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8
“이거요.”
“네. 꺼내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반지는 더욱 반짝반짝 예뻐 보였다. 조정현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같은 모양의 반지로 두 개를 달라고 했다. 조정현은 자신의 반지 사이즈를 몰랐기에 측정해 봤는데 사이즈는 일반 기준으로는 16호였고, 이 브랜드로는 9호라고 했다.
“상대분 반지 사이즈는 혹시 어떻게 되실까요?”
“……정확하게 재 본 건 아닌데, 저보다 좀 더 굵어요.”
“아, 그러시군요. 잠시만요.”
살짝 망설이며 답한 게 무색하게 점원은 얼굴에 웃음을 거두지 않고 바로 응대했다. 조정현이 “이 정도쯤.”이라고 하며 엄지와 검지를 말아 쥐자 바로 12.5호를 추천했다. 한참을 그 사이즈의 반지를 제 손가락에 끼워 보기도 하고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던 조정현에게 점원이 안내했다.
“혹시라도 사이즈가 맞지 않으실 경우엔 사이즈 조절이 가능하세요.”
“아. 네에. 그러면 이걸로 주세요.”
“네,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점원은 조정현이 고른 두 개의 반지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결제를 할 때에는 두 달 동안 열심히 일했던 돈을 쓰는 일이 이렇게 쉽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잠깐 허무하기도 했으나, 민트색 상자에 들은 반지를 생각하면 그것도 흐려졌다. 얼른 지승혁에게 반지를 끼워 주고 싶었다.
지승혁의 퇴근 시간을 두세 번 확인한 조정현은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해서 요리를 했다.
가게에서 어깨 너머로 익혀 두었던 음식도 만들어 차리고 있을 때 지승혁이 귀가했다.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조정현은 한달음에 현관까지 달려갔고 지승혁은 그런 조정현을 보며 웃었다.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런 얼굴로 봐요. 설레게.”
“네? 아, 아뇨…….”
조정현은 자신의 기분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나 싶어 뺨을 매만졌다. 그리고 그런 조정현을 보던 지승혁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아뇨. 없어요. 정말 없는데요.”
“으음, 그래요.”
고개를 도리질 치며 하는 이야기에 지승혁이 묘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찔리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찔린다기보다는 설렜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었지만 말이다. 어서 빨리 지승혁에게 반지를 주고 싶었다. 두 사람의 손에 똑같은 반지를 끼우고 싶었다.
조정현은 넥타이를 풀며 식탁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내려다보는 지승혁에게 말했다.
“……저기, 형.”
“네?”
“여기 앉아 보세요.”
조정현이 지승혁의 손을 잡아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지승혁은 순순히 조정현을 따라갔다.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달라고 하고 쪼르르 방으로 들어간 조정현은 반지 상자를 등 뒤로 숨긴 채로 걸어 나왔다. 지승혁과 눈이 마주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느라 제법 힘들었다.
“뭐예요, 뒤에 그거?”
지승혁은 조정현이 무슨 장난을 꾸미고 있나 싶었는지 웃으며 물어 왔다.
소파에 같이 앉아야 할지, 아니면 의자에 앉은 지승혁을 마주 보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야 할지 무진 고민을 했었더랬다. 조정현은 자연스럽게 그의 맞은편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그런 조정현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한 듯 지승혁의 반듯한 미간에 살짝 주름이 졌다.
맨살도 벌써 셀 수 없을 정도로 맞댔고, 적나라한 서로의 민낯도 많이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말로 마음을 설명하자니 진땀이 날 정도로 긴장됐다.
“저기, 형. 저한테 형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모르, ……모르시진 않으시겠지만 정말로 형이 있어서 제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정말 형을 많이 사랑해요.”
어렵사리 입을 연 조정현은 ‘사랑한다’는 단어를 실제로 소리 내자니 그 의미가 바래는 것 같은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었다. 지승혁을 향한 조정현의 마음은 단지 그 단어만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고작 사랑이라는 단어에 담을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알맞은 단어를 찾기란 너무나 어려웠다.
조정현에게 있어서 지승혁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들이었다.
그 마음을, 생각을 전달하기에는 말이란, 단어란, 너무 한정적이고 제한적이었다.
조정현은 볼 안쪽 살을 지그시 씹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이거, 형 손에 끼워 드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숨기고 있던 반지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를 여니 민트색의 주머니가 나왔고 그 안의 반지를 꺼내 들고 고개를 드니 지승혁의 얼굴이 보였다. 지승혁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조금 벌린 채로 조정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것도 같았고 놀란 것도 같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은 지승혁과 퍽 어울리지 않았다.
지승혁이 이런 반응을 보이니 도리어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조정현이 그의 왼손을 잡아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잘 맞지 않으면 어떡하지,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손가락에 꼭 맞았다.
만족스러움에 참으려고 해도 어쩔 도리 없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뺨이 씰룩거리는 게 스스로에게도 너무 잘 느껴져서 위아래 입술을 말아 물었다.
조정현은 지승혁이 어떤 반응을 보여 줄까 기대하며 시선을 움직였다. 지승혁은 조정현을 계속 쳐다보고 있던 듯했다.
시선과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상당히 긴 것 같은 몇 초의 시간이 지나고 지승혁이 제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쳐다보았다.
“혹시 돈이 필요하다고 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어요?”
“……네. 이거는, 형 돈으로 사기 싫었어요. 제가 해 드리고 싶었던 거니까요. 형 돈으로 사면 뭔가 아닌 것 같아서요.”
조정현의 말에 지승혁의 눈이 감탄으로 물들었다. 그는 조정현을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더니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반지 고마워요. 생각도 못 했어요. 이건 내 쪽에서 먼저 신경 썼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했네요.”
“아, 아니에요. 누가 먼저면 어때요. 그리고 저는 제가 사 드릴 수 있어서 좋은데요.”
뺨과 눈가, 콧날에 쏟아지는 뽀뽀에 조정현은 간지러워져 푸스스 웃었다.
“정현이 거는 있어요?”
“네. 제 거는 형이 끼워 주세요. 저 안쪽에 두고 나왔는데, 가지고 올게요. 잠시만…….”
“내가 가지고 올게요. 앉아 있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조정현을 말리고 어디에 있냐며 물어본 지승혁이 직접 가지러 갔다. 돌아온 지승혁은 조금 전 조정현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러고는 그의 행동에 당황한 조정현의 왼손을 잡았다.
“내가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미안해요.”
“아뇨, 아뇨. 미안할 건 전혀 없으신데.”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
투박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 새겨진 지승혁의 진심을 조정현은 알았다. 목 안쪽이 더워지는 느낌이 든 조정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반지를 끼워 주는 지승혁을 쳐다보았다.
지승혁의 시선이 자신의 손가락에 고정되어 있는 걸 깨닫고 나니 조정현은 왠지 손가락 끝에서 진땀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반지가 손가락 끝까지 들어가자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손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승혁이 왼손으로 조정현의 왼손을 깍지 껴 잡았다.
같은 모양의 반지가 걸그럭거리며 부딪쳤다.
비로소 얼굴에 열이 올랐다.
조정현은 자기보다 시선이 살짝 아래에 있는 지승혁을 끌어안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가벼운 키스가 이어지면서 쪽쪽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승혁의 손을 잡아 소파에 앉게 한 조정현이 입을 연 건 그 후로도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런데 저는 한 번 정도는 형이 가게로 오실 줄 알았거든요.”
“아…….”
지승혁의 목에 손을 두른 채 기댄 조정현의 말에 그가 눈썹을 위로 들어 올렸다.
“나도 가고 싶었어요. 정현이 일 그만두기 전에 하루 정도 시간이 남긴 했는데,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어? 왜요?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몰래몰래 음식도 좀 가져다 드렸을 텐데요.”
지승혁은 진심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조정현이 귀엽다는 듯 그의 아랫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조정현의 가슴팍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건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조정현에게 그가 말했다.
“여기까지 풀어 놓는다면서요, 유니폼 셔츠.”
조정현의 입이 벌어졌다.
“나 보기도 아까운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고 있는 걸 보면 그대로 끌고 나올 것 같아서요. 참느라 꽤 힘들었어요.”
“……어, 아니…… 네?”
생각도 못 한 이야기를 들어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한 조정현은 혼란스러운 듯 눈만 깜빡였다. 그래 봤자 유니폼일 뿐인데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하는 마음과, 그렇게 신경이 쓰였다면 말해 줬으면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교차하며 들었다.
어물어물거리고 있는 사이 지승혁이 조정현의 이마에 살짝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무슨 생각 해요?”
“아무 생각 안 했어요.”
“정말요?”
“정말이에요. ……아, 맞아. 그, 저도 보험 있는 거 그거, 보험금 수령자 형 이름으로 돌려놨어요.”
조정현의 이어진 말에 지승혁이 얼굴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그는 몹시 기묘한 표정을 지은 채 조정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험?”
“……? 네. 보험요.”
“그걸 왜.”
조정현은 지승혁의 반응에 의아해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그가 이런 반응을 할 줄은 몰라서였다.
“아니, 당연히…… 형도 저에게 그렇게 하셨으면서.”
“……그건 다른 얘기죠.”
“똑같은 거잖아요.”
조정현은 자신의 이야기가 되니 태도를 바꾼 지승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매가 가늘어지는 조정현의 반응에 지승혁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입장이 바뀌고 나니 실감이 되는 모양이었다.
“……와. 형, 너무하시다.”
조정현이 야속하다는 목소리를 내자 지승혁은 짐짓 무표정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정현은 그렇게까지 화는 나지 않았다. 그저 형이 이제야 제 입장을 이해해 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승혁이 이렇게 쩔쩔매는 모습을 좀 더 보고 싶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에서 조정현은 애써서 굳은 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몇 분 정도만.
지승혁이 조정현의 허리를 감싸며 화가 났냐는 질문을 몇 번이고 반복한 후에야 조정현은 표정을 풀었다. 자신의 웃는 얼굴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이는 지승혁이 못 견디게 귀여웠다는 건 조정현 혼자만의 비밀로 하기로 했다.
평범한 일상의 오후가 평온하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