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외전 1-1
그런 생각을 평상시에 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계기는 장소 이동 중에 차 안에서 들었던 라디오의 한 사연에서부터였다.
김성채는 혼자서 대기를 할 때 종종 라디오를 틀어 놓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지승혁이 탑승을 하면 라디오를 종료하고 조용함을 유지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부터는 김성태에게 편하게 들어도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후로 차 안에는 조용함 대신 라디오 소리가 채웠다.
아침 이른 시간에 이동하는 중이었다.
라디오에서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대해 상담을 하는 코너가 진행 중이었다.
-다음 사연입니다. 네. 끝 번호 0427로 보내 주셨어요. 어릴 때 부모님께서 보험을 많이 들어 주셨는데 어떤 식으로 정리를 해야 할까요, 하시고. 네. 이런 경우가 좀 많죠…….
좌석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지승혁이 손으로 입가를 천천히 문질렀다.
“김성채 씨도 보험 있습니까?”
“네? 아, 네.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수령인은 가족에게 해 두었습니까?”
김성채는 갑작스레 지극히 사적인 영역을 물어 오는 것에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지승혁은 “그렇군요.” 하고 간단하게 답한 후 생각에 빠졌다.
* * *
조정현은 층수 버튼을 누르고 벽에 기대섰다.
수업을 듣고 집으로 향하던 중 백화점에 잠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같은 과의 박영현이 남친과 함께 맞추었다며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우며 잘 어울리냐고 물어 왔다. 그 반지가 얼마나 예뻐 보였는지 몰랐다.
집으로 오면서 조정현은 자신의 텅 빈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지승혁의 큼직한 손가락도 떠올려 보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에 같은 모양의 반지가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붕 떠올랐다.
그런 마음으로 들른 백화점에서 조정현은 커플링을 알아보러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정말 딱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이것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고객님. 바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직원 한 명이 생글거리며 친절하게 응대해 왔다.
“커플링 찾아보고 계신가요? 이번에 저희 브랜드에서 새로 론칭한 디자인인데 아주 깔끔하고 예쁘게 잘 나와서 인기가 높은 제품입니다.”
유리 진열대 밖으로 나온 반지는 가까이서 보니 더욱 마음에 들었다.
다이아몬드가 많이 세팅되어 화려하게 반짝이는 것보다는 깔끔한 쪽이 더 눈에 들어왔다. 같은 디자인도 화이트 골드인지, 로즈 골드인지에 따라서 느낌이 달랐다.
“같은 모양으로 다이아몬드가 세팅되어 있는 반지도 있어서 이렇게 여성분이 하시고 두 개를 커플링으로 하시는 게 인기가 많습니다.”
“아, 네에.”
조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커플링을 할 상대는 여자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남자랑 할 건데요, 라고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애매하게 긍정했다. 알파나 오메가들은 상대의 성별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나 그 숫자가 많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베타를 기준으로 이성 커플이 많았기에 직원의 응대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조정현은 가격 택을 뒤집어 금액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지승혁과 함께 백화점을 가도 주얼리 쪽은 살펴보질 않았기에 가격을 처음 알게 됐다. 막연하게 얼마 정도 하겠지, 하는 어림짐작을 훨씬 웃도는 금액이었다. 잠시 직원을 앞에 두고 고민하던 조정현은 결국 다음에 오겠다고 하고 매장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돈이 없었다.
물론 지승혁이 쥐여 준 카드로 반지를 살 수는 있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지승혁에게 선물로 하는 반지를 그의 돈으로 해결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정현은 가벼운 기분으로 찾았던 백화점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 나와야 했다.
낙담한 마음에 모든 반지가 그 정도 하는 건가 싶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
인터넷에 나온 브랜드를 보니 몇만 원 정도의 저렴한 반지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승혁에게 주는 반지인데 최선이 아닌 차선을 고르고 싶지 않은 데다가 너무 저렴한 걸 사는 건 내키지 않았다. 당장 지승혁이 하고 다니는 넥타이핀의 가격이 얼마인지도 알고 있는 상황에 그런 그의 손에 끼우는 반지를 가격에 맞춘답시고 아무렇게나 고를 수 없었다.
물론 가격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가격만큼 정성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할 수 있는 노력도 들이지 않고 그냥 이게 내 최선이라고 하기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잠깐 고민하던 조정현의 머릿속에 곧 해결책이 떠올랐다.
돈이 없다면 벌면 되는 것 아닌가.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라 마치 ‘1 더하기 1은 2’라는 사실을 막 깨달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를 하자. 그렇게 마음을 먹는 것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도착했다는 알림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집으로 돌아온 조정현은 바로 핸드폰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 직원을 구하는 공고들을 살펴보며 대략적인 급여를 보던 조정현은 잠시 입술에 힘을 주어 꾹 다물었다. 지승혁과 함께 살면서 제 손으로 돈을 벌거나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반추해 보니 확실히 조정현은 저 스스로 돈을 벌어 본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뭔가를 과소비하는 성향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지승혁과 함께 산 이후로 장을 볼 때 가격보다 맛이 있느냐, 얼마나 싱싱하냐를 따져 사곤 했었다.
보통 일반적인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꾸려 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저것 많은 걸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문득 든 생각이 머릿속을 배회했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살고 있다는 부끄러움이 와락 들어 입술을 좌우로 깨물거렸다.
하지만 그 문제로 인한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골똘히 생각한다고 해도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근무 시간과 시급이 괜찮은 아르바이트를 추리고 면접 날짜까지 잡은 조정현은 이전에 지승혁을 만났던 초반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었다. 그때 지승혁을 우연하게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등이 서늘해졌다.
조정현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괜스레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시계를 보며 지승혁의 귀가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오늘도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귀가할 것 같다고 했으니 밤 11시쯤 들어올 것 같았다.
미리 문자로 말이라도 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이라고는 지승혁이 유일했지만, 그가 연락도 없이 이 시간에 귀가할 리가 없었다. 조정현은 의아해하며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다.
예상한 대로 지승혁이었지만 믿기지 않아 반응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어, 어서 오세요.”
지금 시계가 고장 난 게 아닌가 싶어진 조정현은 창 쪽을 한 번 확인했다. 아직 환했다.
평소 지승혁이 귀가하는 시간보다 대여섯 시간은 일렀다.
지승혁은 아직 평사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야근이나 추가 업무가 있으면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서서 해결을 하곤 했다. 너무 오랫동안 일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그의 건강을 걱정했지만, 그런 조정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늦게 입사했는데 한동안은 일 열심히 배워야죠.’ 하고 말했다.
지호택은 아직 도영 그룹의 회장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몸 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업무 같은 건 수행하기 괜찮은 건가 싶은 의문이 들었다. 병원 일정이 주에 적어도 한 번씩은 있는 지승혁에게 주저하며 물어봤을 때에 그는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지호택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영향력은 아직도 건재해서 명목상으로나마 빼지 않는 거라고 말이다. 조정현은 잘은 몰랐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명목상이라곤 하지만 아직 지호택이 회장 자리에 있는데도 지승혁은 요령을 피울 생각 같은 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가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조정현은 내심 감탄했다.
어쨌든 그간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짧았지만 그걸 가지고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을뿐더러 조정현 역시 대학 생활로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그가 이 시간에 귀가를 하다니.
일찍 퇴근한다는 연락을 미리 받지 못해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런 만큼 더욱 선물처럼 느껴졌다. 조정현의 놀란 반응에 지승혁의 눈매가 부드럽게 변했다.
“쉬고 있었어요? 잠깐 이쪽으로 와 봐요.”
조정현은 자신을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춘 지승혁을 따라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소파에 앉은 조정현은 이참에 지승혁의 손가락 두께를 좀 미리 봐야겠다 싶어졌다.
깜짝 선물로 반지를 주고 싶었기 때문에 지승혁이 그때까지는 모르게 하고 싶었다.
그의 손을 잡은 조정현은 슬쩍 손가락을 얽은 후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단단한 손 마디마디가 느껴졌다. 확실히 조정현의 손가락보다 두꺼웠다.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수치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 손에 반지를 끼우면 어떨까.
분명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지승혁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조정현은 문득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너무 티 나게 주물럭거렸나 싶어 머쓱하게 손을 떼려는데 지승혁이 입을 열었다.
“다 만졌어요?”
“네, 네? 아…… 네.”
지승혁은 조정현의 손을 도로 붙잡았다. 그리고 다섯 손가락을 천천히 손가락 사이로 얽어 와 꽉 잡았다. 미지근한 지승혁의 손바닥은 바삭하게 말라 있었다.
조정현의 엄지와 검지 사이를 간질이듯 만지던 그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