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
“어?”
시간은 5시가 좀 안 되어 있었다.
이상했다. 지승혁이 귀가했던 시간이 분명히…….
거기까지 생각한 조정현은 자신의 핸드폰을 찾았다. 거실에도 없었고 평소에 충전을 해 두는 곳에도 없던 핸드폰을 찾은 장소는 조정현이 자고 있던 방 협탁이었다.
가지고 들어갔던 기억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싶었던 의문은 핸드폰 아래에 있던 메모를 발견하고 나서 풀렸다.
한 번 접힌 메모지는 지승혁의 글씨로 편지가 적혀 있었다.
글씨체도 그를 닮아 어른스럽고 정갈했다.
[너무 곤하게 자고 있어서 깨우지 못했어요. 오늘 오전 강의가 있는 걸로 알고 있어서 혹시 몰라 알람 맞춰 두고 핸드폰 옆에 뒀어요. 어제 일은 오늘 저녁에 다시 얘기해요. 식사 꼭 챙겨 먹어요.]
방에 들어왔으면 깨웠어도 됐을 텐데.
아니, 따지고 보자면 방에 누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도 까맣게 모르고 계속 쿨쿨 잠을 자던 스스로가 제일 문제였다. 한숨을 내쉬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조정현은 지승혁의 메모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잠깐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푹 잠든 모양이었다. 핸드폰 시간을 확인해 보니 일몰이라고 생각했던 건 일출이었고, 지금은 새벽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정말 푹 잠을 잔 것 같았다. 요새 과제 때문에 좀 무리하긴 했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잠들 줄은 몰라 제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핸드폰의 배터리도 100%로 충전이 되어 있었다.
지승혁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얼굴로 자고 있는 제 옆에 핸드폰과 메모를 두었을지 상상하니 가슴이 꾹 조여들었다.
흉통이 크게 부풀어 오르도록 크게 심호흡을 한 조정현은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어제는 죄송했어요. 오늘 퇴근하시고 뵈어요. 형도 식사 잘 챙겨 드시고요.]
아르바이트 면접을 간다는 걸 적을까 말까 하다가 떨어지면 좀 민망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합격 후에 말하는 쪽을 택했다. 지승혁에게서 답은 없었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아마 바로 확인하지 못하는 상황이리라.
조정현은 옷을 갈아입은 후 안방의 침대로 가서 다시 한번 풀썩 엎드렸다.
이불과 베개에서 지승혁의 냄새가 났다. 하루 떨어져 잤을 뿐인데 그 시간이 참 아깝고 속상했다.
역시 어제와 같은 태도는 좋지 않았다. 잠이 든 것까지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오랜만에 일찍 집에 들어온 지승혁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을 그렇게 흘려보낸 게 못내 아쉬웠다.
이렇게 있으니 지승혁이 옆에 없는 게 더욱 사무쳤다.
페로몬이라도 맡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지승혁이나 조정현이나 평소에는 깔끔하게 페로몬을 조절하는 타입이었기에 그것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매일 잠자리를 같이하긴 하지만 그만큼 매일 새로운 시트로 갈았기에 새 침구에 살짝 배어든 지승혁의 체향만 났다.
엎드려서 침대 시트를 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던 조정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문질렀다. 빨리 시간이 지나서 저녁이 됐으면 좋겠다. 지승혁이 보고 싶었다.
* * *
오전에 하나 있던 수업을 마치고 조정현이 향한 곳은 청담동에 위치한 브런치 카페였다. 영스타그램에서 종종 보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홀 안에 꽉 찬 사람들이 보였고 서빙을 하는 사람들이 가게로 들어오는 조정현을 발견하고 입 모아 인사했다.
그때 흰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의 카페 유니폼으로 보이는 옷을 입은 훤칠한 남자가 조정현 쪽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일행은 몇 분이실까요?”
“아, 저. 아르바이트 면접 왔는데요. 어제 전화 드렸던 조정현이라고 합니다.”
“아……!”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요. 저는 서현모라고 해요. 키가 큰 편이시네요. 저랑 시선 맞는 친구들 찾기가 쉽지 않은데. 아, 네. 어서 오세요. 일행분 몇 분이세요? 제가 자리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대화 도중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에게 밝게 인사를 하던 남자는 조정현을 보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굉장히 장사가 잘되는 곳 같았다. 상당히 넓은 내부는 사람들도 꽉꽉 들어차 빈자리가 거의 모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한 팀 나가나 싶으면 두 팀이 들어와서 거의 쉴 틈이 없어 보였다.
잠시 후 처음 조정현을 맞이했던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다른 아르바이트 해 본 적 없다고 했죠. 혹시 지금 바로 일하는 거 가능해요? 주문받고, 나온 음식 테이블로 가져다주기만 하면 되거든요. 우리는 메뉴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 외우기는 쉬울 거예요. 일하던 친구가 갑자기 그만둔 데다가 한 명이 다치는 바람에 지금 일손이 너무 부족해서.”
“네? 어…… 바로요? 아니, 괜찮기는 한데요.”
“그럼 부탁 좀 할게요. 근로계약서는 일 끝나고 작성하고, 정 뭐 하면 오늘 시급은 바로 지급해 줄게요. 아, 옷은 저기 스태프 룸에, 민석아. 이 친구, 이름이 조정현이라고 그랬죠. 저 친구가 이민석이에요. 정현 씨 옷 갈아입는 데 알려 드려.”
말하는 와중에도 여기저기 테이블에서 벨이 울려 대고 사람들이 들어와 정신이 없어 보였다.
민석이라고 불린 남자가 조정현 쪽으로 다가왔다. 그도 키가 제법 큰 편이었다. 스태프 룸으로 안내한 남자는 그에게 두 벌 걸린 유니폼 중 맞는 걸 입고 나와 달라고 하며 밖으로 나갔다.
일단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셔츠를 입었다. 어깨는 살짝 꼈지만 위에서 두 번째 단추까지 풀어 보니 다행히 움직이기에 많이 불편한 수준은 아니었다. 바지 허리는 좀 많이 헐렁해 원래 하고 왔던 벨트를 빼내 채웠다.
세로줄 무늬의 앞치마까지 허리에 착용한 조정현이 가방과 벗은 옷을 정리해 사물함에 넣고 밖으로 나오자 처음 인사했던 서현모가 다가왔다.
“정현 씨, 저 따라와서 주문받는 거 보세요.”
조정현은 그게 인수인계를 겸하는 거라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서현모는 메뉴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고 했지만 주문받는 팬케이크의 종류가 열두 개 이상이었다. 음료나 샐러드 같은 것까지 포함한다면 대략 서른 가지는 되어 보였다.
반보쯤 떨어진 곳에서 서현모가 오더를 받는 걸 보던 조정현은 바로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주스 리필을 하는 손님의 요구에 어디선가 나타난 이민석이 컵을 받아 들고 나갔다.
이렇게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건지 하나하나 물어볼 여유가 없어 보였다.
눈치껏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려 보니 하늘이 노을로 노랗게 물들어져 있었다. 들어오는 손님도 초반보다는 많이 줄어들어 한결 여유로워지고 나서야 조정현은 다리가 아프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정말 고생했어요. 아니, 그런데 알바 한 번도 안 해 보셨다면서 너무 잘하시던데요?”
제 옆쪽으로 와서 작은 소리로 말을 거는 서현모의 칭찬에 조정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했는지 어땠는지 스스로 판단이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못했다는 말보다 기분 좋았다.
“오늘 첫날이었으니까 이만 들어가시고 내일 나오세요. 근무 시간은 조절해야겠지만 최대한 맞춰 드릴게요.”
“아, 그래도 괜찮을까요? 아직 영업시간도 남았고 뒷정리도 해야 할 텐데.”
오늘부터 일을 할 예정이 전혀 없었기에 먼저 귀가하라는 권유가 달갑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나서도 바로 문 닫고 가는 게 아닐 것이기 때문에 그게 마음에 걸려 질문했는데 서현모가 감탄하며 웃었다.
“……와, 진짜 놓치기가 아까운 친구네요. 오늘은 그냥 보내 드릴 테니 내일 꼭 나오셔야 해요. 농담이고, 첫날인데 풀타임은 못 하죠. 이제 다음 타임 친구들 오니까 걱정 말아요. 아, 그리고 이거는 들어가실 때 택시 타고 가시라고. 오늘 너무 고생했어요. 인수인계도 제대로 못 했는데 막.”
서현모의 손에는 5만 원권 지폐가 반이 접힌 채 들려 있었다. 괜찮다고 거절하는 조정현의 손에 기어코 그걸 쥐여 준 서현모가 수고했다는 듯 등을 두드리며 재차 들어가 보라고 말했다.
바쁘게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눴던 사람들과 그제야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눈 조정현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스태프 룸으로 들어갔다. 빠르게 환복을 하고 가게를 나서니 급격한 피로가 쏟아졌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 어떡해.”
버스를 타고 가야 하나 어째야 하나 고민하던 조정현은 핸드폰을 꺼내 들며 난감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지승혁에게 미처 연락할 틈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에 지승혁에게 온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 찍혀 있었다.
아무리 오전에 조정현이 먼저 연락을 해 두었다고는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은 게 지승혁에게 어떻게 보였을지 염려됐다. 그럴 의도가 전혀 아니었는데 혹시나 기분이 상해 일부러 전화를 안 받았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싶어 난감해졌다.
조정현은 앞뒤 생각하지 않고 빠르게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울리자마자 지승혁이 전화를 받아서 그가 얼마나 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느껴졌다.
“여, 여보세요. 형. 저예요. 저기, 아니, 제가 실은 오늘 알바 면접을 왔는데요. 사정이 있어서 바로 시작하는 바람에 연락을 못 드렸어요. 어, 어디세요? 아직 퇴근 전이세요?”
-아뇨. 지금 집이에요. ……그랬군요. 알바.
전후 사정을 빠르게 마친 조정현의 설명을 들은 지승혁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조정현의 정신은 그가 말한 다른 단어에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