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형? 잠깐, 무슨 말씀…… 아.”
지승혁은 제 어깨를 쥔 그의 손에서 벗어나 몸을 떨어트리려는 조정현을 끌어안았다. 마른 몸이 답삭 품 안에 들어왔다. 이대로 없어질 것만 같아서, 혹여 그가 뿌리치기라도 할까 봐 지승혁은 점점 팔에 힘을 주었다.
조정현의 얼굴을 보는 게, 두려웠다.
“…….”
지승혁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조정현을 피했던 이유.
지금도 그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는 이유.
페로몬 기관 제거 수술 후에 집에도 돌아가지 않고 그를 만지지도 않았던 이유.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을 한다고 해도. 난해한 말로 겉치레를 한다고 해도 결국 본질은 하나였다.
그저.
단지.
무서웠다.
조정현이 자신을 떠날까 봐.
더 이상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저를 보지 않을까 봐.
그랬다. 여태까지 지승혁을 괴롭히던 그 감정은 그토록이나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느껴 보지도 못했고 평생 느낄 거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그 감정에 직면하자 몸이 떨렸다.
이런 건 몰랐으면 좋았을 거다. 알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면 분명 훨씬 좋았을 테고 무감하게 살 수 있었을 게 틀림없었다.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좋은 걸 봐도 싫은 걸 봐도 컵에 담긴 물처럼 감정에 큰 변화 없는 삶을 살았을 거다.
그러나 조정현을 알게 된 후 많은 게 바뀌었다.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바뀐 건지 인식하지 못했다. 조금씩 물에 젖어 들어가듯 그렇게 스며들었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을 알게 됐다. 단순히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구가 아니라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조정현을 곁에 두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비굴하게 배를 드러내고 연약한 살을 내보이는 것도 감수할 수 있었다. 조정현을 품에 둘 수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승혁의 일방적인 입장이고 바람이다.
조정현의 마음은 어떤지 모른다. 그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그건 바로 어제까지의 일이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른다. 직접 물어 확인하기엔, 두려웠다.
혹시라도 원하지 않는 답을 들을까 봐.
겁이 났다.
여태까지는 자신의 생각에 흔들림이 없었다. 주변에서 누가 뭐라고 하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작은 일에도 일희일비하고 있다. 조정현의 손짓 하나, 눈짓 한 번에 과민하게 반응했다. 이렇게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에는 익숙지 않았다.
멀미라도 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조정현을 놓는다면 그 순간 이 모든 게 거짓말처럼 편해질 게 틀림없었다.
“너를 놓는다면.”
그가 없다면 이런 혼란스러움도 사라질까. 이전처럼 무감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까.
“네가 옆에 없다 해도 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먹고. 자고. 일하고. 그게 가능은 하겠지.”
그저 그뿐인 생활. 그뿐인 삶.
조정현 없이 하는 생활. 그게 정말 가능할까.
지승혁은 저도 모르게 이를 사리물었다.
“……아니, 아냐. 못 해. 난 못 해. 안 돼. 네가 옆에 있는 게 어떤 건지 알아 버렸어. 이제 나는 너 없으면 숨을 쉴 수도 없어.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지 잊어버렸어. 이전처럼은 못 돌아가. 돌아갈 수 없어.”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던 조정현의 몸짓이 어느 순간인가 멈추었다. 지승혁은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아 그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를 품에서 놓칠 것 같은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나 아닌 다른 놈이랑 웃는다는 상상만 해도 견딜 수가 없어. 네 옆자리는 내 거야. 누구에게도 못 줘.”
조정현의 옆에 누군가가 있다고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렸다. 뱃속 깊은 곳에서 시커먼 감정이 꿈틀거렸다.
어린애도 하지 않을 법한 서툰 말로 표현된, 안에 담아 뒀어야 했을 날것의 감정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법도 잊을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지승혁은 자신의 숨이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슴 위에 누가 무거운 돌이라도 얹어 놓은 것처럼 호흡하기가 힘들어 괴로워졌다. 크게 심호흡을 두어 번 해도 변함이 없었다.
당연했다. 물리적인 작용 때문에 느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꽉 짓눌리는 갑갑함을 가까스로 견디며 지승혁은 자신의 품 안에서 조용히 있는 조정현의 이름을 불렀다.
* * *
“정현아.”
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름이 불려 조정현의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홀린 듯 듣던 조정현은 곧 그게 자신의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다.
살짝 고개를 움직여 지승혁 쪽으로 시선을 돌린 조정현은 자신을 쳐다보는 눈의 흰자위가 파르라니 빛나는 걸 보고 숨을 멈추었다.
저를 보는 지승혁의 시선이 너무나 강렬했던 탓이다.
그는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느꼈던 찌를 듯한 눈빛보다 더욱 깊고 진해진 시선으로 조정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 같은 사람을 내가 감히 가질 수 있을까.”
읊조리는 목소리는 지극히 낮았다.
엄지가 조정현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가 가볍게 문질렀다. 이에 살짝 그의 손가락이 닿자 닿은 부분에서 전기가 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열기가 배꼽 아래에서부터 시작되어 조금씩 퍼져 나갔다.
솜털 하나하나 전부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공포심 때문이 아니었다.
타오르는 것 같은 눈동자로 조정현을 보고 있던 지승혁의 손이 그의 목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 일련의 행동에 조정현은 몸을 떨었다. 믿을 수 없게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승혁의 손길에서 그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지승혁이 의도한 게 아니라 조정현이 멋대로 느낀 그 감각은 빠르게 그의 전신을 훑었다.
“몸을 떠네요.”
여상한 목소리였다.
지승혁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고 목소리는 더욱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그 말 안에 담겨 있는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게 아니라고 설명하려고 했으나, 조정현 자신도 제 몸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어 말할 길이 요원했다. 정확하게는 이런 상황에서 자극을 받았다는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어이없어하며 제게 오만 정이 떨어질까 무서워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꼭 몸이 고장 난 것 같았다.
“소름 돋은 거, 알고 있어요?”
너무 가까이에 있다가는 안 될 것 같았다. 다급해진 조정현이 지승혁과 닿아 있던 몸을 떨어트리려고 살짝 뒤로 빼려 했지만 강한 힘으로 도로 안겨 버렸다.
지승혁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의 입매는 단단하게 굳었다.
“내가 무서워요?”
고저가 없이 평연한 목소리에 담긴 내용을 뒤늦게 깨달은 조정현의 입술이 벌어졌다. 지승혁은 그런 조정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내쉰 숨결이 피부에 부딪혔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살갗에 닿는 지승혁의 시선이 뜨겁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알면 정현이는 지금처럼 소름 돋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
지승혁이 상체를 숙여 서로의 이마와 이마를 붙였다. 뜨거운 체온. 그리고 그것보다 더 뜨거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널 갖고 싶어. 이런 상황인데 널 품에 가두고, 널 안고 싶다고 생각해. 발정 난 개새끼도 이러진 않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니…….”
지승혁은 조정현이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그의 양 뺨을 그러쥐었다. 지승혁의 손바닥은 뜨겁고 건조했다.
“왜 내 앞에 나타났어요. 왜.”
원망 섞인 말과 원망 섞인 숨소리가 조정현의 몸을 꽁꽁 묶었다.
지승혁의 턱이 꿈틀거렸다.
“……너만 아니었다면 나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 거야. 뭔가 잃을까 봐 겁낼 일도 없었을 거야.”
지승혁의 입에서 원망이 흘러나왔다. 아니, 이건 애원이다. 간절한 바람이다.
그가 조정현을 이렇게나 좋아한다고. 이렇게나 사랑한다고.
모습을 달리 바꾼 사랑 고백이었다.
지승혁은 꽁꽁 감춰 두었던 약한 부분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한숨과 함께 섞여 나오는 투박한 진심에 조정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쁜 말로 포장된 것보다 지금의 여유 없는 그의 모습이 더욱 마음을 흔들었다.
숨이 막혔다. 하지만 그건 강하게 자신을 끌어안은 지승혁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던 건지 그 감정의 깊이를 알게 되어 벅차올랐기 때문이다. 지승혁에게 뭐라 답을 해 줘야 했지만 현재 조정현은 당장 그 기분을 다스리는 데만도 급급했다.
지승혁은 맞대고 있던 이마를 떼고 그의 귓불과 목덜미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에 지승혁의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내가 페로몬을 더 이상 낼 수 없다는 게 다행이에요. 그게 아니었다면 난 내가 가진 페로몬으로 정현이를 자극해서 질질 싸게 만들었을 거예요. 그 이후에 얼마나 후회를 하건 당장 이 불안함을 없애는 데만 급급했을 테니까.”
지승혁의 낮은 목소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극우성은커녕 알파조차도 아냐. 너랑 각인도 할 수 없고 네게 페로몬을 주지도 못해. 이제 나한테 남은 건 그저 너에게, 나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내 옆에 있어 달라고 비는 것뿐이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정현의 뺨을 손가락 바깥쪽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