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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바이스-42화 (42/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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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게 애인이라고 못 박아둔 것도 아니고, 어떤 관계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만나면 섹스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밥도 먹는다. 애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짓은 다 하지만, 정작 애인이냐고 물으면 나조차도 애인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미묘한 관계였다.

“그보다 여기 어때요?”

“분위기도 좋고, 커피 맛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이런 카페도 장사가 괜찮게 되는 것 같죠?”

“네, 뭐…….”

내 물음에 이경진은 과연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표정만 봐도 대충 견적이 나온다. 저 도련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고민스럽겠지.

“이 기사님은 뭐가 되고 싶었어요? 나 같은 사람 운전해주고 따라다니는 게 꿈은 아니었을 거 아냐.”

탑처럼 높은 생크림에 시럽이 잔뜩 뿌려진 빵을 한 조각 입에 밀어 넣으며 물었다.

“요즘은 대통령이나 우주비행사 같은 꿈은 거의 안 꿉니다. 애들도 현실적이라서요. 몇 퍼센트 제외하고는 그냥 학교에서 시키는 공부 하다 수능 성적에 맞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면 전공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운이 좋으면 전공을 살려 회사에 취직하고, 더 운이 좋으면 공무원으로 빠지죠.”

“이 기사님은?”

“저는 원래 선수 생활을 하고 싶었는데, 메달 딸 실력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해온 운동이 있어서, 무엇을 할 수 있나 생각해봤더니 이쪽 일이 있더군요.

“대학교나 전공이 중요한 건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는데, 애타는 내 얼굴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이경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딱히 그런 말은 아닙니다. 대학 간판은 아직까지 중요하니까요.”

속이 답답해져서 아이스 커피를 원샷 해버리고 지잉, 조이는 통증에 머리를 움켜쥐었다.

“나는요, 뭔가가 되고 싶다거나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당장 먹고사는 것이 급했고, 상납금을 채우기에 바빴다. 어디서 돈벼락이라도 맞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림 그리신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대학교에 합격하셨다고 들었는데, 전공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전공이고 나발이고, 나한테 그림 그리는 재능이 없어요.”

“아뇨, 제가 보진 않았지만 도련님에게는 재능이 있습니다. 그러니 대학교에서도 합격시킨 게 아닙니까. 걱정하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앞으로 대학교에서 부족한 것들을 배울 시간은 충분합니다.”

아니야, 이경진은 내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감 부족이나 불안감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내 재능의 부재를 말하는 거였는데.

그림 그리는 방법도 모르고, 있던 재능도 차수경과 함께 죽어버렸다고. 당장 대학교에 들어가서 사과 하나 그리지 못할 거라고. 속에서 치미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무거운 신음만 뱉어냈다.

“내가 생각해봤어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나마 돈은 있으니까 돈을 처바르는 거야. 그렇다고 사업을 벌일 재능은 없으니까 장사를 하는 거지.”

“……네?”

“둘러봐요. 우리 오늘 엄청나게 많은 가게를 봤잖아.”

괜히 차를 두고 이경진과 함께 길거리를 걸어 다니며 군것질을 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신 것이 아니다. 그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이경진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옷가게를 하기엔 내가 센스가 없고, 식당을 하기엔 할 수 있는 요리가 없으니 주방장을 구해야 하잖아요. 피시방은 잘되는 것 같긴 한데 너무 정신이 없더라고.”

시끄럽고 더럽고 진상도 많고, 게다가 컴퓨터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소프트웨어는 물론이고 하드웨어 쪽으로도 문외한이 바로 나였다.

“무난한 게 카페 같아요. 어차피 커피는 기계가 뽑아내고, 몇 달 배우면 커피 뽑는 거 다 할 수 있대요. 아버지들한테 초기 자금 뜯어내서, 어디 경치 좋은 곳이나 한적한 곳에 열어놓으면 목구멍에 풀칠은 할 수 있겠죠.”

“……도련님. 미래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하는 건 좋지만, ……아니, 아주 좋습니다. 아주 좋은데, 아직 도련님께는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더 생각을 해보시죠. 그러고 보니 곧 학교도 나가셔야겠네요.”

“네에.”

“졸업하실 때까지는 아무도 도련님에게 무엇을 하라 강요하지 않을 겁니다. 그 시간 동안 도련님은 도련님이 하고 싶으신 일을 찾을 수 있을 거고요.”

그게 지금 문제라서 그럽니다. 당장 학교에 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 내처 그림만 그리게 하지는 않겠지만, 수업 시간에 질문이 날아온다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리게 해도 문제다. 몇 번이나 차수경이 그린 그림을 따라 그려보려 했지만, 어떻게 그렸는지조차 모르는 수준이었다.

“안 될 거야. 학교에서 쫓겨날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가서 뭘 할 수 있겠어요. 집에 연락 오고 난리 나겠지.”

“대학교에서는 수업 태도 때문에 집으로 연락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너무 과하게 걱정하고 계신 것 같은데, 일단 수업을 들어보시죠. 그래도 따라가기 어렵다 생각이 된다면, 그때 잠시 휴학을 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휴학하면 학교 안 가요?”

“최대 휴학 기간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도련님의 컨디션이 제대로 돌아올 시간은 벌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좀 좋은 방법인 것 같다. 휴학을 하고 그동안에 내가 벌어 먹고살 수 있는 일을 찾는 거다. 확실히 혼자 끙끙 앓고 있을 때보다 좋은 해결책이 나와 만족스러워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고민 상담을 하나 보지.

“고마워요, 이 기사님. 진짜 도움이 됐어요.”

손을 붙잡고 감사를 표하자 이경진이 뿌듯한 얼굴이 되었다. 원래 이 일을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라면서, 참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본받아야 해.

“집에 가면 아버지한테 휴학한다고 말해야겠어요.”

“집에, 오늘? ……도, 도련님 아직 입학식도 안 하셨는데. ……조금이라도 다녀보시고…….”

단번에 일그러진 얼굴이 된 이경진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어댔다. 같이 해결책을 찾아서 뿌듯해하고서 왜 또 이러실까. 나는 괜찮다며 빵 한 조각을 집어 이경진에게 내밀었다. 손이든, 눈꺼풀이든, 입술이든 뭐가 떨릴 때는 당이 최고다.

∞ ∞ ∞

기분이 좋아져서 저녁까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잔뜩 군것질을 했다.

옛날에는 돈 한 푼이 아쉬워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 먹는 것에도 손이 떨렸었다. 언제나 찾는 것은 가격이 싸고 양이 많은 음식이었다. 비싸고 양이 적은 음식은 아무리 맛있어 보여도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

그랬는데, 이제는 하나에 몇천 원 하는 꼬치를 양손에 쥐고 먹는 호사를 누린다. 같은 하늘 아래에 살면서 어떤 부모를 가졌냐에 따라 이렇게 생활이 달랐다. 내 부모가 살아있었다면, 그들은 어떤 부모가 되어주었을까.

지금처럼 으리으리한 집에 한도가 어마어마한 카드를 쥐여주지는 못했을지언정, 그래도 살아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 배 엄청 부르네. 저녁은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

“이런 음식 드신 거 알면 혼나실지도 모릅니다.”

“뭐 어때. 매일 먹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 번인데. 원래 군것질이 맛있는 법이잖아요.”

부른 배를 기분 좋게 통통 두드리는 나와 달리, 내 범죄에 같이 동참한 이경진은 죄책감에 괴로운 얼굴이었다.

“괜찮다니까. 이 기사님은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

“제가 할 일은 도련님을 아무 일 없이 모시고 다니는 건데…….”

휘말려버렸어,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인생은 원래 휩쓸리고 휘말리고 그러면서 사는 거지. 게다가 사고를 친 것도 아니고, 즐겁게 놀면서 군것질 좀 한 게 뭐 그리 큰 잘못이라고.

“아무 일 없었잖아요? 이 기사님은 오늘도 아주 퍼펙트 했어요. 오늘 일은 끝났으니까 퇴근하세요.”

“하아, 들어가십시오.”

“한숨도 쉬지 말고. 갈게요.”

차에서 내려 대문을 여는데 차 한 대가 다급히 다가와 정차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자 어마어마하게 인상을 쓴 알파 아버지가 차에서 내렸다.

“아버지, 퇴근하세요?”

그는 내 인사에 고개만 끄덕였을 뿐,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를 내뱉지 않았다.

아니, 저 양반은 왜 저렇게 화가 나셨대?

할아버지 댁에 다녀온 후로 알파 아버지가 다시 나를 불러 혼을 내는 일은 없었다. 별일 없을 거라며 괜찮다고 했던 오메가 아버지의 말처럼. 하지만 그 뒤로 나를 보는 알파 아버지의 시선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뭐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지.

하지만 오늘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퇴근한 것은 나 때문으로 보이지 않았다. 열린 대문을 통과해 계단을 오르는 아버지의 발걸음이 급해 보인 탓이었다.

성큼성큼 걷는 아버지의 뒤를 따르며 과연 저 양반이 누구 때문에 저렇게 화가 났을까, 짐작해보았다. 단순히 밖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면 나를 보는 순간 잔소리가 날아왔으리라.

벌컥,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 아버지는 마중 나온 고용인에게 “둘째는?” 하고 물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작은놈인 모양이다.

“이 층에 계세요.”

그 말에 아버지가 씩씩거리며 이 층으로 향했다. 쿵쿵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부터 전투적이다.

“다녀왔습니다. 저도 올라가볼게요.”

이런 건 또 구경을 해줘야 하거든. 나는 아버지가 올라간 계단을 쪼르르 올라갔다. 작은놈의 방문에 다다랐는지 쾅,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를 죽이고 작은놈의 구역으로 살금살금 발을 움직였다.

“이 새끼, 집에서 이따위 것 하지 말라고 했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아버지의 고함이 문밖으로 쩌렁쩌렁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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