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마치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좁은 복도를 지나자 큰 홀이 나타났다. 홀이라기보다는 조금 큰 거실과도 비슷했다. 한쪽으로 길게 바가 있고 테이블도 있고 소파도 있었다. 그 공간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주춤주춤 걸음을 옮기자 근처에서부터 하나둘씩 시선이 모였다. 삼삼오오 모여있던 사람들이 입술을 가리고 수군거리는 것도 보였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으로 관찰당하며, 나 역시도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나를 오라고 한 차백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존재감 없이 있든 말든 일단 차백주에게 왔다고 얼굴은 보여야 할 성싶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마치 말이라도 걸까 봐 두려운 것처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야, 나도 니들이랑 말하기 싫거든.
저들의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쯧, 혀를 차며 슬슬 차오르는 짜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차백주 이 새끼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전화라도 해봐야 하나 싶어 휴대폰을 꺼내는데, 한쪽에서 나오는 차백주가 보였다. 나는 잰걸음으로 차백주에게 다가갔다.
“조금 늦었죠? 죄송합니다.”
“……온지 몰랐구나. 사람들이랑 인사는 했니?”
아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인사를 해. 아는 얼굴도 없고 다가오는 사람도 없는데 허공에 대고 인사를 하냐? 대답 대신 웃기만 하자, 차백주가 마치 들으라는 것처럼 쯧쯧 혀를 찼다.
“누구야, 백주 씨?”
마치 백수 씨로 들리는 것 같아서 간신히 웃음을 참아냈다. 차백주의 이름을 지을 때 한번 불러보고 짓지 그랬을까. 분명 작명소에서 좋은 이름이라고 하니 돈 주고 받아왔을 거다.
“차수경.”
“아, 그 동생?”
이름만으로 소개가 충분할 만큼 내가 유명한지 아니면 그냥 내 소개를 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내 소개를 추가로 하지 않아도 차백주의 옆에 있던 여자는 내 정체를 알아차렸다. 여자의 말에 차백주의 얼굴 위로 살짝 짜증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빠르게 캐치해냈다.
어디 가서 동생이라고 말하기도 싫으냐? 그럼 여기 오라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안 좋은 일이 있었다더니, 멀쩡하네?”
“다행스러운 일이지. 괜한 구설수로 이리저리 입에 올라가기라도 하면 할아버님 보기 부끄러웠을 테니. 그렇지 않아도 집에 새사람 들인 것을 아직까지 마음에 들지 않아 하시는데.”
야, 니 할아버지의 속내를 이렇게 만인 앞에서 말하는 게 더 부끄럽다. 그걸 나한테 알리고 싶었으면 그냥 둘이 있을 때 내 면전에서 말하지 그랬냐.
“어머, 아직도 그러셔? 하긴 이사장님 마음도 이해는 돼. 일하는 사람 들일 때도 신경 써야 하는데 가족 들이는 거면 더 신경 써야지. 근본 없는 사람을 들이면 이래저래 피곤하잖아. 적응 못 하고 집안 망신이나 시키지를 않나. 재산 보고 들어온 사람들은 자식 낳아놔도 꼭 사고가 터지더라고. 급 떨어지는 피가 어디 가는 건 아니겠지만.”
그러면서 여자는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너처럼, 이라고 말하는 눈치라 이걸 들이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이리 와라. 인사를 시켜줄 테니.”
“딱히 그럴 필요는…….”
“너도 우리 집안사람이라면 이런 대외적인 활동도 해야 한다. 언제까지 네 아버지 뒤에 숨어있을 생각이냐.”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는데 차백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일침을 놓았다.
딱히 내 아버지 뒤에 숨을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저기 인맥 만들어가며 살고 싶지도 않고, 그저 조용하고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인데. 내가 여기 있는 사람들과 알고 지낸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무슨 도움을 받을 일도 없는데 왜 알아야 하지? 정말 의문이었다.
심지어 아버지도 여기 오기 전에 최대한 조용히 있다 오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차백주의 생각은 다른 듯, 그는 나를 이끌어 홀의 정중앙으로 나아갔다.
“자기, 나는?”
“이야기 좀 나누고 올 테니까, 너도 알아서 시간 때우고 있어.”
“너무하네. 오늘 나랑 같이 있을 거 아니었어?”
“나중에.”
저기요, 지금 저도 있거든요? 그런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둘만 있을 때 하지 그래요. 아무리 내가 길가의 돌멩이 같은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 과하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분명 저 여자는 집에서 보았던 형수가 아닌 것 같은데. 이거 형수가 알아도 상관없는 건가, 아니면 내가 말을 옮기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는 걸까.
“오, 차 닥터. 옆에는 뭐야? 파트너 그새 바꿨어?”
“차수경. 내…… 막냇동생. 이쪽은 일신 자동차 둘째, 백길용. 인사하거라.”
“차수경입니다.”
“이쪽이 그 말 많던 차 닥터 동생이야? 우리 처음 보는 건가?”
반가움보다 신기함으로 물든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내민 손을 가볍게 잡아 흔들며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정말 처음 보는 건지 언제 한번 본 적이 있는지 알 길이 없었으니까. 대답하기 곤란할 때는 그냥 웃는 게 최선이었다.
“사고당했었다며. 몸은 괜찮고?”
“네,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물론 차수경보다 액면가가 높긴 하다만, 그래도 초면에 예의 좀 장착하지.
“차 닥터가 걱정이 많았겠어. 막냇동생이 그런…… 안 좋은 사고에 휘말려서 말이야. 사람도 하나 죽었다지?”
가족도 아닌데 참 자세히 알고 있다. 안 좋은 사고라고 말하지만 그게 차수경의 자살 소동이라는 것도 대충 알고 있는 듯했다.
“예, 뭐. 큰형이 걱정을 많이 해주셨죠. 일이 바빠서 입원해있는 동안 얼굴 한번 본 적이 없지만. 저보다 형의 일이 너무 바쁜 것 같아 걱정이 되더라니까요. 같은 병원에 있으니까 보통은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였을 텐데, 동생 병문안도 못 올 정도면 대체 얼마나 바쁘다는 거야. 그렇죠?”
내 대꾸에 백길용은 차백주를 바라봤고, 차백주는 인상을 구기며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런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
“불필요한 말은 아니죠. 형이 오지게 바쁜 건 사실이잖아요? 그러니까 병원에 있는 동안 한 번을 못 봤지. 쓰러지기라도 하실까 봐 이 동생이 걱정이 많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절 챙겨 모임까지 나오시고. 정말 형만 한 아우가 없네요. 전 병문안 한번 안 오셔서 조금 서운했거든요.”
집에서는 말 한번 걸지 않았으면서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집안 얘기를 하겠다면야, 나도 할 말이 많지. 오늘 진흙탕 싸움을 한번 벌여보자. 조금씩 전투력에 발동이 걸리고 있었다.
“동생 성격이 아주 재미있네. 잘 놀다 가고. 다음에도 볼 수 있나?”
“큰형이 데리고 와주신다면 뭐 또 올 수 있겠죠. 그렇죠, 큰형?”
“인사시킬 곳이 많아서 우린 이만.”
“어, 다 돌고 나면 이쪽으로 합류해. 모처럼 재미있는데, 동생이랑 얘기 좀 더 하고 싶네.”
백길용의 말에 형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내 어깨를 붙잡은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소개받는 자리에서 말이 많구나. 그냥 인사만 해라.”
“알아두라고 인사시키는 거잖아요. 사람을 알려면 대화를 해야죠. 형이 중간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내 입으로 얘기하는 게 더 친근할 것 같은데. 아니에요?”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차백주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 왜? 오늘 한번 밑바닥을 보고 가려고 했는데, 왜 내 말을 막으려고 그래?
차백주가 원하는 포지션이 뭔지 대충 이해는 가지만, 오늘 차수경은 차백주의 기대와는 다르게 쌈닭이 될 예정이었다. 오늘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건드리면 좆 된다는 것을 뇌리에 박아줄 생각이다.
그 뒤로도 차백주는 몇몇 사람에게 나를 인사시켰지만, 그때마다 나불거리는 내 주둥이 때문에 그나마 입가에 걸고 있던 대외적인 미소가 사라졌다.
“오늘 네 태도에는 문제가 많구나.”
“뭐가 문제인지 말씀해주시면 고치도록 노력은 해볼게요. 근데 나는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는데. 제가 말이 좀 많았나요? 어쩔 수가 없는 게, 자꾸 물어보잖아요. 이상한 소문 나지 않게 해명하려고 데려오셨다면서요. 그러면 보여줘야죠, 나 멀쩡하다고. 찐따같이 입 다물고 있다 진짜 이상한 오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요. 형 얼굴에 먹칠하는 거잖아요.”
응, 입을 다물고 있어도 입을 열고 있어도 어차피 네 얼굴에 먹칠은 할 거야.
처음엔 약간의 기대감도 가지고 오긴 했는데, 차백주와 여자의 대화를 듣고 바로 노선을 변경했다. 얌전히 입 다물고 있다가 오라는 아버지의 충고도 오늘은 깔끔하게 무시해주기로 했다.
“뭐, 더 인사시켜줄 사람 없어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우리 큰형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나 보다. 저 사람은 몰라요? 계속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데, 가서 아는 척이라도 해볼까요?”
여기 있는 모두와 한마디씩은 나눠보자고 의욕적으로 나서자, 차백주는 나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내가…… 조금 피곤하구나. 난 좀 쉬었다 와야 할 것 같으니 알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거라. 집안 먹칠할 일은 만들지 말고.”
“걱정 마세요. 여기서 또 뛰어내리기라도 하겠어요. 근데 혼자 쉬시는 거예요? 아까 그분이랑 같이 쉬시나? 형수님은 왜 여기 안 오셨어요? 형수님도 있는 집 자식 같던데. 형수님 바쁘시대요? 내가 전화해볼까요? 맞네, 내가 형수님 연락처를 모르네.”
“차수경.”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얼굴로 눈을 끔뻑거리며 차백주를 올려다보았다. 미간을 한껏 찌푸린 얼굴로 차백주가 꽉 이를 깨물었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 ……이렇게 대답하기를 바라셨죠? 여기 오면 막 움츠리고 찌그러지는 거 보고 싶으셨어요? 나 죽다 살아났더니 우울증이 조울증으로 바뀐 것 같더라고요. 지금 조증 온 것 같은데. 텐션 완전 높아요. 여기서 춤도 출 수 있을 것 같은데, 한번 보실래요?”
내 말에 차백주의 안색이 하얘졌다. 똥 밟았구나, 하는 얼굴이었다.
조울증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예전의 차수경보다 텐션이 높은 것은 사실이라 차백주의 입장에서는 진짜 조증으로 보일 거다.
고상함으로 상대를 뭉개는 것만 알고 계신 큰형님은 너 죽고 나 죽고 하는 마음으로 달려드는 미친개를 상대하는 법은 모르는 모양이다.
원래 이럴 때는 빤스 벗고 같이 달려들어야 하는 건데, 강단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남을 뭉개는 것은 좋지만 본인은 조금의 흠도 나지 않기를 바라거나. 그건 너무 날로 먹는 심보이지 않나.
차백주는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고 내게 등을 돌려 비척비척 걸어 사라졌다. 홀의 정중앙에 남겨진 나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아까보다 나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더욱 강렬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