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바이스-8화 (8/170)

8

“자, 혼란스러운 마음은 이해합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죠.”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간 병실은 고요했다. 나는 억지로 입혀진 환자복 위에 이불을 둘러쓰고 침대에 웅크린 채 앉아있었다.

완전히 미쳤다느니 진정제를 놔야 한다느니 소란을 피우던 남자는 언제인지 모르게 사라졌고, 그 빈자리를 하얀 가운의 의사가 차지했다.

서둘러 달려왔는지 의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나에게 안정을 요구하는 의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있어서, 오히려 안정이 필요한 것은 의사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난 미친 게 아니라니까요. 여기 병원이 이상한 거라고요. 완전히 미쳤어. 이게 말이 돼요? 내 얼굴, 내 몸 전부 내 거가 아니라고요. 어떻게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을 수가 있어?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차수경 씨. 차수경 씨는 지금 본인이 차수경 씨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겁니까?”

“주장하는 게 아니라, 난 차수경이 아니라고. 난 민재희라고요. 난 차수경이 누군지도 몰라. 이 얼굴이었던 녀석 이름이 차수경이에요? 난 그냥 걔를 몇 번 만난 적만 있지 이름도 모르는 관계예요.”

“으음. 그래요. 차수경 씨의 주장은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난 차수경이 아니라니까!”

대체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거야? 차수경이 아니라고 말을 했더니 차수경 씨의 주장을 알아들었단다. 차수경이 아니라는데 알아들었다면서 차수경이라고 부르는 건 무슨 개똥 같은 소리인가.

“그, 그래요. 민재희 씨. 우리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봅시다. 그럼 본인이 민재희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뭡니까?”

“내가 민재희인데 민재희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답해야 합니까? 의사 선생님 이름이 뭐예요? 내가 댁이 댁이라는 이유를 대라고 하면 댁은 뭐라고 답할 건데? 말이 되는 질문을 좀 해요. 생각 좀 하고 질문을 하라고요.”

쏘아붙이는 내 말에 의사가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어색한 헛기침이 몇 차례 터져 나오고 가까스로 의사가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를 진행해보도록 하죠. 민재희 씨는 언제부터 민재희 씨였습니까. 그러니까…… 언제부터 본인이 차수경이 아닌 민재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죠?”

“뭔 개소리야. 난 원래부터 민재희였지. 태어날 때부터 민재희였다고. 이 녀석이 살고 싶지 않다면서 육교에서 뛰어내리려고 했어요. 그래서 녀석을 구하려고 붙잡았는데 같이 떨어져 버렸단 말이야. 그리고 깨어났더니 이 병원 인간들이 나를 녀석의 모습으로 성형수술 해놨어. 이게 무슨 미친 짓인지 설명 좀 해줄래요? 이해가 안 되는 건 나거든요. 답답해 미치겠는 건 나라고. 설마 그게 목적이에요? 진짜 나를 미치게 만들어서 정신병원에라도 가둬두려는 거예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차분하게 이야기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자, 다시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빌어먹을 심호흡은 아무런 도움도 안 돼요. 내가 눈 떠서 심호흡을 대체 몇 번이나 한 줄 알아? 내 불알이 없어졌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줄 아냐고.”

내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의사의 얼굴은 시시각각 시커멓게 죽어갔다.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있음을 알지만, 부득불 이 자리로 기어들어와 내 속을 긁는 소리만 해대는 의사의 잘못도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는 차수경이 아니에요. 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차수경이 아니라고. 차수경 새끼랑 그 가족 놈들이 작당을 하고 나를 차수경의 얼굴로 바꿔놓은 모양인데, 뭘 꾸미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순순히 당할 것 같아? 사람 살려놨더니 나를 이따위로 만들어놨다 이거지? 다 감옥 보낼 거야. 병원 문 닫게 만들어줄 거라고!”

“차수경 씨, 진정을…….”

“민재희! 민재희라고, 민재희. 내 이름 민재희! 차수경이라고 또 한 번 부르면 당신 불알도 행방불명 상태로 만들어줄 거야.”

그러면 댁도 나의 빌어먹을 상황 중의 하나에는 공감할 수 있겠지. 경고와 협박이 반씩 섞인 말에 의사가 엉덩이를 슬쩍 뒤로 물리며 두 무릎을 모아 붙였다.

“알겠습니다, 민재희 씨. 그럼 왜 차수경 씨와 그 가족들이 민재희 씨를 차수경 씨의 모습으로 바꿔놨다고 생각합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눈을 뜨니까 이 꼴이었는데. 묻고 싶은 건 나죠. 자식새끼 목숨을 살려줬더니 왜 나를 이 꼴로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물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차수경하고 병원장이라는 그놈 부모 아닙니까? 좋네. 말 나온 김에 물어보러 갑시다. 의사 선생님도 그게 궁금한 거죠? 자, 얼른 일어나요. 대답을 들으러 가자고.”

왜 여기에 앉아서 아무 상관도 없는 정신과 의사와 입씨름을 하고 있었을까. 왠지 모르게 말린 기분이 들었다. 괜히 힘만 빼고 있었네.

두르고 있던 이불을 내던지고 침대에서 내려와 서자, 의사가 머뭇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가자니까. 나는 시선으로 말하며 문 쪽을 손가락질했고, 의사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차수, 아니, 민재희 씨. 민재희 씨의 말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밖에 계신 민재희 씨의 보호자분과 의견이 다르다는 건 알고 계시죠?”

“그 사람이 왜 내 보호자야? 난 그 남자를 알지도 못하는데. 아무 관계도 아닌 사람을 막 보호자로 지정하고, 환자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게 해도 됩니까? 점점 가관이네, 이 병원.”

털면 먼지 많이 나오겠어. 그렇지? 삐뚜름하게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말하자 의사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환자분은 흥분 상태예요. 그건 본인도 알고 계시죠? 일단 마음을 차분하게 하세요. 저는 나가서 보호자분과…….”

“보호자 아니라고.”

“네, 네. 그럼 보호자라고 주장하시는 분과 이야기를 좀 나누고 오겠습니다. 그동안 환자분은 마음을 좀 추스르고 계세요. 아시겠죠? 절대 흥분하지 마시고 차분하게.”

“좋아요. 나가서 그 보호자라고 주장하는 사기꾼과 한번 얘기해봐요. 그 인간이 무슨 얘기를 할지 나도 궁금하네.”

내 허락에 의사가 자리를 피하듯 병실을 빠져나갔다. 남자의 비서와 간병인도 남자를 따라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병실 안에는 나 혼자였다.

남자가 간병인을 밖으로 불러 무엇을 할지는 익히 짐작이 되었다. 입막음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지. 그건 조금 문제가 있는데. 나중에 고소를 하게 되면 그 간병인이 증언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고소하게 되면 내 직업이 문제가 되지는 않으려나. 아냐, 아무리 소매치기라도 범죄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나도 법으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침대에서 일어나 빈 병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검사고 나발이고 일단은 목이 탔다. 냉장고에 가득 차 있는 음료수 중 하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남자가 의사에게 무어라 말을 할까. 자기네 병원 의사니까 한통속이 될 가능성이 컸다. 일단 병원에서 도망쳐야 하나. 이 병원에 있는 누구도 믿음이 가질 않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저들이 내게 원하는 것이 뭐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암담하기만 했다.

초조하게 병실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쾅,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병실 밖에 있던 남자가 의사와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씩씩거리며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러시는 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보호자분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 자식의 미친 짓거리를 더는 두고 볼 수가 없네요. 이젠 하다 하다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집안 먹칠을 하고 있잖습니까.”

“남부끄러운 줄 모르는 건 댁들이지.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놨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어?”

의사와 입씨름하는 남자를 향해 일침을 가했지만 남자는 조금의 가책도 없는 얼굴로 나를 쏘아보기만 했다.

“네가 육교에서 같이 떨어졌던 그놈이라고? 그놈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기나 해? 미친 척도 정도껏 해야지.”

“미친 척이라니. 웃기시네. 미친 짓을 한 게 누구인데, 날 미친놈으로 몰아?”

“그만! 더는 네 꼴을 보고 있을 수가 없구나. 네 눈으로 확인을 시켜주면 그 미친 짓도 그만두겠지. 그 뒤에는 또 무슨 소리를 지껄여서 내 머리를 아프게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 따라와. 보여주마. 너라고 주장하는 민재희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있는지 보여줄 테니까.”

남자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남자가 무엇을 보여주려고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남자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나는 당당하게 남자의 앞으로 다가가 섰고, 남자는 병실 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이러는 건 환자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여기서 더 충격을 받기라도 하면…….”

“혹시 압니까. 충격을 받아서 제정신으로 돌아오기라도 할지. 지금 이 상태보다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것 같은데요. 당신의 할 일은 끝입니다. 당신도 따라오든지 아니면 당신 진료실로 돌아가든지 마음대로 해요. 대신 병원장님께는 지금 일을 그대로 얘기하겠어요.”

어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저렇게 싸가지없을까. 쯧쯧, 혀를 차자 남자가 그런 나를 보더니 헛웃음을 내뱉었다.

“됐어요. 일단 저 녀석의 주장이 얼마나 미친 소리인지 알려주는 게 먼저니까.”

남자는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했고, 그런 남자를 나와 의사 선생, 그리고 남자의 수행원이 뒤따랐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남자가 지하의 어떤 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수행원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고 의사 선생은 남자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남자는 꽉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응시했고, 나는 남자가 무슨 꿍꿍이인 줄 몰라 힐끔거리기만 했다.

“내려.”

“내리라고 안 해도 내리려고 했습니다. 명령조로 말하지 마시죠.”

내 대거리에 남자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화려한 얼굴이 더욱더 화려하게 찌푸려졌고, 그 얼굴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통쾌해졌다.

지하라서 그런지 주변 공기가 서늘했다. 텅 빈 복도에 우리가 내는 발소리가 울렸고, 굽이굽이 돌아 도착한 곳에서 누군가가 예상치 못한 방문에 당황하여 다가왔다.

“나 병원장님 안사람입니다. 확인은 병원장님께 하고, 어제 들어온 육교에서 떨어진 시체 있죠? 꺼내서 보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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