강은 나가보라는 것처럼 슬쩍 눈짓을 했고, 나는 삐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 조금 있다가 다시 뵐게요.”

“볼일 없다.”

갈 때 인사나 드리고 가겠다는 말이었는데, 끝까지 비협조적이시네. 어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들어올 때 통과했던 문을 나섰다. 등 뒤로 나무 문이 닫히고, 신발을 신는 내 앞으로 대기하고 있던 사내가 다가왔다.

“정원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사내의 말에 나는 주변을 훑었다. 널찍한 길이 한옥 건물을 따라 쭉 펼쳐져 있었다. 담 근처에 심어진 나무가 앙상하게 가지를 드러내고 있어 조금 추운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요.”

“도련님께서…….”

아니야, 나는 이 집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이렇게 나를 내보내놓고 할 이야기가 궁금할 뿐이다.

나무 마루에 걸터앉아 방문 너머로 귀를 기울였다. 나를 안내하려고 곁에 서 있던 사내의 표정이 이상하게 썩어들어갔다.

“저…… 손님. 정원으로 안내를…….”

“쉿, 쉿!”

조용히 좀 해라. 안에서 나누는 대화가 안 들리잖아.

마구 손을 내저으며 입을 다물라고 압박하자 핼쑥해진 얼굴로 사내가 뒷걸음질을 쳤다. 내 멱살을 잡아 끌어낼 수도 없고, 가까이 있다간 저도 안의 대화를 훔쳐 듣는 꼴이 되니 그 상황이라도 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문 너머에서는 잠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고 시선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이윽고 권이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느끼신 거 없습니까.”

“무엇을? 네가 얼마나 망나니 같은 놈을 데려왔는지?”

“수경이가 했던 말이요. 많이 듣고, 또 많이 느껴보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오늘 아버지가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걸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셨던 분이니까.”

“권이강.”

“어머니 생각은 안 하십니까.”

“이 상황에서 입에 올릴 사람이 아니다.”

“아뇨, 지금 이 상황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버지에게 상처였던 그 일을 뼈에 사무치게 기억하고 계시면서, 왜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상처를 주려고 하십니까.”

“그만해! 더 이상 그 사람을 입에 올리면 너라도 용서 못 한다.”

격해진 음성이 문을 뚫고 쩌렁쩌렁 울렸다. 무슨 이유로 저렇게 흥분을 하시는 거지. 권이강의 어머니에 대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예전에 병원에서 만났을 때, 병원 VIP실에 어머니가 입원해 계시다고 했었지. 남편과 자식을 버린 어쩌고 했던 것도 같은데. 굳이 안 좋은 일을 이 상황에서 꺼내는 권이강이 이상했다.

“너는 그런 소리 듣지 않게 하려고 돈을 벌고 회사를 키웠다. 그래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으면, 이제 네 배필 정도는 고를 수 있지 않으냐. 내가 무엇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너는 그런 아비 마음도 모르고 저런 시정잡배 같은 놈을 끌어들여?”

“집안이 무슨 필요 있습니까. 제 마음이 향하는 사람인데.”

“필요 있어, 필요 있다. 그래서 내가 이 집안을 여기까지 끌어올린 게 아니냐! 넌 네 격에 맞는 집안의 사람을 들일 자격이 있어!”

“네, 격에 맞는 집안의…… 베타죠.”

베타? 권이강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파일에 있던 여자들이 그럼 죄다 베타였다는 거야? 알파나 오메가가 베타와 결혼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그리 좋지 않은 시선을 받곤 했다. 알파와 오메가는 한 쌍으로 인식되어서, 그 외의 관계는 사회적으로 배척되는 경향이 컸다. 왜 권이강의 아버지가 그를 굳이 베타와 결혼시키려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강아.”

“전 그들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합니다. 마음이 움직이질 않아요. 그냥 같이 숨 쉬고 살아있는 인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과 한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건 제게 고문이나 마찬가지인데, 아버지는 아들을 그런 지옥으로 밀어 넣으셔야겠습니까.”

“그렇다고 싫다는 오메가를 끌어올 수는 없지 않으냐. 어디 가서 납치라도 해오랴? 네가 원한다면 그리해주마.”

“그런 오메가 저도 원치 않습니다. 저를 원하는 오메가가 눈앞에 있는데 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겠습니까. 내 오메가가 내 눈앞에 있는데.”

“그렇다고 저 근본도 모르는 놈을 들일 수는 없다.”

“근본이 뭔데요. 저의 근본은 뭡니까. 아버지의 과거를 떠올려보세요. 우리의 근본이라고 뭐 얼마나 훌륭합니까.”

“너!”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말투가 여과되지 않아서 그렇지, 좋은 집안에서 잘 보듬어 키운 아이입니다. 그게 보이지 않는다면 아버지 기준으로 가격이라도 매겨보세요. 걸치고 있는 옷, 걸치고 있는 시계, 지갑, 구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지는 것이 있습니까?”

권이강과 그의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의 반 이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권이강은 베타를 싫어하고, 오메가는 권이강을 싫어하나. 권이강은 오메가라서 나를 좋다고 하는 건가. 그의 아버지와 그의 근본은 무엇인가.

“……어느 병원이라고 하더냐.”

잠시 끊어졌던 대화는 약간의 침묵 뒤에 다시 이어졌다.

“묻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코딱지만 한 병원 하나 가지고 있겠지.”

“제가 다니는 회사도 말하지 않았고요. 지금은 그저 상대 하나만 보고 만나는 중입니다. 거기에 어떤 계산이나 거래도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수경이에게 했던 아버지 말씀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아시겠죠.”

“집에 인사를 오면서 그만한 질문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고 왔어야지!”

“스물입니다. 이제 겨우 스물이에요. 그런 아이한테 무엇을 얼마나 기대하시는 겁니까.”

“오메가가 스물이면 결혼 시장에 내보낼 나이다!”

어우, 씨. 결혼 시장이라니. 어시장, 개 시장, 벼룩시장, 도떼기시장은 들어봤어도 결혼 시장은 도통 적응이 되지 않는다. 마치 자식을 사고팔기라도 하는 것처럼 들리잖아.

“제가 아버지에게 이 이상 실망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대학 졸업하고 아버지가 한국으로 절 부르셨을 때도 화를 내긴 했지만 아버지에게 실망하진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좀 실망스럽네요.”

“넌 겨우 오메가 하나 때문에 이 아비에게 실망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거냐.”

“오늘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겨보시면 아버지 자신도 실망하실 겁니다. 그만하세요, 아버지. 지금은 그냥 저를 이대로 두세요. 저는…… 행복합니다. 제 행복을 이대로 두세요.”

왠지 권이강의 목소리가 슬프게 들렸다. 내가 그의 아버지에게 한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더 가슴이 조였다.

참 이상하지. 문 너머에 있는 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왜인지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그려진다.

“……그래, 연애하거라. 그렇게 좋아 죽겠다면 연애해. 다만 돼먹지 못한 놈을 결혼하겠다고 끌고 오지는 말아라. 그때는 저놈과 저놈 부모, 그 몇 대 위까지 뭘 해 먹고 살았고 무슨 구린 짓을 했는지 낱낱이 알게 될 거니까. 내 손으로 번거로운 일을 하게 만들지 마.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니?”

아이고, 감정만 격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행동까지 극단적인 분이신가 보다.

경고가 강하게 내포된 말에도 권이강은 답이 없었다. 왜 뒤의 대화가 안 들리지? 문에 더욱 바짝 귀를 붙이는데, 드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몸을 기울인 상태로 고개를 들자, 방에서 나오려던 권이강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헤헤, 멋쩍은 웃음을 흘리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권이강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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