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퐁달치즈빵 호랑이님의 아기 복숭아 (115)화 (115/130)

#115

조정현이 눈을 떴을 때 지승혁은 없었다. 한낮이 훨씬 지나 있던 상황이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했지만 빈자리의 쓸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단지, 조정현이 잘 볼 수 있는 협탁에 지승혁이 쓴 메모로 추정되는 종이가 있었다.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지 않고 출근한다는 말. 그리고 퇴근 후에 보자는 약속이 적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기억은 거실에 있는 소파였다. 잠든 사이 지승혁이 침대에까지 옮겨 준 게 분명했다.

옷도 갈아입혀져 있는 걸 확인한 조정현은 뺨을 붉혔다. 전혀 기억에 없던 탓이다.

물론 지승혁이 귀가하지 않았던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어 피로가 쌓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곯아떨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피곤한 건 지승혁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모조리 그에게 맡긴 형국이 되어 버려 미안해졌다.

그리고 걱정도 됐다. 그 후에 몇 시간이나 자고 출근을 한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으음,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던 조정현은 이내 그 생각들을 떨쳐 냈다.

지승혁을 향한 미안한 마음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돌아오는 시간까지 할 일이 많았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도 오랜만이니 맛있는 걸 만들고 싶었다.

핸드폰을 들고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조정현은 입술을 한 번 꾹 다문 후 손을 움직였다.

몇 번이나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가 완성한 문자는 결국 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송신을 마치자마자 전화기가 울려 와 당황했다.

“어, 네에. 네. 형.”

-일어났어요?

갑작스러운 전화에 긴장했지만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지승혁의 목소리에 금세 편안해졌다.

“아, 네. 형은 언제, 아니 몸은 좀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아요. 음, 그래도 걱정해 준다면 사양 안 할게요.

어제 자신이 말했던 이야기 때문일까. 굳이 덧붙이는 말에 좀 부끄러워져 조정현은 무심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하지만 결코 싫지 않았다. 신경을 써 준다는 점이 드러나 창피하긴 해도 말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병원 예약해 뒀어요. 나랑 같이 가서 검사받아 봐요.

“아…… 형질 테스트요?”

-맞아요. 정태준이 우성 오메가라고 예측한 건 잘못되지 않았을 테지만, 확실히 해 둬야죠.

“네……. 어, 그런데, 저어. ……오늘 얼마나 주무시고 출근하신 거예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지승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 반응으로 보건대, 얼마 못 자고 나간 게 분명했다.

-그냥. 괜찮아요.

“만날 괜찮다고만 하시고.”

저도 모르게 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화기 너머로 지승혁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에요. 어제 정현이랑 같이 있어서인지 피로 회복이 됐나 봐요.

지승혁에게 정확한 답변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결국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바쁜 사람을 이렇게 붙잡고 있어도 되는지 그게 불안해졌다.

“바쁘실 텐데 일 안 하셔도 괜찮으세요?”

-우리 정현이가 냉정하네. 일이나 하라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구요. ……그건 아니지만요. 바쁘, 바쁘시니까요.”

-알아요. 한번 장난쳐 봤어요. 정현이 목소리 들으니까 힘이 좀 나네요.

기분 탓일까. 이전에도 나빴다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왠지 한 꺼풀 벗은 느낌이 들었다. 좀 더 격의 없어졌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전에도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과 비교한다면 말이다.

참 이상한 느낌이었다. 더욱 지승혁과 가까워진 것 같아 지금 상황이 기쁘기도 했다.

장난스러운 대화를 끝으로 잠시간 조용해졌다. 지승혁이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고요한 와중 오롯이 그 소리만 들렸다.

-얼른 돌아가서 정현이와 함께 쉬고 싶네요.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괜스레 옆구리가 간지러워져 어깨를 들썩였다. 조정현은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따 오시면, 같이 식사하고 쉬어요.”

-그럴까요. 그거 생각하면서 버텨 봐야겠네요.

“열심히 하시면 상 드릴게요.”

-상? 기대해도 돼요?

바로 돌아오는 질문에 조정현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 정도까지는 아니구요.” 하고 덧붙였다.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는 그 자체로 안도감이 들었다. 이전과 같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한다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인지 미처 몰랐다.

전화를 끊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못내 아쉬워 질질 끌고 있는 사이 수화기 건너편에서 지승혁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하는 소리까지 들은 조정현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급하신 것 같은데, 끊고 나중에 봬요.”

아쉬운 마음은 있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잖아도 바쁜 사람인데 일하는 데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았다.

통화를 종료한 조정현은 잠깐 동안 멍하게 허공을 올려다보다가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승혁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작했다.

맑은 공기가 기분 좋게 불어왔다.

조정현이 청소를 한 후 저녁 준비를 마쳤을 때 지승혁이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지승혁의 무기질적인 얼굴이 조정현을 보자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 간극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극적이었다. 가슴이 녹진하게 풀어지는 느낌이 들어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조정현은 망설임 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서 나는 바람 냄새는 변치 않았다. 폐 속 깊숙이 들이마시듯 크게 심호흡을 한 조정현이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다녀왔어요.”

평범한 인사였는데도 그 목소리가 주는 울림이 남달랐다.

조정현은 씰룩이는 입가를 지그시 내리누르며 지승혁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오늘도 목 끝까지 올라오는 옷을 입고 있었다. 조정현의 시선을 눈치챈 지승혁이 그의 뺨을 살며시 감쌌다.

“죄송해요. 피곤하시죠. 간단하게 씻으시고 식사부터 하세요.”

“……볼래요?”

지승혁이 자유로운 한 손으로 제 목께를 툭툭, 두드렸다. 눈을 깜빡거리던 조정현은 음식들을 차려 놓은 식탁을 떠올렸다가 잠깐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의를 탈의한 지승혁의 목덜미에 붕대가 둘러져 있었다. 두꺼운 거즈 같은 것이 고정이 되어 있는 그 모습은 그저 보기만 해도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프세요? ……아니, 당연히 아프실 텐데 이상한 질문이네요. 많이 아프세요? 약은 드시고 계세요?”

“진통제 먹으면 참을 만해져요. 하루에 두 번 정도 먹고 있어요.”

지승혁은 괜찮다는 대답 대신 자신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조정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그 안의 상처가 어떤지까지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붕대 근처를 어루만지는 조정현의 표정이 어땠는지 지승혁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렇게 안 아파요.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으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식사도 잘 하고 계시고요?”

“……음. 네.”

조정현의 손을 잡아 가슴팍에 대고 지그시 누르던 지승혁의 대답이 조금 늦어졌다. 조정현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설마 아무것도 안 드시고 약 드시는 건 아니죠?”

“먹어요. 우유나 뭐…… 그런 거?”

이어 나온 대답에 조정현은 얼굴을 굳혔다. 대수롭잖게 대답하는 지승혁을 보고 있자니 나오는 말투가 자연스럽게 엄해졌다.

“그거는, 그건 식사가 아니죠. 빈속에 약 드시면 안 돼요. 그러시다가 위 아프세요.”

“앞으로 잘 챙겨 먹을게요.”

그는 한 번만 봐 달라는 듯 말하는 지승혁의 손을 잡아 살짝 당겼다.

“저녁 약 아직 드시기 전이죠? 얼른 오세요. 아, 추우시죠. 저기, 옷 다시 입으세요. 아니, 어차피 갈아입으시긴 해야 하니까 새 옷 가져다 드릴까요?”

갈팡질팡하며 혼잣말하듯 하는 말에 지승혁이 웃었다.

“정현이가 원하는 대로 해 줘요.”

깊은 뜻 없이 한 말일 텐데 어쩐지 의식됐다. 조정현이 입술을 감쳐물고 살짝 끌어당기자 지승혁은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아주 얌전히.

* * *

아침 일찍 방문한 병원에서 형질 테스트를 하고 조정현이 받아 든 종이에는 ‘우성 오메가’ 판정이 적혀 있었다.

담당의는 몇 가지 검사를 더 한 뒤 열성 오메가에서 우성으로 바뀌게 된 까닭이, 이전에 조정현이 인공 오메가 페로몬을 과도하게 투여받았던 일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했다. 그때 주입된 오메가 페로몬이 조정현의 페로몬 기관을 자극해 이미 발현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재발현한 것 같다는 의견을 조심스레 냈다.

흔한 일은 아니고 해외에서도 관련 사례가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적긴 하지만 발생은 한 경우라고 했다. 또한 이론상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말을 들으며 묘한 기분이 되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우철곤과의 일이 없었다면 우성 오메가로 재발현되는 일은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지금 병원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는 건 조정현 쪽일 터였다.

검사 결과를 들은 조정현은 지승혁과 함께 진료실을 나섰다.

지난밤 지승혁에게 프로텍트가 무엇인지 전해 들었다.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조정현은 지호택의 무자비함에 놀랐다. 또한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었다지만 프로텍트를 받아들인 지승혁의 행동이 너무나 무모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가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원인은 결국 조정현 자신이었다. 그 사실이 지승혁을 향한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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