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외전 (2)화 (119/130)

#외전 1-2

“정현이 인감도장 있어요?”

생각도 못 한 질문에 조정현은 잠시 텀을 두고 대답했다.

“인감도장요? 그냥 도장 드리면 되는 거예요?”

제 대답을 들은 지승혁의 미소가 진해지는 걸 본 조정현은 자신이 뭔가 이상한 말을 했다는 걸 직감했다. 인감도장이라는 말은 몇 번 들어 봤는데 그게 통장 만들 때 쓰는 것과는 다른 걸까.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데 쉽지 않았다. 조정현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 근데…… 그건 왜요?”

“빌딩 하나를 정현이 앞으로 돌려놓으려고 하는 데 필요해서요. 없으면 이 기회에 같이 등록하러 가요.”

조정현은 방금 들은 말을 맞게 이해했는지 자신이 없었다. 빌딩이라니. 그걸 자신의 앞으로 돌려놓는다는 말은 또 뭔가.

얼른 대답하지 못한 조정현이 눈을 깜빡이며 지승혁을 응시하자 그가 “응?” 하고 되물어 왔다.

“부, 부루X블요?”

뜬금없이 터져 나온 질문에 지승혁이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정현이는 가끔 너무 귀여울 때가 있어요.”

지승혁이 조정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조정현은 멍한 상태로 있다가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몸을 뒤로 물리며 질문했다.

“아니, 저어. 그, 그런데 그건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빌딩요? 그걸 왜요?”

혼란스러웠다.

그도 당연한 게, 지금 지승혁은 마치 과자 한 봉지를 사 주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승혁은 조정현의 손등을 천천히 문지르며 말했다.

“삼성동 쪽에 있는 거라 나중에도 괜찮을 거예요. 건물 관리는 지금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해 주고 있으니까 따로 신경 쓸 일은 없어요. 그래도 관리하는 게 번거로울 것 같으면 반포 쪽 아파트 두 채를 가져도 좋고요.”

물 흐르는 것처럼 막힘 없는 지승혁의 이야기에 조정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조정현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 자, 잠깐만요, 형. 그, 그거 그렇게 막 주시고 말고 할 그런,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요. 갑자기…… 아니, 너무 갑작스러워요.”

“갑자기가 아니라 예고하고 주면 받아 줄 거예요?”

흔치 않게 건네는 농담에 조정현은 더욱 당혹스러웠다.

“네? 아니, 그런 말이 아니구요. 저기, 저는 필요 없는데…… 그런 거 필요 없어요.”

고개까지 좌우로 세게 흔들던 조정현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딱 멈췄다.

“……저, 형.”

“응?”

“……혹시, 저기, 헤, 헤어지자는 그런 말씀 하시려구요?”

지승혁의 입매가 살짝 굳는 게 보였다.

“설마요. 내가 그런 쓰레기로 보였어요?”

“아뇨. 아니, 그건 아닌데. 갑자기. 너무 갑자기라서요.”

지승혁의 얼굴은 잔잔하게 웃고 있는데 주변 온도가 5도 정도는 떨어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조정현은 즉시 아니라고 대답하며 내심 안도했다. 그런 이유는 아니구나, 하고.

하지만 조정현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할 정도로 지승혁의 말은 급작스러웠다.

“그러면 왜…… 그런 걸 주신다고 하세요……? 빌딩이라뇨. 그런 걸 주신다고 막 받을 수는 없어요.”

“아…….”

돌리지 않는 직설적인 질문에 지승혁이 눈을 한쪽으로 굴리며 말을 길게 늘였다. 조정현은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하지 않으면 물러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런 결심을 지승혁도 느낀 모양이었다.

“예전부터 어렴풋하게 생각하던 거예요.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되어서요. 일단 이번은 이것만 받아요. 나머지도 차차-”

“승혁이 형……!”

다급히 그를 부른 조정현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라뇨. 무슨 일이 뭔데요. ……그런 일이 안 생기면 되잖아요. 아무튼 저는 못 받아요. 안 받을 거예요. 그러니까 더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고집스럽게 말했다.

한 치의 다른 것 없는 진심이었다.

만일 지승혁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하는 전제를 깔고 그에게 무언가를 받는 행위 자체가 꺼림칙했다. 그게 설령 제아무리 값싼 거라고 하더라도 받을 수는 없었다. 그건 마치 지승혁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하는 가정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승혁은 그런 조정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정현이보다 나이가 많은 건 알고 있죠?”

“…….”

조정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게 아니더라도 사람은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내가 당장 내일 고꾸라질지도 모르고.”

“형!”

조정현이 더 이상 듣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코가 시큰하고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지승혁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지승혁이 옆에 없다는 생각만 해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힘든데.

숨소리가 씨근거리며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가슴은 좀체 진정되지 않았다.

지승혁이 그냥 한번 해 보는 말이 아닐 터였다.

평소라면 달래 주었을 다정한 손길은 없었다. 지승혁은 그저 가만히 조정현이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정현은 그 점도 못내 서러워져 입술을 잘근 씹었다.

지승혁이 죽었을 때를 대비한 돈.

그런 걸 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받고 싶지도 않다.

아무리 가설이라 하더라도 그런 잔인한 말을 하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 말이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서러워지고 야속하게 느껴졌다.

결국 조정현은 코를 훌쩍이면서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정현아.”

“저 지금은 형이랑 말하고 싶지 않아요.”

결국 일방적으로 그렇게 통보를 한 조정현이 몸을 돌렸다.

받느냐, 받지 않느냐.

타협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둘 중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지승혁이나 조정현이나 서로 뜻을 굽힐 리가 없었다.

지금 이 이상 말하면 무슨 말이 나올지 몰랐다. 공연히 날카로운 말로 서로 상처를 입히거나 받는 것보다 머리를 좀 식힌 후에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습관처럼 안방으로 들어가려던 조정현은 멈칫 걸음을 멈췄다. 자신이 안방을 차지하면 지승혁은 다른 곳에서 쉬어야 할 텐데 매일매일 힘들게 일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조정현은 잠깐 망설이다가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그냥 휑하니 들어가 버리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문고리를 돌려 열기 전 조정현이 비스듬히 뒤를 돌았다. 지승혁과 눈이 마주쳤다. 계속 보고 있었던 걸까. 조정현은 “저어.” 하고 입을 열었다.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말을 하다 보니 점점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 목소리가 작아졌다. 빠르게 말을 마친 조정현은 방 안으로 쪼르륵 들어갔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정현은 완전히 어둑해진 창밖을 멍하게 내다보았다. 울지 않으려 애를 썼기 때문일까. 눈물이 많이 나지는 않았지만 눈이 아팠다. 정확하게는 눈알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제대로 뜨고 있기가 버거웠다.

침대에 천장을 보고 누운 조정현은 하얀 벽지를 올려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조용한 와중 지승혁은 지금 잘 쉬고 있을지, 식사는 했을지 신경이 쓰였다. 계속 바쁘게 일하는 사람이니 식사는 제대로 챙겨 먹어야 할 텐데.

물론 지승혁이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거니와 밥을 제 손으로 차려 먹지 못할 정도로 덜떨어진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 마음이 또 그런 게 아니었다.

여태까지 수고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몸은 편해도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지승혁에게 내일 아르바이트 면접을 간다고 말해야 했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말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습관처럼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던 조정현은 그제야 핸드폰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탄식했다.

하기야 핸드폰이 있다고 하더라도 연락을 하기 애매한 상황이었다. 띡 문자만 보내기도 애매했기 때문이다.

조정현은 기다란 한숨을 내리쉬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고 생각했는데 창밖이 푸르스름했다.

해가 저무는 시간이 된 걸까.

고개만 돌려서 창문을 보던 조정현이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지?’ 하는 것이었다. 잠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자서인지 옷에 주름이 졌다.

구깃거리는 옷을 잡아당겨 펴면서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던 조정현은 평소와 다른 상황에서 밀려 들어오는 불안감에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내려서면서 지승혁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두 번째로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을 때였다.

“……아.”

멍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이 새어 들어오는 것처럼 천천히 기억이 돌아왔다. 완전히 깨끗하게 비워진 머릿속에 이전에 있던 일들이 채워져 퍼즐 맞춰지듯 완성되어 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 지승혁이 이르게 귀가를 해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 대비로 저에게 건물을 준다고 했었다. 그 얘기에 발끈해 지승혁을 피해서 이 방으로 들어왔었다.

복기를 마친 조정현은 잠에서 깨고 생각해 보니 굳이 그렇게까지 기분 상한 티를 낼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싶어 후회가 됐다. 지승혁에게 사과를 하고 얘기를 좀 더 나눠 봐야겠다 싶어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던 조정현은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집 안이 조용했다.

적막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승혁이 형……?”

지승혁의 이름을 부르며 집 안을 돌아다니던 조정현의 시야에 시계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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