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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바이스-22화 (22/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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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을 하고 있는데 남자가 나를 질책했다. 남자의 말에서 언젠가 들어보았던 단어가 나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성교육 받을 때 발정기가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난다.

「매우 조심해야 해요. 꼭 신경 써야 해요.」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당시엔 중요한 거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발정기가 언제 어떤 식으로 오는지 내가 어떻게 알고 조심한단 말인가.

“그게 발정기였구나.”

나는 새로운 것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왜 갑자기 입을 닫나 싶어서 바들바들 떨리는 팔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엎드려서 잠깐 심호흡을 하고 겨우겨우 허리를 세워 앉자, 그런 나를 무슨 동물원 원숭이 보듯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왜 그렇게 봐?”

“……발정기 처음이었나?”

“아마도?”

차수경이 발정기를 언제 겪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로서는 처음이었다. 오메가는 이런 걸 매달 겪는단 말이지. 진짜 끔찍한 일이다.

“설마 미성년자는 아니지?”

그제야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되어 웃음을 터뜨렸다. 발정기 이야기를 들을 때, 이차성징과 함께 발정기가 시작된다는 말도 들었던 듯싶다. 그런데 첫 발정기라고 했으니 남자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을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해봐.”

“뭐라고?”

“두 달 전이었으면 범죄자 되는 거였어. 두 달 차이로 범죄자 신세 면했으니 고마워해야지.”

몸이 내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아 짜증이 났는데 한순간 유쾌해졌다. 더불어 밤새 남자와 뒹군 경험도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에 나는 한층 너그러워졌다.

“나는 무슨 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는데, 이게 발정기였네. 발정기는 매달 온다며. 그럼 매달 이렇게 아파야 해?”

“마치 억제제도 모른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대체 어디서 살다 온 거지?”

아, 억제제. 억제제가 있었구나. 억제제가 이럴 때 필요한 약이었구나.

나는 확실히 똑똑한 학생은 아닌가 보다. 반성과 함께 이런 걸 어떻게 듣는 것만으로 알 수 있겠냐며 한숨이 나왔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겠지, 생각했는데 오메가로서의 삶이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워졌다.

“그러니까 어제 일은 명백한 네 잘못이라는 거다. 발정기인데 억제제도 먹지 않고 처음 보는 알파에게 매달렸으니. 법적 분쟁으로 들어가도 이건 내가 승소하지.”

“딱히 법적 분쟁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없고, 몰랐다고는 해도 어제 나쁘지 않았어. 난 기분 좋았는데 그쪽이 좆같은 소리를 지껄이니까 짜증나서 한 말이야. 방금 전에 좋다고 싼 주제에 남 탓하면서 욕하면 기분 좋을 사람이 있나.”

“……사정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건 기본 예의의 문제다. 넌 진짜 어디 섬에서 자란 것처럼 말을 하는데, 페로몬에 휩쓸려 관계 맺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배려해야지. 그건 폭력이고 강간이나 다름없어.”

그럼 내가 남자를 강간이라도 했다는 건가. 뉘앙스가 참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남자가 어느새 화를 거두고 조곤조곤 말을 하니 내가 모르는 세계의 예의인가 싶어서 대거리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미안해. 난 그냥…… 어제 좀 아픈 건 줄 알았지. 집에 가려고 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갑자기 심해지잖아. 그래서 도와달라고 한 건데 넌 말도 없이 끌고 가서 덮치질 않나. 나도 당황했다고. 나도 내 첫 경험을 이런 식으로 치르고 싶지 않았어. 게다가 내 첫 상대가 남자라니. 이건 완전 예상 밖의 일이거든?”

난 진짜 여자랑 하고 싶었다고. 그것도 내가 박히는 게 아니라 박는 쪽으로. 이십 평생 살면서 자발적으로 남자에게 뒤를 내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봤는데.

오메가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심지어 좆도 앙증맞아져서 어디에 내보일 자신감도 사라졌다.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다시 침대에 엎드렸고, 내 머리 위로 한숨을 쏟아내던 남자 역시 내 옆에 털썩 드러누웠다. 나란히 누운 우리의 몸 위로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누운 남자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오늘 보고 헤어지더라도 처음 떡 친 사람의 얼굴은 알아야지. 그래야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어색한 상황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남자의 이마부터 천천히 시선을 내려 보는데 왠지 익숙했다. 전문 지식은 쉽사리 집어넣지 못하는 머리통이지만, 어릴 때부터 눈치와 얼굴 기억하는 것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기에 남자의 얼굴을 기억 속에서 떠올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 우리 만난 적 있네?”

“…….”

내 말에 남자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알파를 낚으려는 수법은 후져. 네가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접근은 오히려 역효과라는 걸 몰랐나 보군.”

“무슨 개소리야. 저번에 병원에서, 내가 담배 줬는데 그쪽이 페로몬이 어쩌고 하더니 가버렸잖아. 그때 너 나한테 무슨 짓 했지? 그때도 몸이 이상해졌는데.”

나는 탐문하듯 물으며 이리저리 헝클어져 엉망이 된 남자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겼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남자는 내 말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담배 피우던 오메가? 그때도 느꼈지만, 진짜 여러모로 신기한 오메가야. 내가 그때 말했지? 페로몬 관리 못 해서 엄한 알파한테 나쁜 짓 당하고 후회하지 말라고.”

남자도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나 보다. 나는 꾹꾹 잡아당기던 남자의 머리카락을 놓아주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페로몬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관리해. 나 그 얘기 했다가 끌려가서 성교육까지 받았다니까. 들어도 뭔 소리인지 모르겠더만. 완전 뜬구름 잡는 얘기잖아. 발정기도 그래. 한 달에 한 번 발정기가 오니까 조심하세요, 라고 말해도 정작 발정기가 뭔지를 모르잖아. 내가 발정기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오는 것도 아니고. 내일부터 발정기가 시작됩니다, 하고 예고 문자가 오는 것도 아니고.”

“네 부모는 너를 어떻게 키운 거지?”

“아마 나름 잘 키웠을걸. 이런 것도 잘 알려줬을 텐데, 내가 사고가 좀 있어서 기억을 잃어버렸어. 그래서 그래.”

“이건 본능인데? 기억을 잃는 것과 본능을 잊는 건 다른 문제 아닌가.”

“아, 됐어. 어려운 말 하지 마. 모르는 건 배우면 되잖아. 오늘 한 가지는 알았네. 발정기가 이런 거라는 거. 발정기가 오면 억제제 먹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으니까 두 가지인가.”

역시 머리가 나쁜 놈은 몸으로 배우는 게 최고다. 앞으로 발정기가 뭔지 절대 잊을 수 없을 거다.

나의 당당함에 남자는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아버지가 나를 대할 때 한숨 쉬던 것과 비슷하다. 어쩜 차수경이 된 후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한숨만 쉬는지 모르겠다.

“이상한 놈들에게 끌려가서 나쁜 짓 안 당한 것으로 감사해.”

“본인은 이상한 놈이 아니라는 거야?”

“발정기에 눈 뒤집혀 달라붙는 오메가를 이렇게까지 멀쩡하게 뒀다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정상적인 놈이지.”

“멀쩡하긴.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구멍은 다물어지지도 않고. 네가 싸지른 게 지금도 줄줄 흐르고 있다고.”

나는 침대 위에 얼굴을 묻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누워있으려니 피로와 함께 잠이 몰려드는 기분이었다.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뜨며 애써 졸음을 참아냈다.

“그럼 발정기는 이제 끝난 거야?”

“그건 본인이 가장 잘 알겠지……만 넌 페로몬이 뭔지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아직 향은 조금 남아있군. 여기서 나가기 전에 약을 먹으면 집까지는 갈 수 있을 거다.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안 먹으면 다시 어제와 같은 증상이 나타날 거고.”

“며칠이나 계속되는데?”

“사람마다 다르지. 네 발정기가 얼마나 갈지는 나도 모르고.”

“페로몬은 향으로 알 수 있어? 어제 엘리베이터에 있을 때, 네가 가까이 오니까 좀 달콤한 냄새가 났어. 진한 초콜릿 향 같은 거.”

“그전까지는 한 번도 못 느꼈나? 발정기라 예민해져서 느꼈던 모양이군.”

“저번에 담배 피울 때. 그때는 냄새보다 뭔가 보이지 않는 게 날 누르는 것 같았어. 난 네가 초능력자인가 했지.”

내 말에 남자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남자는 손을 들어 베개 위에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페로몬 냄새는 다 똑같아? 나한테서도 초콜릿 냄새가 나?”

“사람마다 페로몬의 향은 약간씩 달라. 느끼는 것도 다르지. 넌 나한테서 초콜릿 향을 느꼈지만 다른 누구는 비릿한 피 냄새라고 할 수도 있고. 너한테서는…… 프리지어 향이 나는군. 과자꽃 향기.”

“그게 뭔데?”

“노랗고 귀여운 꽃.”

차수경 얼굴이 좀 예쁘장하긴 하지. 귀엽다는 수식어도 충분히 어울리겠지만, 정작 그 안에 들어있는 건 나라서 조금 불만스러웠다.

“……아무튼 고마워.”

“꽃냄새라고 해서 좋은가 보지?”

“아니, 그거 말고. 어제 도와줘서. 진짜 나쁜 짓 당할 수도 있었잖아. 여러 가지 알게 되기도 했고. 내 성교육 선생님보다 나은 것 같아.”

내처 섹스만 했고, 겨우 시작한 대화도 격한 감정에서 서로의 탓을 한 것이었다. 다행히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오해를 풀고 대화를 이어나가는데, 생각 외로 남자는 상냥했고 목소리 또한 낮고 부드러운 울림을 담고 있어서 점차 마음이 안정되어갔다.

평온한 기분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섹스를 하고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 신기하면서도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어이, 자지 마.”

“안 자. 그냥 눈 감고 있는 거야.”

정신이 몸에서 멀어지는 와중에 내 볼을 톡톡 건드리며 남자가 말했다. 아니야, 너 지금 자고 있어. 작게 웃으며 속삭이는 목소리도 들렸다.

“아까부터 네 전화가 울리는 것 같은데.”

“가져다줘. 허리가 빠질 것 같아서 못 움직여.”

이대로 일어나면 상체와 하체가 따로 노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내 엄살에 남자는 웃으면서도 친히 휴대폰을 가져와 내 손에 쥐여주었다.

액정을 살피자 아버지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제야 내가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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