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바이스-43화 (43/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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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 망신시키는 놈. 네가 병원에 붙어있는 이유가 뭔 줄 알아? 네가 의대를 나와서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다. 다 나 때문에! 부모 잘 만난 덕에 붙어있는 거야! 너보다 똑똑하고 잘난 놈들 수두룩한데도 기어코 널 그 자리에 앉혀놓은 건 내 자식이라서다. 그러면 병원에 어떻게든 도움이 될 일을 해야지, 병원을 말아먹으려 들어? 이 무지렁이 같은 자식.”

철썩, 하고 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를 던지고 깨부수는 듯 요란한 소리도 한동안 이어졌다.

“집에서도 병원에서도 방을 빼야 네놈이 정신을 차리겠구나. 아니, 너는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릴 놈이야.”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버지.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그럼 절대 다시는……”

“절대 안 그러겠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매번 하는 소리도 똑같고, 하는 짓도 똑같아. 너란 놈은 발전이라는 걸 모르는 거냐?”

“아니에요, 아버지. 앞으로는 진짜, 진짜 잘할게요.”

뭐가 그렇게 두려운지 작은놈은 아버지에게 빌빌 기었다. 그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방 밖까지 흘러나왔다. 저렇게 큰 소리가 날 정도면, 뭔가 엄청 잘못을 한 모양이다.

“네 마음대로 병원을 비우고, 오진을 하고, 환자에게 신경도 안 쓰고. 앞으로 더 무슨 짓을 해서 병원에 똥칠을 할 생각이냐. 이런 거나 빨면서 인생 망치고, 병원 망치고, 집안 망치고!”

“아닙니다. 앞으로는 잘할게요. 자리 비우지도 않고, 환자에게 신경도 잘 쓰고, 아버지 실망시키지 않게…….”

오호, 저건 완전히 막 나가는 놈이었네. 병원 비우고 환자한테 신경 안 쓰는 것은 월급 받을 자세가 안 되어있는 정도이지만, 오진까지 했어? 그래놓고도 의사질 하고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저런 놈은 그냥 내보내는 게 환자한테 도움이 될 텐데.

“동후야.”

숨을 몰아쉬던 아버지가 나직하게 작은놈의 이름을 불렀다.

“네. 네, 아버지.”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얼마나 더 네 망나니 같은 짓을 봐야 하는 거냐. 잘하라는 말은 안 한다. 그냥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게 그리 어려워? 말이 안 나와야 나중에 개원이라도 해서 나갈 것 아니냐.”

“아버지!”

“지금은 내가 있으니 그나마 네 자리도 있는 거다. 네 형이 병원 물려받으면, 그때 너 어쩌려고 그러냐. 나는 자식이니 눈감고 덮어준다지만, 첫째가 그럴 성격이 못 된다는 것은 너도 알지 않니.”

큰놈이 냉정하긴 하지. 뱀처럼 교활하게 기회만 노리던 큰놈의 눈을 떠올리며, 확실히 그놈이 다음 병원장이 되면 저 덜떨어진 작은놈은 국물도 없겠구나 싶었다.

“내가 언제 너한테 뛰어나게 잘하라고 하든? 그저 한 사람 몫이라도 하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어떻게 매번 사고만 쳐. 꼭 이렇게 큰소리가 나게 만들고. 첫째 하는 것을 보면서 너는 드는 생각도 없는 거냐?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안 들어? 첫째만큼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놈들만큼이라도 하라는데 그게 어렵냐고!”

“형, 형, 그놈의 형. 형 얘기 좀 그만하세요!”

“잘 낳아줬으면 그 값을 해야지. 같은 씨를 뿌려 같은 밭에서 태어났는데 왜 이렇게 달라! 이러니 첫째와 싸움이 안 되는 거 아니냐. 너는 알파로 태어나서 포부도 야망도 없어? 차기 병원장은 첫째가 될 거라고 기정사실처럼 소문이 짜하던데, 넌 그걸 듣고도 이런 망나니 같은 짓거리를 벌이고 있느냔 말이야.”

“소문이요? 어차피 아버지도 형한테 물려주실 생각이시면서, 무슨 소문 탓을 하십니까. 날 두고 고민 한번 안 하셨으면서. 이미 아버지 머릿속에도 다음 병원장은 형이라고 정해져 있는데!”

“그러니 잘했어야지! 내가 네 뒤를 받쳐주고 있을 때, 앞으로 치고 나갔어야지. 첫째와 네 차이가 뭔지 아느냐? 첫째는 내가 주는 양분 쭉쭉 빨아먹으며 크고 빠르게 자랐다면, 넌 주는 것도 질질 흘리며 옆으로 퍼져서 잔가지나 만들어내며 빌빌거렸다는 거다. 못난 놈.”

“어차피! 어차피 난 둘째잖아요. 내가 잘났든 못났든 어차피 병원장 자리 형한테 주실 거면서 왜 내 탓을 하세요! 내가 먼저 태어났으면 그 자린 제 거였어요. 조금 먼저 태어났다고 형한테 다 주실 거였으면 나는 왜 낳았습니까? 네? 차백주가 잘난 건 나보다 먼저 태어난 것밖에 없다고요.”

응, 그건 아니야. 내가 큰놈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큰놈은 작은놈보다 여러모로 잘났다. 냉정한 성격이나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인내심, 기회를 노리는 판단력을 보면 충분히 남을 짓밟고 저 혼자서 살아남을 놈이었다. 그게 결코 인간 됨이 잘났다는 뜻은 아니지만.

“더 이상…… 아비를 실망시키지 마라. 그럼 첫째 손이 아니라 내 손으로 널 내쫓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 제발요. 제발 저한테도 기회를 주세요. 네?”

“네 무엇을 보고? 망나니 같은 네 행동? 그 덜떨어진 머리? 약이나 빨고 다니는 네 몸뚱이? 대체 내가 네 무엇을 보고 믿어야겠니. 그냥 얌전히 있다 몇 년 안에 개원이나 해서 나가거라. 더 사고 치지 말고.”

슬슬 이야기가 끝나가는 듯해서 뒤꿈치를 들고 내 방으로 넘어왔다. 대충 이 집안 돌아가는 꼴을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망나니짓은 참아도 병원에 해가 되는 것은 못 참고. 큰놈은 병원장 자리를 앞에 두고 잘 나가는 중이고. 작은놈이 문제인데, 능력도 안 되는 놈이 큰놈과 비교당하며 자라서 열등감을 느끼고 피해 의식도 있는 모양이다. 능력 없는 놈이 저러면 나중에 사고 치기 마련인데.

아버지의 말은 틀렸다. 작은놈은 포부도 야망도 없는 게 아니다. 야망이 있는데 능력이 없는 거다.

이거 살살 긁어보면 꽤 재미있는 그림이 나오겠는데. 못된 심술보에 발동이 걸리려고 했다.

∞ ∞ ∞

“혼자 살면 좋아?”

친히 주차장까지 나를 데리러 내려온 권이강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물었다.

“부모와 마찰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편하지. 왜? 독립할 생각인가?”

“아니. 난 일단 지금이 좋아.”

“하긴, 오메가 도련님이 따로 나와 살기엔 세상이 무섭지.”

무슨 소리야. 강도가 들어도 그놈이 도망갈 정도로 나는 악에 받친 놈이다. 지금 집에 머물려고 하는 이유는 차수경의 인생에 익숙해지기도 해야 하고, 제삼자의 입장으로 지켜보면 막장 드라마를 보듯이 흥미진진하기 때문이었다.

“꽤 재밌더라, 그 집안. 항상 기대 이상의 것이 나와서 지루할 틈이 없어.”

“그 집안이 네 집안인데,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칭찬받을 만하군.”

내 목덜미를 쓸며 그가 가볍게 말했다.

“이쪽으로.”

농담으로 말한 것이었는데 바로 초대를 받아 걸음 한 권이강의 집이었다. 이래서 다들 독립을 하려는가 보다. 호텔이니 모텔이니 가지 않고도 마음 편하게 집에서 데이트를 할 수 있잖아. 그런데 우리 집안 놈들은 왜 죄다 집에 붙어있을까. 자식이 많아서 그런가.

“넌 혼자지?”

“저번에 얘기했던 것 같은데 확인 작업인가?”

“아니 그거 말고, 형제 없이 너 혼자냐고.”

“그렇지. 그건 왜?”

“독립해서 살면 편한데 우리 집 자식놈들은 왜 죄다 붙어있나 생각했거든. 나눠 먹을 재산 때문인가 싶어서. 한 번이라도 눈도장을 더 찍어놔야 나중에 조금이라도 더 떨어지겠거니 싶어서 징글맞게 붙어있는 것 같아. 사이도 안 좋은데.”

그래봤자 아직까지 할아버지가 정정하게 살아있는 것을 보면, 아마 평생 독립은 어려울 것 같다. 부모 죽을 때까지 붙어살다가 숨이 꼴딱꼴딱할 때 유언장 고쳐달라고 들이밀겠지. 내가 잘했니 네가 잘했니 목청 높이고, 머리채 붙잡고 싸우고, 서로 치부 까발리고. 보지 않아도 뻔하다.

나는 미래보다 현재가 중요한 사람이니까, 언제 떨어질지 모를 유산에 미련 갖지 않고 일찌감치 한몫 땡겨 나올 궁리나 해야겠다.

“세상사는 게 다 비슷하지.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싸우고, 없으면 또 없는 대로 싸우고.”

“먹고살 걱정만 없으면 얼마가 있든 똑같지 않아? 어차피 먹고 입고 놀고 자는데 그 돈이 다 들어가는 것도 아닐 텐데.”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게 사람이거든.”

막말로 병원장을 하면 뭐하고, 병원 이사장을 하면 뭐해? 그 병원 팔아서 현금 마련할 것도 아니고. 지금 가진 돈으로도 충분히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 다들 병원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다. 의료사고 내는 아들 뒤치다꺼리해주는 걸 보면, 딱히 환자의 입장에서 환자만을 생각하고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거룩한 목표를 지닌 것도 아니고.

물론 아버지들 돈으로 생활하고 있는 내가 불평할 일은 아니지만, 옆에서 보면 참 쓸데없는 일에 기운 빼는구나 싶어서 한숨이 나온다.

“나는 잘 모르겠네.”

이해가 안 되는 족속들이라며 혀를 차고 권이강이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고 올라서자 입구부터 거실까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사진들이 보였다.

“이게 다 뭐야?”

“내가 찍은 사진들. 사진을 전공했거든.”

“의외네. 회사 다닌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아버지 때문에. 천천히 구경해.”

내게서 겉옷을 받아 들어가며 권이강은 친히 허락을 내려주었다.

크고 작은 크기의 사진이 장식 없는 나무 액자에 담겨 벽에 걸려있었다. 그것들을 천천히 살펴보며 왠지 이 비슷한 느낌의 사진을 본 적이 있음을 떠올렸다.

“나 이런 사진 본 적 있어.”

“어디서?”

“저번에…… 전시회 하더라. 매일 가서 봤었는데.”

차수경 때문에 매번 피 같은 입장료를 내고 갔었지. 죽을 날 받아놔서 미련 없이 돈을 냈지, 아니었다면 걸음도 하지 않았을 곳이다.

“내 사진전 맞을 거다. 아는 사람이 에이전트라 가끔 한 번씩 연락이 오지. 매일 가서 볼 정도로 내 팬이었다니 영광이군.”

입장료 때문에 욕을 좆나게 했다는 건 말하지 말아야겠다. 입장료만이 아니라 사진이 보는 사람 기분을 좆같아지게 만든다고 욕했던 것도.

악담에 가까운 말을 쏟아낸 사진전이 권이강의 사진전이었다니, 그때의 불편했던 기분을 지금이라도 사진사에게 퍼부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그냥 묻어두는 편이 낫겠다며 빠르게 생각을 고쳐먹었다.

분위기는 비슷한데 사진전에서 본 사진과 겹치는 건 거의 없었다. 사진전에 내걸 정도는 아닌가 싶지만, 그럼 굳이 골라 집에 걸어둘 이유도 없어서 무슨 차이인가 싶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사진을 살펴보다, 다른 사진에 비해 약간 큰 사이즈의 액자 속 사진을 보았다. 다른 사진들과 비슷한 골목길의 흑백 사진이었는데 거기 찍혀있는 작은 아이가 내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 그걸 보고 있었군. 내가 제일 아끼는 사진이지.”

“……왜?”

“그 꼬마, 좀 독특했거든. 아직도 기억나.”

권이강이 가리킨 사진 속 아이는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옷을 입고 한껏 어깨를 웅크린 상태로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건…… 열한 살의 어린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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