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당시에 그런 상황에서 오롯이 혼자 모든 걸 짊어지고 결정했을 지승혁이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웠을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겨웠을지 상상하다가 어쩔 도리 없이 눈물이 차오르는 걸 참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는 건 상대에게 묘한 압박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승혁은 눈에 힘을 주며 울음을 참는 조정현을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상대가 조정현이니까 모든 걸 감수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래도 만약 신경 쓰인다면 더욱 좋아해 달라고.
원망을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지승혁은 그런 기미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조정현만을 배려해 주었다. 그 마음 씀씀이에 더욱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결국 조정현은 지승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코를 훌쩍이던 조정현은 지승혁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저렇게 쳐다보고 있는 걸까, 의아해진 조정현은 결국 제 얼굴을 더듬거리며 만졌다.
뭐가 묻지 않고서야 저렇게 빤히 보고 있을 일이 없을 텐데. 괜히 진땀이 나서 결국 왜 그러냐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현의 질문에 지승혁은 제 턱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턱에 뭐가 묻어 있나 싶어 손으로 문지르는데 ‘여기에 주름 생기는 게 귀여워서요.’ 하는 대답이 돌아와 일순 아연해졌다. 전혀 의식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 말을 듣고 나니 너무나 신경 쓰였다.
손등 쪽으로 턱 부근을 가리며 보지 말라고 하자 지승혁은 웃었다. 사람 속도 모르고. 지승혁이 보인 반응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노려보고야 말았다.
그때를 다시 떠올리는데 저도 모르게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지는 걸 느끼고 표정을 바로 하던 조정현은 뺨에 닿는 지승혁의 시선을 깨닫고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 이제 형은 출근하셔야 하는 거예요? 바로 가셔야 해요?”
지승혁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조정현이 밝은 목소리로 건넨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오늘 저녁은 먼저 들어요. 한대병원에 들러야 해서 조금 늦어질 것 같으니까.”
“아, 한대병원요.”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조정현은 지승혁이 무슨 이유로 병원에 들르는지 알아차렸다. 그 병원에 지호택이 입원해 있었다.
의식불명으로 입원한 사람이 사람인지라 뉴스에서도 잠깐 보도될 정도였다.
도영 그룹의 총수인 지호택은 아직까지 의식회복을 하지 못했으며 주가에도 영향이 갈 거라는 소식을 앵커가 무미건조하게 보도하던 걸 떠올렸다.
지승혁 역시 지호택이 어떤 일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지에 대해 아직까지 병원 쪽에서 정확한 원인을 검사 중이라고 말해 주었다.
딱히 계속 이야기할 만큼 유쾌한 주제는 아니었기에 조정현은 알겠다고 하며 지승혁의 안색을 살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무리 그래도 친부인데 복잡한 심경일 것 같았다.
무슨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그가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지 자체도 자신이 없었다. 그날 폐건물에서 있었던 두 사람의 대화에서 지호택이 지승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 일방적으로 깔보는 시선은 아무리 그가 지승혁의 생부라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생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극우성 알파라는 점을 제외하고서라도 지승혁에게는 좋은 점이 아주 많았다. 왜 그걸 볼 생각을 하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편협한 시각에 기가 막히고 화도 났다.
그런 걸 빤히 다 봐 놓고 그래도 가족인데, 하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가족인데.’ 하는 말은 지승혁에게 할 게 아니라 지호택을 향해야 할 것이 아닌가.
역시 그때,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 줄걸. 그때는 긴장을 참는 것만으로도 급급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후회가 되었기에 그때를 생각하면 입 안이 썼다.
지승혁은 조정현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의 손바닥에 입을 맞춘 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자신은 정말 괜찮다고 하는 것에 조정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조정현은 떠오른 생각들을 빠르게 갈무리하며 말을 이었다.
“식사 거르지 마시구요. 꼭 하셔야 해요.”
지금 당장 조정현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밥을 챙겨 먹어야 한다는 말뿐이지만 그래도 지승혁의 옆에서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좋았다. 만족의 정도가 너무 낮은 거 아닌가 싶기도 했으나 우울해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지호택이 쓰러진 건 확실히 큰일이었기에 그날을 기점으로 지승혁은 제시간에 돌아오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많아졌다.
새벽같이 나가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일한다는 게 마냥 안쓰럽게 느껴지기만 했다.
오늘 지승혁이 귀가한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늦지 않았다. 그가 집에서 나간 시간으로 계산해 본다면 상당히 오랫동안 나가 있던 게 될 테지만 말이다.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다 잠들었던 조정현은 인기척에 눈을 떴다. 아직 졸음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머리는 생각하는 속도가 느렸다.
지승혁이 드레스 룸에서 나오는 걸 보고 작게 소리를 내자 그가 고개를 돌려 조정현을 쳐다보았다. 지승혁은 살짝 당황한 듯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미안해요. 내가 낸 소리 때문에 깼어요?”
잠에서 깨자마자 보이는 지승혁의 얼굴을 보던 조정현은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어 가만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조정현이 누워 있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지승혁이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던 조정현이 다시 감기는 눈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좋아서요.”
스스럼없이 솔직하게 대답한 조정현은 팔을 들어 그를 끌어당겼다. 지승혁은 그가 뭘 할지 보려는 듯 가만히 따랐다. 조정현은 마치 덮개처럼 제 몸 위에 포개진 지승혁의 등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았다.
익숙한 체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그립고 좋은 향이었다.
얼마나 그 향에 취해 있었을까. 조정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시간까지 고생하셨어요.”
잠시 그의 등을 토닥토닥거리던 조정현은 자신을 감싸는 따뜻한 체온에 그만 깜빡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잠결에 작게 혀를 차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부드럽게 덮여 오는 잠기운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지승혁이 등 뒤에서 그를 안고 잠들어 있었다.
큼직한 손이 허리에 둘러져 기분 좋은 묵직함이 느껴졌다.
목덜미에 닿는 지승혁의 숨결에 조정현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했다. 잠기운이 완전히 달아난 상태로 얼마간 있던 조정현은 조심조심 고개를 돌렸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어렴풋한 조명이 무방비하게 잠든 지승혁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기 위해 허리를 안은 지승혁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살짝 떼어 낸 순간 다시 강한 힘으로 껴안아 왔다.
설마 깨웠나 싶어 긴장하고 가만히 굳어 있던 조정현이 지승혁의 반응이 잠결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몸을 돌려 눕기에 다시 한번 도전했을 때에는 다행히도 성공했다.
마주 누운 조정현은 고르게 숨을 내쉬는 지승혁의 얼굴을 신기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무방비하게 잠든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늘 빈틈없이 반듯하게 정돈했던 머리가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어 평소보다 편해 보였다.
힘든 일은 내색하지 않는 그였지만 최근 일이 얼마나 고될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직 대학 졸업도 못 하고, 능력도 없는 조정현이 실질적으로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저 마음뿐이었다.
안달복달한다고 해도 바뀌는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지승혁의 목덜미에 있는 붕대로 자연스레 시선이 움직였다.
자신이 신경 쓸까 봐 집 안에서도 가리고 있으려 하는 지승혁을 간신히 설득해 편한 차림을 하게 했다. 그렇지만 확실히 이렇게 보고 있자면 가슴이 아팠다.
그가 포기한 모든 것들에 대한 애석함과 안타까움이었다. 그리고 그것과 비례하게 자신을 향한 순수한 애정을 느꼈다. 그건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붕대 안쪽의 상처를 보지는 못했지만 역시 아플 것 같아 평소에는 제대로 건드리지조차 못했다. 지승혁이 잠들어 있는 지금도 붕대의 끄트머리만 간신히 어루만질 뿐이었다. 피부 위를 유영하듯 가볍게 만지던 조정현은 결국 손길을 거둬들였다.
내려온 앞머리를 살그머니 치워 주니 지승혁이 작게 소리를 냈다.
“……음.”
미간에 작게 주름이 잡혀 깨운 게 아닌가 싶어 일순 긴장했지만 이내 다시 잠든 것처럼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미간에 새겨진 주름은 그대로라 무심코 검지로 그 부분을 문질렀다.
감겨 있던 눈꺼풀이 흠칫하는 듯하다가 천천히 열리며 그 안의 눈동자가 보였다.
“앗. 죄송해요. ……아니, 계속 주무세요.”
잘 자는 사람을 괜히 깨운 미안함에 토닥거리자 지승혁이 꾸물거리며 조정현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왜…… 계속 안 자구요.”
졸음이 배어 잠겨 있는 목소리였다.
“자다가 깼어요. 저도 다시 자려구요.”
“……그래요.”
지승혁이 조정현의 등허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게 마치 어린아이를 재우는 것같이 느껴져 마음이 포근해졌다. 방금 전에 바로 깨서 다시 잠들기가 조금 어렵지 않을까 싶었지만 가만히 있자니 또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작게 하품을 한 조정현은 지승혁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눈을 감았다.
지금 다시 잠든다고 해도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체온이 섞인 아늑한 이부자리에서 조정현의 숨소리도 곧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