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117)화 (117/130)

#117

“징그러운 새끼.”

가차 없는 평가를 내리는 목소리는 정태준의 것이었다.

조정현은 식탁에 가지구이를 내려놓다가 지승혁과 정태준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씀은 좀.”

“아니. 정현아, 생각해 봐. 이게 인간이냐고.”

급기야 손가락질까지 하며 언성을 높이는 정태준의 행동에 지승혁이 인상을 썼다.

“애가 보는 데서 못 하는 말이 없군.”

“……이야, 지금 할 말이 그거뿐이세요? 징그럽다는 거에는 뭐 코멘트 없어? 너도 동의한다는 얘기지?”

정태준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던 지승혁이 말했다.

“정현이 부르는 호칭에 신경 좀 쓰지.”

정태준의 얼굴이 너무 알기 쉽게 바뀌었다. ‘미친 새끼 아냐, 이거.’ 하는.

머쓱해진 조정현이 이름으로 부르셔도 괜찮다고 하며 지승혁의 옆에 앉았다.

“정현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도 징그럽다고 생각하지 않아?”

정태준은 지승혁이 들으라는 듯 이름을 힘주어 말했다.

“네, 네? 저요?”

갑작스럽게, 그러나 너무나 예상이 가능했던 질문 화살이 날아들었다.

“저는, 좋은데요.”

조정현의 대답에 정태준은 일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렸다.

“좋고, 싫고가 아니라……. 아니, 그래. 좋은 거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말이 되냐고. 이 정도면 <세상에 이X 일이>에 나와야 하는 거 아냐? 아니, 페로몬 기관을 제거했는데 어떻게 반년 뒤에 다시 생겨? 지가 도마뱀이야, 뭐야. 심지어 형질도 극우성이야. 하다못해 열성이라도 돼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다가 열이 오르는 듯 언성을 높이는 정태준을 보던 지승혁의 미간에 주름이 세로로 직 그어졌다.

“내가 극우성이건 열성이건, 너랑은 전혀 관계가 없을 텐데. 그게 아니면 서윤영 씨가 만족을 못 시켜 주나?”

“뭐? ……야, 이 미친놈아. 애가 들어……!”

“……저, 애도 아니고, 일단 성인인데요.”

조정현이 작게 항변했지만 두 사람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다.

결국 조정현은 한숨을 삼키고 옆에 있던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그랬다.

그 일이 있은 후로 6개월.

정태준이 말한 대로 바로 얼마 전. 지승혁에게 제거한 페로몬 기관이 다시 생겼을뿐더러 형질 역시 극우성 알파 그대로 재발현했다. 마치 이전의 일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의 수술 사실을 모르는 병원에서는 새삼스럽게 형질 검사를 하는 지승혁을 의아하게 여기는 듯했으나 별다른 질문을 하진 않았다. 검사를 하는 병원 관계자들의 반응에 조정현은 지승혁이 병원에서 정식으로 수술받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안색을 굳혔다. 어쩌자고 그런 위험하고 무모한 행동을 했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조정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챈 지승혁이 바로 손등을 비벼오며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말해와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가까스로 넘어갔다.

극우성 알파라는 결과지를 받아 들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안도였다. 그의 형질이 뭐든 사실 조정현에게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가 알파냐, 아니냐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단지 자신만 아니었다면 지승혁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됐을 거라는 죄책감 때문에 문득문득 괴로워졌었다. 그런 상황에 지승혁에게서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정현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사이 지호택 역시 의식을 차렸다.

병원에서 알아낸 바로는 페로몬 과다로 발생한 역류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들었다. 이는 아주 드문 사례로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는 데 애를 먹었고, 자칫 원인불명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마침 한국대학병원에 페로몬 관련 권위자가 와 있었기에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단지, 그의 증상이 페로몬 역류 때문이라는 건 알았으나 그 역류가 일어난 원인은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고.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망설이던 조정현에게 지승혁은 “내 짐작이지만.” 하고 입을 열었다.

지호택은 프로텍트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해 신체의 페로몬 제어 기관이 한계치에 달한 상태였을 거라고 했다. 그런 상태에서 조정현에게 페로몬을 강제 주입하려다가 튕겨 나온 지호택 본인의 페로몬과 밀려든 그의 우성 오메가 페로몬을 노쇠한 신체가 제대로 버티지 못해 발생한 일 같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나 의식이 돌아왔어도 후유증은 깊게 남았다.

사지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데에다 판단력 역시 많이 흐린 상태였다. 가끔씩 제정신으로 돌아와 확실한 의사소통이 되기도 하지만, 수반되는 심각한 통증에 어쩔 수 없이 투여되는 마약성 진통제로 인해 거의 온종일 멍해져 있다는 이야기에 조정현은 가까스로 “그렇군요.” 하고 답했다.

지승혁은 주에 두어 번은 병원에 방문하는 듯했다.

그 이유에 대해 조정현이 묻지 않았는데도 지승혁이 먼저 말해 주었다. “인공으로 만든 알파 페로몬보다는 인체에서 채취한 게 낫다고 해서 말이죠.” 하고.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조정현은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입에 올리지 않았다.

조정현의 시선은 식탁에 고정된 채 어느 한 점을 집요하고도 멍하게 응시했다.

“비결? 당연히 정현이 덕분이 아닌가 하는데.”

“……억.”

물컵을 이로 물고 있던 조정현은 갑자기 제 이름이 나오는 것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영문을 모르는 조정현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자 정태준이 질린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면서 이를 갈듯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래. 내가 커플 있는 데서 무슨 말을 하겠어. 어디 애인 옆에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냐.”

“어, 같, 같이 오셔도 됐었는데.”

정태준이 사귀고 있는 서윤영은 조정현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권유가 나왔다. 그러나 정태준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상사랑 같이 먹는 밥이 즐겁겠어요? 특히 여기 같은 상사랑.”

“……아.”

턱짓으로 지승혁을 가리키는 정태준을 보며 조정현은 입을 다물었다.

서윤영이 아직도 지승혁의 아래에서 일하는 줄은 몰랐다. 현재 지승혁은 도영에서 평범한 일을 하는데 그런 그의 밑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걸까. 필요하니 고용한 거겠지만 말이다.

그때 지승혁이 젓가락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적당히 먹었으면 돌아가.”

“뭐라냐. 네가 뭔데. 난 정현이 초대받고 왔거든. 아니, 그런데 진짜로. 정현아, 네가 만든 밥이 파는 것보다 훨씬 맛있어. 매일 정현이가 만든 밥 먹으면 원이 없겠어.”

“정현이가 만든 밥을 왜 매일 먹을 생각을 해.”

지승혁의 말을 듣던 정태준이 개구리 짜부라지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구겼다.

티격태격하고는 있지만 정말로 분위기가 경색되지는 않았다. 옆에서 보는 조정현이 괜히 불안해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긴 했지만, 실제로 둘은 태평하게 주고받는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네. 접니다. 바로 오시면 됩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지승혁의 행동에 조정현과 정태준 둘 다 움직임을 멈추었다.

“5분 뒤면 도착한다는군.”

“뭐?”

“서윤영 씨.”

지승혁이 고개를 까닥이자 정태준은 멍한 얼굴을 했다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 사람이 왜. 출장 갔다며. 어떻게 5분 뒤에 도착을, ……너, 나 쫓아내려고 그러는 거지? ……뭐,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나중에 만나면 되니까. 어차피 집에 올 거고.”

“서윤영 씨가 들으면 낙담하겠군. 열흘 만에 만나는 거 아니었나?”

투덜투덜 중얼거리던 정태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단박에 확 조여든 공기에 조정현은 눈을 깜빡이며 두 사람의 안색을 살폈다.

정태준은 말없이 두어 번 음식을 더 먹다가 결국 안 되겠다는 듯 탁, 젓가락을 내려놨다.

“정현아, 미안해. 나 가 봐야겠다. 나중에 또 밥 만들어 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정태준이 급하게 인사를 건넸고 조정현은 바로 따라 일어났다. 하지만 지승혁이 그런 조정현의 팔을 잡고 제지한 덕분에 그를 배웅하러 갈 수가 없었다.

“알아서 가겠죠.”

“네? 아니, 하지만…….”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조정현은 식탁 위에 잔뜩 차려진 음식들을 쳐다보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태준 형 오랜만에 뵙는 거라 열심히 만들었는데.”

어젯밤부터 분주하게 준비했던 일이 떠올라 아무래도 그냥 넘기기가 힘들어 원망스럽게 중얼거렸다. 지승혁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도 오랜만이잖아요. 내 생일 이후로 이 시간에 보는 거.”

“어, 네에. 그렇, 그렇긴 한데요.”

지승혁의 지적에 조정현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지승혁이 말한 생일날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다 보니 뺨이 뜨끈했다. 그때는 정말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벤트를 했었는지 지금 와서도 잘 설명할 수 없었다.

딱 그날 하루를 제외하고 지승혁은 계속 바빴다. 그러다가 겨우 짬을 낸 게 오늘이었다. 자는 도중 지승혁이 들어오거나 나갈 때 간간이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확실히 그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지승혁이 물을 마신 후 입을 열었다.

“학교는 다닐 만해요? 전과한다던 건 어떻게 됐어요.”

“네. 전과는 2학년부터 가능한데 일정 학점 이상이어야 한다고 해서 열심히 하려구요.”

“지금도 장학금 받고 있는데 얼마나 더 열심히 하려구요. 전과 희망한다는 데가 사회복지과였나요?”

“아, 네에…….”

지승혁이 던진 질문에 조정현은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혔다. 조정현은 과거 우철곤과의 사건 이후로 제도의 손이 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를 고민했고, 그 끝에 내린 결론이 복지 관련 종사자가 되는 것이었다.

감히 세상을 바꾸겠다는 식의 어마어마한 포부를 가진 건 아니었다. 그래도 외부에서 돕는 것보다 직접 그 일을 하는 사람으로 참여할 수 있는 형식이라면 뭔가 조금이라도 더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어느 정도까지 실현이 가능할지 모르는, 아직 희망 사항 단계에 그치는 정도의 포부였으나 뜻하지 않게 과시를 한 것 같아져 좀 민망해졌다. 조정현은 화제를 다른 걸로 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기. 이거, 아무래도 좀 남을 것 같죠? 3인분으로 만들어 둔 거라…… 입 대지 않은 부분만이라도 미리 좀 덜어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지승혁은 보관용 식기를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조정현을 말렸다.

“내가 다 먹을게요.”

“……두 사람이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요.”

게다가 이 중에 몇 가지는 정태준의 요청을 받고 만든 음식이었다. 정태준이 조금 더 먹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어쩔 수 없이 들었다.

“괜찮아요, 다 먹을 수 있으니까.”

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둘러본 지승혁의 목소리가 퍽 비장했다.

조정현은 그런 지승혁을 물끄러미 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면 어떻게든 되겠죠. 저도 열심히 먹을게요.”

일단 눈앞에 있는 음식부터 먹어야겠다 생각하며 전투적으로 젓가락질을 하는 조정현을 보며 지승혁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두 사람 다 묵묵하게 접시를 비워 가던 중이었다.

“서윤영 씨는 제오 캐피탈 정리 후에 남은 일들을 처리하고 있어요.”

“네? ……아. 그, 그러셨어요.”

지승혁이 조금 전 떠올렸던 조정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툭 말을 꺼냈다.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요.”

“어, 그야 그렇긴 했지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왜 지금 말했어, 나쁜 새끼.’가 아니라?”

“네? 아니, ……네?”

과격한 단어 선정에 조정현이 당황했다. 물론 얘기해 준 건 기뻤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진 않았기에 만약 신경 쓰는 걸로 보였다면 해명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조정현은 젓가락 끝을 입술로 물었다가 떼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꼭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필요하셔서 하신 걸 테니까요. 저어, 그리고 굳이 하나하나 다 말씀 안 해 주셔도 괜찮아요.”

“…….”

“진짜로요.”

지그시, 말없이 응시하는 시선에 빠르게 덧붙인 조정현은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도, 비밀로 하고 말씀 안 드린 것도 있고.”

이번에야말로 조정현을 향하던 지승혁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래요?”

“네.”

그러곤 다시 한번 침묵.

먼저 입을 연 건 지승혁이었다.

“말 안 해 줄 거예요?”

“……비밀이니까요. 말씀드리면 더 이상 비밀이 아니잖아요.”

지승혁의 눈매가 마뜩잖은 듯 바뀌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순간 마음이 약해져서 말해 버릴 뻔했지만 이건 김윤혜와의 약속이기도 했다. 김윤혜와 지승혁 중 어느 한쪽이 더 중요하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김윤혜와의 약속이 먼저였기 때문에 지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주 단순한 사고 흐름이었다.

조정현이 지승혁의 손가락 두 개를 살그머니 잡고 살살 흔들었다.

지승혁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와 조정현 쪽에서 멈춰 섰다. 그러곤 조정현의 얼굴을 한 번, 그가 쥔 제 손을 한 번 보더니 픽 웃었다.

“기분 상하지 않았어요. 비밀 하나둘 정도 만들어도 괜찮아요. 그런다고 해서 뭐가 바뀌는 일은 없으니까.”

지승혁이 손을 움직여 조정현의 손을 거의 통째로 쥐었다.

“그렇죠?”

“아니…….”

입술이 쪽쪽쪽쪽, 소리를 내며 닿았다가 떨어졌다. 조정현이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허리를 감싸는 지승혁의 팔에 의해 저지당했다.

“음식, 음식 식는데요…….”

“괜찮아요. 정현이가 만든 건 식은 것도 다 맛있으니까. 뭐 하면 내가 다 먹어도 되고.”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음.”

가냘픈 저항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낸 지승혁이 입술을 가로막았다.

“……으음…….”

살짝 입술을 핥아 오는 것에 조정현은 흘긋 식탁 위에 있는 음식들을 쳐다보았다. 바로 먹는 게 더 맛있을 텐데. 알고는 있다. 알고는 있지만.

“하아…….”

눈앞에 있는 남자와의 입맞춤이 끔찍할 정도로 달았다.

조금 뒤에 먹는다고 뭐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을까. 약한 이성이 결국 백기를 들었을 때였다. 지승혁의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얼른 치우고, 나갈까요.”

“네?”

멍하게 열에 들떠 있던 조정현이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뜨거운 분위기였는데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반응하기가 힘들었다.

“오늘 날씨 좋아요. 이런 날에 정현이랑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어요. 근교라 오래 걸리지 않아요. 얼른 다녀와서 저녁으로 먹어요.”

“……아.”

외출도 좋다. 정말 좋긴 한데…….

조금 전의 키스는 뭐였는지 묻고 싶어져 조정현의 마음속에 불퉁하게 못마땅함이 솟아올랐다.

지승혁은 그런 조정현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물론 이대로 침대에서 뒹굴고 싶은 마음도 없는 건 아니지만, 정현이는 아직 어리니까 더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어요. 데이트 하면 생각나는 게 침대뿐이면 좀 그렇잖아요. 나는 바깥에서 데이트하면서 즐거운 기억도 만들고 싶거든요. 나중에 오늘 볼 하늘과 같은 하늘을 보면서 그땐 그랬지, 하고 떠올리는 것도 근사할 것 같지 않아요?”

그러고 보면 지승혁은 말을 참 잘했다. 최근 들어 더욱 화술이 늘어난 것 같았다.

마음이 사르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조정현은 지승혁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음식들이 상하지 않도록 간단하게 치운 뒤 외출했다.

시간이 시간대라 그런지 도로에 차는 많지 않았다. 바깥 경치가 금방 바뀌어 이내 기다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한적한 풍경이 나타났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정말로 푸르렀다. 조정현은 그 모습을 기억에 새기듯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들과의 경계가 명확하게 되어 있어서 마치 물감으로 그린 것 같았다.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 좋은 하늘이었다.

바깥 공기는 어떨까 궁금한 마음이 들었을 때 창문 유리가 스르륵 내려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조정현의 마음을 본 듯 지승혁이 창문을 열어 준 게 마냥 신기하고 행복한 기분이었다. 이심전심이란 이런 걸까.

작게 웃는 조정현의 웃음소리에 지승혁이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어 왔다.

천천히 색이 물들 듯 서로에게 스며들어 가는 걸 확인한 기분이 들었다.

나무 냄새를 머금은 청량한 바람이 살랑거리며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뇌리에 푹 꽂혀 들 정도로 강렬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소중했다. 자칫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 채 무덤덤히 넘길 수 있었지만 그대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가능한 한 차분하게 제대로 음미하고 싶었다.

하루하루의 기억은 하나씩 쌓여 가 추억이 되고 세월을 이룬다.

매일매일 좋은 날만 있지는 않을 거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라면 결국 웃을 수 있을 거다. 분명.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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